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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20. 2024

자신의 아내를 죽인 사람

[26분 13초] 6화

[현재, 2021년]


신침이 가득 서린 그의 입가로 빠르게 사라질 수증기가 새어 나왔다. 유난히 늦게 찾아온 이번 겨울은 혹여나 세상이 자신을 잊었을까 더 시린 공기를 내보냈다. 그의 진갈색 목도리의 끄트머리가 불어오는 바람에 치여 이리저리 흩날리고 색 코트 주머니에 파묻힌 손가락 끝이 빨갛게 상기었다.


"여기야."

그의 뒤편에서 게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화상으로는 알 수 없던 13년간의 세월이 게일의 목소리에 묻어나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적당히 무개감 있는 작은 술집이었다.

문 끝에 달린 풍경이 울리고 그들은 가게를 두리번거렸다. 어두운 암흑 속에서 고고하게 빛을 내는 몇 개의 촛불이 여기저기에 방치된 책들을 비추고 있었고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다육이가 테이블 위로 한 개씩 놓여 있었다. 가게 모퉁이에선 곰팡이 냄새와 쿰쿰한 하수구 냄새 사이의 어떤 미묘한 향이 났는데 신기하게도 그 향을 맡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이 꽤 있는 듯했다.

그들은 입구 왼쪽 구석 앉으며 간단히 마실 을 주문했다.


그들이 대화를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0분 후, 마실 것이 준비되었을 때였다. 게일은 연초록색의 41도 양주를, 이안은 진파랑색의 35도 양주를 들었다. 둘은 한동안 소리 없이 잔 안의 얼음이 떠도는 것을 바라보았다.

"놀랐지? 갑자기 보자고 해서."

게일은 잔을 천천히 흔들며 동그란 벽에 부딪히는 사각형 얼음을 라보았다. 둔탁하지만 조화롭게 깎여진 유리잔의 표면은 천장 전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주황빛을 각기 다르게 굴절시켜 얼음 위로 은하수를 그리고 있었다. 게일은 잔 안의 얼음을 보고 있자니, 북극 위의 오로라 같다가도 점점 녹아 죽어가는 습이 자신 처지와 같는 생각 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부른 거야?"

그는 게일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양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진 파란색의 양주가 그의 식도와 위, 소장을 차례대로 방문하면서 언젠가 지워질 화상자국을 남겼다.

"6년 전에 스위라가 죽었잖아. 기억하지?"

그는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 오른쪽 부근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손을 포개 무거워진 머리를 실었다. 게일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스위라 자살 아니야. 남편한테 살해당한 거야."

"..."

게일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표정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우리 고등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 기억해?"

"…"

"검은색 머리, 남자치곤 하얀 피부, 정장, 30대, 기억 안 나?"

""

"제법 이쁘장한 이름이었는데."

게일의 오른손 검지 손톱 옆에는 오래도록 지속되었을 자해의 흔적이 있었다. 칼로 깊게 배인 듯한 살 가죽은 아물어지지 않은 채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멎지 않은 진득한 피가 고여 있었다. 제법 소란스러운 술집에서 나무토막을 긁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게일이 자해하는 소리였다.

"키는 180초였던가."

""

"사실 나 스위라랑 사귀는 사이 아니었어. 엄밀히 말하면 그냥 스위라가 나를 좋아한 거였어. 나는 그걸 이용한 거고. 그 국어 선생, 그때도 살인자였거든."

게일은 유리잔을 꽉 쥐고 양주를 들이켰다. 주황 불빛에 발간된 먼지 몇 톨이 그가 움켜쥔 잔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게일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옆집 여자가 선생에게 살해당했어. 그래, 정확히 초등학교 4학년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어.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옆집 문이 조금 열려 있었 나도 모르게 숨죽여 들여다봤어. 옆집 여자 앞으로 처음 보는 20대 남자가 서 있었지. 처음엔 둘이 무슨 놀이를 하는 줄 알았어. 남자가 여자에게 너무 상냥했거든. 여자는 재밌다는 듯 밝게 웃고 있었으니 누가 봐도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을 거야. 그런데 그 남자가 가녀린 여자애 몸을 의자 위로 올려놓고 전등으로부터 늘어진 밧줄, 그래 그 밧줄에 여자애 머리를 밀어 넣었어. 그러곤 딱 10분 후에 의자를 발로 천천히 밀었어."

게일은 두서없는 말을 주절거리며 기도에 넘어온 가래를 긁어 삼켰다.  

"부르르 떨리는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점점 피로 물들어져 가는 그 아이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을 때,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 그런데 정말 무서웠던 건, 죽이기 5분 전에 여자의 머리를 정성스레 빗어주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하는 남자의 행동이었어. 마지막 여자를 가슴 깊이 안고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때 느낀 소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야. 그렇게 남자는 의자를 밀었고, 여자가 죽어서 시체가 되었을 땐 아이를 안고 '이내 내 것이 되었다'라서 이마에 키스했어."

""

게일은 여전히 입 다물고 있는 그를 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게일이 20년 전 마주했던 여자애의 눈동자 같이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나 사실 그때 아무것도 못 했어. 방관하고 그 자리를 피했어. 변명인 거 알지만 당시에 나는 너무 어렸고 모든 상황이 버거웠어. 나도 저 아이처럼 죽임을 당할까 무서웠어."

게일은 검지 손톱 옆의 살가죽을 뜯었다. 뜯긴 살가죽과 본고향이었던 엄지손톱 옆이 가는 핏줄기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이 어떻게 마무리된 지 알아? 자살. 증거도 목격자도 없었기에 그냥 그렇게 종결어. 내가 진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로 끝나 버린 라고."

그의 눈동자는 변함없이 충혈되어 있었다. 게일의 눈동자도 어느샌가 어져 물이라는 땀을 배출하고 있었다. 깊고 맑았던 게일의 황초록색 동공은 이젠 녹조 낀 호수만을 연상시킬 뿐이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내가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을 보냈는지 너는 모를 거야. 초등학교 4학년이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었겠지. 만약 내가 진술했어도, 어렸기 때문에  조차 되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나는 그 여자애를 잊을 수가 없어. 잊으려고 노력해도 그 아이는 에 나타나 피 묻은 밧줄로 내 목을 여와. 그러면서 말하지. '네가 그 사람이랑 다를게 뭐야?'"

게일의 검지 손톱 옆으로 촉촉한 근육조직이 붉게 아른대고 있었다. 테이블 위로는 죽어버린 세포들이 껍질 채 질식되어 있었다.

"그게 매일을 시달리는데 딱 7년 후에 그 살인자를 국어 선생으로 다시 만나게 된 거야. 난 그 선생을 마주한 순간부터 계속 지켜봤어. 그 선생이 하는 행동, 표정, 습관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어. 그렇게 딱 5개월이 지났을 때 그 선생이 혼잣말하는 걸 들었어.

'스-위-라. 사랑하게 될 것 같아'라고"


게일은 손톱자국이 새겨질 만큼 힘을 주 주먹 쥐었다.

" 그때 깨달았어. 내가 정죄받을 수 있는 방법은 스위라를 지키는 거라고. 선생을 다시 마주한 순간부터 그 여자는 더 이상 꿈에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여자가 나의 더러운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해 준거어. 그래서 스위라에게 다가갔던 거야. 스위라를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으니까!"

게일은 움켜쥐었던 주먹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내 목소리를 죽이며 게 속삭였다.

"죽은 여자애와 스위라가 겹쳐 보였기 때문에 스위라를 이성으로 볼 수 없었어. 아니, 오히려 구원받는 과정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는 건 진정으로 죄를 뇌우치는 행동이 아니니 스위라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했던 모든 말 다 거짓말이었다고."

게일은 자신이 토한 언어가 염산이 되어 자신의 몸 곳곳을 녹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상체를 테이블 위로 굽히고 얼굴을 그림자로 그을렸다. 게일의 등은 굽은 새우 등딱지 같았다.


"래서 스위라와 사귀는 척 연기했어. 나와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선생은 스위라에게 접근하지 않았니까. 그렇게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 물론 큰 오산이었지. 설마 나와 헤어지고 나서, 스위라가 성인이 되고 나서, 스위라와 결혼을 하고 나서, 자신의 아내가 된 여자를 죽일 줄은…"

게일은 두 눈을 찌르는 것처럼 눈물을 닦아 며 자신의 액체로 젖은 연갈색 나무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마른 손으로 테이블에 떨어진 눈물을 계속 닦아 냈지만 떨어지는 눈물의 양을 이기지는 못했다.

"결국 난 정죄받지 못했어. 결국 난 구원받지 못했어."

문 너머로 시끄럽게 울리는 차 경적소리가 게일의 작은 혼잣말을 도망치게 했지만 그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내 죄악을 들어낼 용기가 없었어. 누군가에게 말하면 정말 지옥문이 열릴 것만 같아서..."


게일이 입술을 깨물며 흐느끼는 동안 그가 게일에게 건넬 질문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 선생 지금 어디 있어?"

게일은 그의 질문에 흠칫 놀라며 이내 뭉쳐버린 허리를 위로 피고 시선을 그의 동공으로 옮겼다.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게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전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에게 말해 버렸구나, 하고 게일은 후회했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실핏줄이 터져버린 그의 눈동자 붉은 핏물이 맺혀있기 때문이었다.

", 아직 그 학교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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