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분 13초] 7화
[현재, 2021년]
그는 눈을 감은 채 걸었다. 덕분에 몇 번을 넘어지며 피를 흘리긴 했지만 그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정신을 붙잡아야만 했다. 그는 일부로 발을 꼬아 쓰러지기도 했다. 자신에게 자해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느끼는 고통이 자신을 먹어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 머리뚜껑을 따고 차가운 숟가락으로 뇌를 떠먹고 있는 듯한 역함, 모든 사고가 주리 틀듯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 그는 왼손에 그어졌던 몇 개의 가는 줄을 만지며 겨우 집에 도착했다.
'끼이익-'
그가 돌린 문고리에서 귀신 신음소리가 났다. 그는 신발 밑창에 박힌 눈을 털어내지도 못하고 침대 앞으로 주저앉았다. 그러고선 옆에 잡히는 무언가를 끌고 와 그대로 있는 힘껏 주먹질을 해댔다. 사물이 폭신한 걸로 보아 그가 잡은 것은 베개였지만, 이내 안에 있던 깃털이 모두 빠져나와 그의 오른손 뼈 마디를 바닥에 닿게 했다. 베개로부터 해방된 깃털은 가볍게 공중으로 흩날리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붉게 물들어져 쥐덫에 걸린 양 바닥에 눌어붙은 무거운 무리가 있었다.
그는 머리를 벽에 박고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의 신이었는데, 당신은 나의 구세주였는데, 그런 당신을 내가 의심했어. 지금껏 너를 미워하며 살았는데, 지금껏 너를 증오하며 살았는데, 다 오해였구나. 너는 단지 신이었는데 내가 너를 미천하게 만들었구나. 당신은 자살이 아니었는데, 죽임 당한 것뿐이었는데 내가 당신을 오해했구나."
그는 흐느끼며 피 뭍은 주먹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쳤다.
"미안해. 당신을 모독해서 미안해."
차가운 계절 속 유난히 따뜻한 어느 집에서 침대에 기댄 채 울고 있는 한 남자의 눈물은 그 남자의 신발로부터 흘러나온 녹은 눈과 더해져 마룻바닥을 불게 했다.
그는 어느새 말라버린 바닥에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전에 보던 천장과는 달리 하얗고 눈부셨다. 고인 눈물 때문인지 천장에 붙어있던 죽은 모기 시체들이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천장엔 더 이상 붉은 핏물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품이, 그녀의 향이 그려지는 그저 아름다운 천장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죽었던 신이 부활했다.'
'죽었던 내 삶이 부활했다.'
하늘로부터 흩날리는 눈이 더 이상 지면에 닿지 않을 때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죽지 못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손목을 그어도, 약을 먹어도, 강물에 몸을 던져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정죄' 그리고 '구원' 때문이었다.
자신은 죄인이었다. 신을 의심하고 모독까지 쏟아낸 죄인이었다. 찢어 죽임을 당해도 마땅한 그런 천한 인간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그녀는 손을 내민 것이다. 그녀는 결국 자신을 살려낸 것이다.
신은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구원받을 기회를 주었다. 자신의 품에 안길 기회를 주었다.
'나를 죽인 놈을 죽여라. 그리고 다시 내게로 와라.'
죽음의 의자에 선 그녀가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머리털도, 귀지도, 지문도 그녀의 음성에 반응해 자세를 낮췄다.
"순종"
그는 작게 읊조렸다. 순종과 복종의 차이는 강제성의 유무며 이유 없는 복종은 곧 순종이 된다. 그는 강제적으로, 그리고 순종적으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는 몸을 틀고 오래된 나무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던 목도리를 집었다. 나무 의자 결 사이로 방황하는 나무가시는 그에게 박히지 않았다.
하얀 눈 밭 사이로 그가 걸어가고 있다. 언젠가 지나갔을 그녀의 걸음 위로 그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지고 있다. 그의 체중으로 움푹 들어간 그의 그림자에 하얀 눈송이들이 자리를 메꿔주고 있다. 겨울이 이토록 포근했던가-겨울이 이토록 사무쳤던가-,하고 그는 수북이 쌓인 눈밭을 조용히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