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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27. 2024

아아, 드디어 사랑을 하려나 보다

[26분 13초] 8화

[현재, 2021년]


에블린은 눈알을 굴리고 있다. 에블린은 자신의 사랑을 찾고 있다. 에블린은 이내 자신의 사랑이 될 것을 찾고 있다.

"벌써 교직생활도 17년인가-"

에블린은 창가 너머 보이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점심을 굳이 챙겨 먹지 않는 이유는 교무실에 혼자 남아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보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5명밖에 사랑하지 못했다니. 스위라 이후로 한 명뿐이야.'

에블린은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삼키고 운동장 위에서 흙 뭍은 채 뛰어노는 여자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


곱실거리는 연갈색 머리의 소녀가 깊이 파인 흙 구덩이에 발이 빠져 넘어졌다. 에블린은 누운 그녀 위로 포개 넘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실실 웃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가슴을 넘어 명치 언저리에 위치했는데, 찰랑거리는 머리 결이 가끔 부스스해 보일 때면 그녀의 머리칼을 정성스레 빗어주는 상상을 하곤 했다.

'저 아이에게 눈길이 닿는 이유는 뭘까. 아아- 드디어 사랑을 하려나 보다-.'

에블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문 틈새로 들어올 그녀의 향기를 기다리며 곱상한 얼굴과는 대비되는 울국진 손으로 커피잔을 매만졌다.


그렇게 3초 정도가 지났을 때 자신이 들고 있던 커피를 창문 아래 화단으로 던졌다. 커피잔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화단 속 빨간색을 머금고 있던 제라늄이 뜨거운 커피에 젖어 붉게 물들었다. 사방으로 도망간 유리 파편은 금방 온기를 품었는데도 싸늘한 흙에 묻혀 식어졌다.   

"쯧"

고작 커피 따위의 싸구려 냄새가 그녀의 향을 가렸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에블린은 쌍꺼풀 없는 눈을 위로 치켰다. 눈을 위로 치키고 1초 후 다시 아래로 내리는 것은 에블린의 특유한 습관이었는데, 주로 짜증이 나거나 계획이 틀어지면 나타내 보이는 행동이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교무실 문을 두드렸다.

"에블린 선생님, 저를 부르셨다고요?"

목젖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단발 소녀가 들어섰다.

"응, 아래 화단에 누가 커피를 쏟았더구나. 가서 치워줄 수 있겠니?"

에블린은 창가 아래로 붉게 물들여진 제라늄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 그럼요."

단발머리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혹시 미아, 아니 에마가 누군지 아니?"

에블린은 에마를 미아라고 부르곤 했는데, 물론 에마는 이 사실을 모른다.


에블린은 손가락으로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단발머리 소녀는 창문 밖을 들여다 보고는 다시 에블린을 바라보았다.

"네, 누군지 알아요. 작년에 같은 반이었거든요."

"그래, 그럼 밖에 나가는 김에 에마에게 교무실로 오라고 전해 주렴."

"네, 선생님."

단발머리 소녀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에블린은 고개를 틀지도 않은 채 무신경한 답변을 하고 창문 밖으로 상영되는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 속 마는 흙이 묻은 바지를 무릎까지 걷고서 피가 나는 오른쪽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다.

'피까지 선홍 색이네'

에블린은 아무도 없을 자리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빨리 오라고 전해주렴."




'똑똑'

나이 든 낡은 문이 두 번 두들겨지고 옆으로 밀려졌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부르셨다고요?"

미처 치료하지 못한 에마의 오른쪽 다리에는 여전히 반쯤 접힌 바지 아래로 피가 얕게 맺혀 있었다. 에마의 피 냄새는 과연 어떤 향일까, 달콤한 복숭아 향이려나-, 에블린은 피우려 했던 자신의 미소를 억누르며 에마에게 말했다.

"그래, 다름 아니고-"

에블린은 생각하는 척 눈알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굴리고 마음속으로 2초를 셌다.

"이런, 다리를 다쳤구나. 우선 약부터 발라야겠다. 의자에 앉으렴."

에블린은 의자에서 일어나 에마가 오기 5분 전에 준비한 구급상자를 찾는 척 연기했다. 세 번째 서랍 안쪽에 있는 걸 알면서도 일부로 첫 번째 서랍부터 열었다.  


"괜찮아요, 선생님. 점심시간 끝나고 보건실에 가면 돼요."

에마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흉 질 것 같구나. 연고를 바로 바르면 괜찮을 거야. 그러니 앉아 보렴."

에블린은 상처를 쳐다보며 표정을 일구고 에마가 앉기 편한 방향으로 의자를 틀었다.

"하하, 정말 괜찮아요. 저는 왜 찾으신 거예요?"

에마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다리를 쳐다볼 때, 에블린의 눈알은 위로 한번 치켜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 너 이번 10월에 공모전 참여했던 거 기억하니?"

에마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그랬었죠."


에블린은 빈 의자에 다시 앉고 등받이에 무게를 실었다. 두 달 전부터 말라버린 윤활제 탓에 의자에선 플라스틱과 스프링 사이의 기분 나쁜 마찰음이 났다.

"수상 받진 못했지만 글을 잘 썼더구나. 이대로 버리기엔 아까운 글이야. 그래서 말인데, 조금 더 다듬어서 다른 공모전에 내보는 건 어떠니?"

"좋죠. 그런데 그 글이 저의 최선이었어요. 뭘 더 수정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에블린은 책상 위로 두 손을 포개 깍지를 끼고 턱을 실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렴. 너만 괜찮다면 내가 도와줄까 하거든. 매주 화요일 방과 후에 어떠니?"

"저야 너무 감사드리죠! 감사합니다, 선생님."

에마는 다른 치아보다 1.2배 정도 더 큰 앞니를 드러내 보이며 박수를 두어 번 쳤다.


그때, 열어 두었던 창문 틈새로 바다 결에 몸을 맡긴 바람 한 점이 들어왔다. 수면 위로 떠오른 하나의 리본은 바람이라는 돛단배를 타고 어떠한 향을 머금은 채 에블린의 코 속으로 항해했다. 결국 난파된 작은 배는 에블린의 신경 깊은 곳 모든 세포에 스며들었다.

'어?'

에블린은 향을 가만히 맛보다 심장의 오른쪽에 작은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작게 떨리던 심장은 알 수 없는 묵직한 무언가에 깔려 이유 모를 떨림과 압력의 순환으로 점차 빨리 뛰기 시작했다. 에블린의 깍지 낀 두 손이 서로의 손에 깊은 홈을 파내고 있을 동안 에마는 푹 꺼져버린 에블린의 정수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에블린이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통증에 적응한 자신의 신체가 큰 공기를 들이마셨을 때 미처 따라오지 못했던 아기 돛단배가 찾아와 난파되었기 때문이었다. 에블린은 한 번에 향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에게 실망했다.

'스위라다.'

그렇다. 분명 스위라의 향이었다. 그녀만이 내뿜을 수 있는 고고하고 아름다운 향이었다. 마침내 나의 것이 되어버린, 마침내 나만의 사람이 되어버린 그녀의 향이었다.

"스-위-라"

에블린은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감상한다는 것이 그만 입 밖으로 뱉어 버렸다.

"네?"

에마는 순진한 얼굴로 에블린의 검은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암흑이었던 에블린의 동공이 진회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곳곳에 흠집 난 짙은 회색 절벽 같았다.  에마는 에블린에게서 음침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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