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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Aug 03. 2024

하루라도 빨리 죽여야겠어

[26분 13초] 10화

[2008년]


그녀가 녹슨 열쇠를 녹슨 구멍에 밀어 넣었다. 에블린이 그녀의 집에 발을 들이밀었다.

"많이 더우시죠? 잠시만요."

그녀는 에블린에게 앉을 만한 자리를 손짓으로 가리키고는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얼음 가득한 시원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

"어서 드세요."

유리잔 위로 시린 감각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토사물이 된 물방울들이 처량하게 흐르고 있었다. 입안 가득 차가운 액체를 들이 마신 에블린은 테이블 위로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에블린은 얼음뿐인 투명한 유리잔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이내 눈동자는 그녀에게, 고개는 천장에 두고 말했다.

"고맙구나. 이제야 살 것 같아."

그녀는 여전히 서 있는 상태로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근처에 병원이 있는데 동행해 드릴까요?"

에블린은 그녀로 향하던 눈길을 거두고 고개 저었다. '마음까지 고운 스위라- 내 것이 되어도 손색없겠다.'  

"고맙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나는 이제 갈 테니 편히 쉬렴."

에블린은 꾸벅 인사하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등을 돌려 문을 열었다.


에블린은 자신의 몸뚱이가 그녀의 집을 나서 학교로 향할 때 모퉁이에 핀 붉은 제라늄 한송이, 골목을 가득 매운 밥집 연기 뭉게, 주인 없는 간판 위로 그려진 낙서 세 개, 시멘트 도로 위발자국 2개를 뇌 주름 사이로 꼬깃하게 저장했다. 언젠가 다시 올 자신을 위해, 자칫 길을 헤매 시간을 낭비할 자신을 위해 그녀에게로 가는 항로를 끊임없이 새겼다.

"너무나도 치명적인 아이야. 하루라도 빨리 죽여야겠어. 미아의 향은 나만의 것이 되어야 해."

에블린은 스위라를 '미아'라고 부르곤 했는데, 물론 그녀는 이 사실을 모른다. 탈리아어인 'Mia' 'Mine'이란 뜻으로 '내 것'이라는 의미를 가다.


에블린은 자신의 발에 밟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 번씩 틀어진 튤립을 보았다. 노란색이었던 튤립 이파리는 그의 무게로 인해 부분적으로 주황색을 띠며 죽어 있었다.

튤립의 주황색 피를 보고 있자니 그녀의 피는 과연 무슨 색일까, 하고 눈을 감았다. 동시에 허리는 곧게 피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가슴이 배보다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죽은 튤립 밭 위로 그녀의 피가 사뿐히 내려앉는 상상을 하며 숨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숨 한 줌이 기도 언저리에 앉아 가기를 버티고 있을 때 에블린은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남은 마지막 공기를 내뱉었다. 모든 것이 정화된 듯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음, 평균이상으로 만족스럽군. 오랜만에 내 사랑을 찾았어."

에블린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들에게 등수를 매기곤 했는데 그녀는 4명 중 2등이었다. 눈을 감고 팔을 뒤로 당겼다. 양손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머리칼이 연약하게 스쳐 지나가는 상상을 하며 자신의 신체로 다가오는 저릿한 맛을 음미했다. 




"스위라, 방과 후에 뭐 하니?"

에블린은 왼쪽 다리를 남은 다리 위로 포개고 검은색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월, 화, 수에는 학원을 가고 목요일부터는 집에서 공부해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다름이 아니고, 스위라 국어 성적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서 말이야. 괜찮으면 방과 후에 보충수업을 해줄까 하거든."

에블린은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보충수업이요?"   

"국어를 어려워하는 학생이 여럿 있더구나. 한 대여섯 명 정도가 될 것 같아, 생각 있니?"


에블린은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치마는 핑크빛 무릎 관절을 완전히 덮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이 지체되자 에블린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내가 국어를 잘 가르치지 못한 모양이야. 생각보다 다들 어려워하네. 보충수업이라도 해서 성적이 올랐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에블린은 이마를 긁적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제 실력이 문제인걸요. 선생님 수업은 늘 최고예요!"

이어질 그녀의 말을 기다리며 에블린은 가만히 있었다.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에블린은 그녀의 대답을 듣자 곧바로 노트를 피고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볼펜 심지를 종이에 꾹 누르자 뭉쳐 있던 검은색 잉크가 하얀 종이 위로 퍼져갔다. 종이에 스며들지 못한 잉크 덩어리는 마치 출혈된 지 오래되어 검게 변색된 피 덩어리 같았다. 에블린은 생각하는 척 시간을 끌다가 큰 글씨'목요일 금요일'이라고 적었다. 굳이 종이에 쓴 이유는 그녀와 자신이 신체적으로 가까워지기 위함이었다.

에블린의 뜻대로 그녀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머릿결에서 살랑이는 석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감미로운 것도 모자라 흩날리는 석류 털은 코털에 얹어 재채기를 나오게 할 것 같았다.


에블린은 종이에 두 번씩 동그라미 쳤다.

"음- 목요일 아니면 금요일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떤 날이 괜찮니? 다른 친구들은 상관없다더구나."

"목요일 괜찮을까요?"

그녀가 대답했을 때 그녀의 치아 사이로 그녀만의 침 냄새가 났다. 제사상에 올려지는 향처럼 조금은 연약하게, 흰 수염 고래의 숨줄기처럼 조금은 거칠게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에블린은 그런 그녀의 향을 자신에게 묻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아직, 아직은 이르다. 딱 두 달만 기다리자, 고 그는 생각하며 그녀 몰래 혀를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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