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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Aug 10. 2024

아무도 없는 집에 단 둘이 있다

[26분 13초] 12화

[2008년]


"게일, 저번에 넘어진 건 좀 어떠니?"

에블린은 복도에서 우연히 만난 게일에게 물었다. 게일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넘어져서 아프긴 했지만 아끼던 펜을 찾았거든요. 제 이름이 각인된 볼펜이었는데 교무실 마루 바닥에 있더라고요. 혹시나 해서 가본 거였는데, 찾아서 다행이에요."

에블린은 너무나 쉽게 풀려버린 궁금증에 의문은 사라졌지만 시원한 해소감 느끼 못했다. 미심쩍어했는지 꿰뚫어진, 거기에 맞는 정확한 답변을 들은 기분이었다.

'뭐지? 마치 예상했던 것처럼'

에블린은 게일의 완벽한 대답에 의구심이 들었지만 딱히 뭐라 할 말이 없기에 그저 옹졸한 입술을 움찔거렸다.





"선생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그녀가 에블린에게 물었다. 적당히 노을 진 하늘,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골목 곳곳에서 풍겨 나는 나른한 밥 냄새, 함께 걷고 있는 그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게일과의 일을 회상하느라 이 완벽한 순간이 시나마 트러졌다. 에블린은 눈을 한번 추켜올리고 다시 내렸다.

 

"요즘 걱정되는 학생이 있어서 말이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에블린은 말하면서 발 앞의 작은 돌멩이를 발로 찼다.

그녀는 에블린에게 차여 2미터가량 비행하다 잡초들 사이로 추락한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저도 언젠가는 선생님 같이 학생을 위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그녀는 내뱉은 말이 부끄러웠는지 여린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숨겼다. 손끝이 복숭아 물에 담그기라도 한 것처럼 핑크빛이었다. 에블린은 그녀를 와락 안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참았다. 여전히 길에선 포근한 냄새가 났다. 비록 그 천한 냄새가 그녀의 향을 가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갑작스레 날아든 날파리에 그녀는 얼굴에 대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참, 저번에 이 근처는 왜 오셨던 거였어요?"

그들은 처음 만났던 장소를 걷고 있었다.

언젠가 나올 법한 예상된 질문. 에블린은 생각해 둔 답변을 읊었다.

"선생님이 좋아하는 산책로란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아서 편했거든, 물론 스위라와 마주치긴 했지만 말이야."

에블린과 그녀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지금 머리맡에 떨어진 먼지 한 톨 조차도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소품 같았다. 모든 게 완벽했고 평화로웠다.




어느 달의 둘째 주 목요일 오후 6시 반, 그녀의 뒤로 에블린이 따라 들어갔다.

"들어오세요, 청소는 안되어 있지만..."

그녀의 집은 석류 향으로 가득 매워져 있었다. 이대로 질식해 죽어버리고 싶다고 에블린은 생각했다. 동시에 그녀의 어미 향은 이보다 더 강렬할까, 하고 눈을 살포시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내 내쉬는 숨에 목소리를 실어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부모님 언제 오시니?"

그녀는 시곗바늘을 바라보았다.

"2시간 후쯤에 오실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진도 나가볼까?"




어느 달의 셋째 주 목요일 오후 7시, 에블린과 그녀는 아무도 없는 집에 단 둘이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고생했다."

"감사드렸습니다."

에블린은 마루 바닥에 앉아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오늘 부모님은 언제 오시니?"

"오늘은 부모님 모두 안 들어오세요. 두 분 다 출장 가셨거든요."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계획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온 기회에 에블린은 기쁨의 눈물이 눈동자에 아른거리는 걸 느꼈다. 아아-오늘이구나, 마음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마침내 나의 것이 되어 죽은 그녀를 그녀의 부모가 봤을 때 나는 어떤 기분일까, 자신의 귀한 자식이 목매달아 혀가 배꼽까지 내려오는 그런 모습을 그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상상만 해도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에블린의 몸 약간의 경련끼가 돌았다.

에블린은 자신의 노란색 넥타이를 당기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구나. 아참, 아이스크림 좋아하니?"

"그럼요, 엄청 좋아해요."

에블린은 넥타이를 완전히 풀고 오른쪽 나무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근처에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더구나. 날도 더운데 선생님이 사주마. 사 올 테니 기다리렴."


에블린은 여자를 죽이기 1시간 전에 아이스크림을 먹이곤 했는데, 그 이유는 목매달 때 역류하는 토사물이 아이스크림일 경우 달콤한 향기를 내뿜었기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자신의 것이 된 첫 번째 여자는 죽기 30분 전 양식을 먹어 붇은 면발과 각종 소스들이 흘러나왔. 자신의 것이 된 두 번째 여자는 죽기 30분 전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입에서 좋은 향이 났으나 30분이라는 짧은 시간 탓에 미처 소화되지 못한 진득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자신의 것이 된 세 번째 여자는 죽기 1시간 전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기분 나쁜 액체가 역류하지 않았을뿐더러 장기에서부터 은은한 달콤한 향이 올라왔다. 에블린은 그렇게 3명의 여자들을 통해 죽이기 1시간 전 아이스크림을 먹여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을 만들었다. 어떤 아이스크림을 먹일지는 그날 느끼는 감정에 따라 선택했다.


에블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고 생각했다.

'체리? 아니야, 스위라를 그런 시답잖은 향으로 덮을 수 없어. 키위? 아니야, 어울리지 않아. 라임? 아니야, 시원한 이미지는 아닌데. 그래- 석류가 좋겠다.'

에블린은 현관문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에블린은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흠칫 놀라더니 다급히 스위라를 쳐다봤다. 동시에 문고리를 잡고 있던 에블린의 손 허공으로 추락했다.

'부모인가?'

생각지 못한 변수였지만, 그녀의 부모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어미가 궁금하기도 했던 참이었다. 그러나 계획에 차질이 생겨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이번엔 눈을 추켜올리는 대신 입고리를 일직선으로 그었다.


어린 나무 테이블에 기대고 있던 스위라는 볼이 약간 상기되고는 에블린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아- 게일인가 봐요!"

그러고는 에블린을 지나쳐 현관문 문고리를 잡았다.

에블린을 뒤로한 채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남색 교복 치마가 나풀거렸다.

"제 남자친구예요! 오늘 집에서 놀기로 했거든요. 아, 이건 선생님만 알고 계셔야 해요. 공부 안 하고 연애나 한다고 혼날게 하잖아요."

그녀는 문고리를 돌렸다. 에블린은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늠해 봤다. 웃는 표정일까, 우울한 표정일까, 화난 표정일까. 광대에 붙어있는 살가죽이 요란스럽게 떨리고 있는 걸 보면 입고리는 치켜져 있음을, 미간이 좁혀져 뻑뻑함이 느껴지는 걸 보면 눈썹은 가운데로 모아져 있음을, 눈알이 시리고 따끔한 걸 보면 눈은 크게 떠졌거나 실핏줄이 터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열린 현관문 너머로 에블린의 눈에 게일이 들어왔다. 아파트 복도에 설치된 하얀 조명을 뒤로 선 게일은 빛을 가려 한층 어둡게 보여졌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여기서 뵙네요."

게일이 보내는 승리의 눈빛. 적어도 에블린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여기서 뵙네요-' 에블린은 게일의 사악한 입가에서 피어 나온 연기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만행을 자신이 알아버렸다는 의미인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왜 당신이 있냐는 의미인가.

"어-그래, 말 들었다. 제법 잘 어울리는구나. 그런데 집에서 데이트하는 건 조금 그렇지 않니? 누가 볼 수도 있고 말이야."

"괜찮아요. 선생님도 여기서 몰래 수업하실 정도면 안전한 장소라는 거 아닌가요?"


에블린의 눈이 치켜 올라가려 할 찰나 게일 말을 덧붙였다.

"스위라가 한 번도 사람을 마주친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좀 봐주세요. 같이 공부하려고 온 거예요."

잠깐의 정적 후에 에블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알겠다. 너무 늦게까지 있다 가진 말고, 나는 이만 가마."

"선생님, 앞까지 배웅해 드릴게요."

에블린과 그녀가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갈 때 에블린은 등 뒤게일의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옷을 너머 등가죽의 털 하나하나가 강한 햇빛에 타들어 가는 듯했다.


"선생님, 이제 충수 안 받아도 될 것 같아요! 게일이 공부 알려주기로 했거든요. 그동안 선생님께 너무 민폐 끼친 것 같아 걱정했는데 게일이 도와주겠다고 해서요."

그녀는 가볍게 웃음 짓고는 쇼핑백을 건넸다.

"별거 아니지만, 바쁘셨을 텐데 그동안 정말 감사드렸어요."

쇼핑백 안에는 그녀의 향이 밴 자두 15개가 들어있었다. 크기는 제각각 조금씩 달랐지만 그만큼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고 있었다. 하나하나 고운 손으로 씻기기라도 한 것일까, 자두 위로 작은 물방울들이 앉아 있었다.

"이런 건 주지 않아도 되는데, 고맙게 받으마."

에블린은 오른손으로 쇼핑백을 들고 비어 있는 손으로 계단 옆 철봉을 잡았다. 그들의 발이 계단 표면에 떼어지고 닿기를 반복하는 동안 계단에서는 나이 든 철 마찰음이 났다.   

"성적이 떨어지면 언제든 말하렴. 게일보다는 내가 더 공부를 잘하잖니. 참, 아이스크림을 깜빡했구나. 그건 다음에 사주마."

에블린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어댔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연신 허리 숙여 인사했다.

"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에블린은 촐랑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보며 생각했다.

'당장 오늘 너를 죽이려 한 나에게 조심히 가라-라, 이거 참 모순이군. 내가 조심하지 않아야 네가 살 텐데. 뭐 언젠가 자신을 죽여달라는 건가. 하, 그런데 게일, 그 자식은 뭐 하는 놈이지? 확 죽여버려?'

에블린은 머릿속의 울림과는 반대되는 표정을 짓고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그녀는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타고 올라갔다. 그녀의 뒷목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에블린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오른손을 긁었다.


그녀는 아래가 아닌 위를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다. 에블린의 왼손에서는 약간의 비릿한 녹슨 철 냄새가 났다. 그리고 비어있는 손으로 비릿한 철 냄새가 나는 붉은 액체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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