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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Aug 11. 2024

살인자의 철칙

[26분 13초] 13화

[애인 있는 여자는 사랑하지 않는다]

다른 이에게 욕정을 품고 있는 자는 스스로 거룩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성전에 들어올, 오직 순결한 여자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나의 사랑이 될 여자는 손대지 않는다]

허용범위는 이마에 키스하는 정도다. 그 이상의 스킨십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첫 번째 철칙과 비슷하게, 이건 매우 신성하고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것이 될 영혼을 더럽힐 수 없다.


[남자는 죽이지 않는다]

에블린에게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는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사랑해서, 원해서, 하나가 되고 싶어서 그녀의 영혼을 자신이 거둔다-. 에블린에게 살인은 아름답고 경이로운 행위이기에, 사랑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를 죽이지 않았다. 물론 에블린이 양성애자였다면 가능했을 일이다.




[2008년]


스위라를 알게 된 후로 지금까지 모든 시간을 그녀에게 투자했다. 에블린은 스위라를 사랑했다. 손에 넣고 싶었고 마침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세 가지밖에 안 되는 철칙에 무려 두 가지가 걸려들었다. 그녀에게 애인이 생겼고, 에블린은 남자인 게일을 죽이고 싶었다. 그렇다. 에블린은 태어나 처음으로 남자를 죽이고 싶었다.


에블린은 작은 방구석에 쭈그려 앉아 구레나룻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다. 정갈하게 빗겨 있던 머리는 방향 모를 경로로 이리저리 뻗쳐있다. 아무렇게나 뻗은 발에 견고했던 거미줄 더미가 엉겨 죽어있다.


"게일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왜 죽이고 싶은 거지?- 그냥 화가 나서?- 그런데 그 자식을 죽이면 전에 내가 죽인 여자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 여자들도 내가 홧김에 죽인 게 되는 건가?- 아니야 난 여자들을 사랑해서 죽인 거야- 아- 너무 어지러워- 내가 게일을 사랑해서 죽이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니야. 그냥 죽이고 싶어- 이것이 화라는 감정인가? 아아 나의 신성한 의식에 화라는 괴상한 욕망이 끼어들고 있어- 난 오직 사랑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어- 내 다른 욕망을 위해 게일을 죽인다면 그동안의 나의 거룩한 행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반복되는 에블린의 목소리는 구원을 갈망하는 신자의 방언 같았다. 

날파리 떼처럼 이리저리 엉겨 붙는 생각들은 그의 눈을 따끔히 게 만들었다.


"왜 화가 나는 거지? 방해받은 적이 처음이라서? 그동안 계획이 틀어진 적도 많았잖아. 그때는 그냥 포기했는데, 이번엔 왜 포기가 안 되는 거지?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이야. 머리가 어지러워…"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애석함을 느낀 에블린은 몸을 심하게 떨어댔다. 그를 기점으로 공기의 파동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듣기 거북한 합주였다.

이내 에블린은 머리를 쥐어뜯던 양손을 다리 위로 내렸다. 모든 소음이 사라진 상태. 떠돌던 먼지조차, 추락하던 먼지조차, 꺼져버린 먼지조차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에블린은 한참 구부려졌을 허리를 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게일, 네가 사람을 죽여봤니?"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게일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뭘. 그런데 스위라, 한 가지만 약속해 줄 수 있어?"

그녀는 여전히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지, 뭔데?"

"에블린 선생님을 다시는 집에 들이지 않았으면 해. 아무래도 남자니까 조금 신경 쓰이네. 그래 줄 수 있지?"

그녀의 시선이 게일의 왼쪽으로 이동했다.

"응, 그럼."


그녀의 눈 아래 살 가죽이 다홍빛으로 붉어졌다. 게일은 그녀의 볼 표면 모세혈관으로 피가 쏠렸음을 알 수 있었다. 게일은 순간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어 불순한 감정을 떨쳐냈다. 지금은 구원받는 과정이다, 하고 몇 번을 되뇌었다.

"아, 너 이안이라고 알아?"

게일은 가방을 방구석에 내려놓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누구지-."

한참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리반 애구나. 존재감 없어서 몰랐어. 그건 왜?"

그녀의 눈빛 속 이안은 그저 꺼진 촛불의 연기보다도 희미했다.

'불쌍하네. 너에게 스위라는 신일 텐데. 신은 너에게 관심이 없구나.'

게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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