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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이별

봄날의 초대

by fiore 피오레 Mar 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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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가 소개하려던 사람이 민준일 거라는 걸, 수현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리가 없었다. 현수는 수현이 결혼 이야기에 선을 긋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면으로 이야기하기보다, 다른 길을 택했다.

그날은 따스한 봄날이었다. 주말 오후, 현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현아, 이번 주말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모네의 정원’ 전시가 오픈하는데, 오랜만에 우리랑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

현수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수현을 친딸처럼 아꼈고, 수현 역시 현수 부부를 가족처럼 따랐다. 특히 이모 같은 현수와 함께 미술관에 가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주말이 되자, 수현은 설레는 마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전시장. ‘모네의 정원’은 워낙 유명한 전시라 관심도 뜨거웠다.

표를 확인하던 순간, 수현은 문득 무언가에 부딪혔다.

"어머, 죄송합니다."

당황한 그녀가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미안하네요."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정한 눈빛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민준이 왔구나. 수현아, 이쪽은 강민준 씨야."

현수가 다가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민준 씨, 여기는 내 조카 같은 수현이."

"안녕하세요, 수현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민준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저도 반가워요, 민준 씨."

수현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조금 놀랐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렇게 한 남자를 소개받게 될 줄이야.

사실, 그것이 현수의 의도였다. 미리 부담을 주는 대신, 자연스럽게 만나게 하고 싶었다. 수현이 먼저 민준이라는 사람을 스스로 알아갈 수 있도록.

민준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수현 씨, 저랑 같이 그림 보실래요?"

"네? 아, 좋아요."

"저희 할머니가 유명한 서양화가셨거든요. 어릴 때부터 할머니 따라 전시를 많이 다녀서 그림 보는 눈은 좀 있습니다."

"와, 정말요? 그럼 제가 가이드 부탁드려도 될까요?"

"당연하죠."

수현은 어쩐지 이 전시가 조금 더 특별해질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모네의 정원’ 전시회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감상에 잠긴 채 그림 앞에 머물렀다. 벽을 가득 채운 빛과 색의 향연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민준은 수현을 이끌며 한 그림 앞에 멈춰 섰다.

“수현 씨, 이 그림 좀 보세요. ‘수련 연못’이에요. 모네가 자신의 정원에서 직접 그린 작품이죠. 이 그림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어요.”

수현은 그의 말을 들으며 화면을 천천히 살폈다. 그림 속 연못은 깊고 고요했다. 수련은 마치 빛을 머금은 듯 수면 위에 떠 있었고, 물결은 그 자체로 부드러운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인가요?”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있는 자신의 정원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단순히 풍경을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그가 느낀 빛과 색채의 변화를 포착하려 했죠. 여기 보시면 수련이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이 보이시죠? 그는 이 수련을 통해 빛이 변화하는 순간을 담고 싶어 했어요.”

민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그 자신이 빛의 변화를 바라보듯, 그림을 해석하고 있었다.

수현은 다시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같은 색이어도 빛의 농도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게 보였다.

“정말 아름다워요. 실제 연못을 보는 것 같아요.”

그녀의 감탄에 민준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모네는 빛을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겼어요. 그래서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대에 수없이 관찰하고 기록했죠. 이 ‘수련 연못’도 그런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에요. 아침과 낮, 해 질 녘의 빛이 어떻게 다른지를 그는 그림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들은 그림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수현은 마치 빛의 흐름을 따라가듯 그림을 세밀하게 바라보았다.

다음으로 이동한 작품은 ‘일몰의 정원’이었다. 이번 그림은 아까의 고요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하늘은 붉게 타올랐고, 연못 위에는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이 그림은 일몰 무렵의 정원을 담은 거예요.”

민준이 천천히 설명했다.

“보세요.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있죠? 모네는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색을 아주 섬세하게 사용했어요. 붉게 물든 하늘과 점점 어두워지는 물빛이 대조를 이루면서도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마치 저녁이 오기 직전, 하루의 마지막 빛이 정원을 감싸는 순간 같죠.”

수현은 그림 속의 색채와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정말 신기해요. 빛과 색이 만들어내는 감정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그게 바로 모네가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순간은 항상 변하지만, 그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 예술이니까요.”

민준의 말에 수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빛이 머물던 자리,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려 했던 한 화가의 시선. 그녀는 모네의 세계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모네의 이런 섬세한 표현은 보는 사람들에게 정말 놀라움을 선사하는 것 같아요.”

수현이 감탄하듯 말하자, 민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네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그린 게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을 담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 순간에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들죠.”

수현은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말 그런 느낌이에요. 민준 씨가 설명을 잘해 주셔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순간, 민준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수현의 몸이 살짝 굳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깜짝 놀란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손을 잡힌 채로 어색하게 굳어버린 자신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민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다음 작품을 보러 갈까요?”

수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게… 무슨 의미지? 그냥 자연스럽게 잡은 건가? 아님…?'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손을 빼야 할까? 하지만 민준의 손길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고 편안했다.

그녀는 살짝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애쓰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아, 네… 가요.”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그녀의 심장은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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