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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 Apr 26. 2024

30년 전 신도시 임대아파트에서 초등학생으로 살아남기

1995년 신도시 영구임대아파트 이야기

아버지는 80년대 중반 개포동 아파트를 할머니 명의로 매입했다. 그건 '다음 투자'를 염두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집은 할머니 명의로 남았다. 엄마는 할머니 집의 대출금을 갚고 있던 셈이었다. 30대 중반 주부였던 엄마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공식적으로 무주택자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년이 흐르고, 우리는 모자가정 자격으로 신도시 임대아파트단지에 입주했다. 새집, 엘리베이터, 10집이나 쓰는 넓은 복도, 그리고 8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참 좋았다.


사진=군포시청


아파트단지 전체가 임대세대인 이곳 사람들은 두말할 것 없이 가난했다. 가난은 화를 부르는 법이다.


아저씨들이, 아저씨와 아줌마가 싸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1층에는 항상 두 다리가 없는 아저씨가 지나가는 애들에게 소주 한병 사 오라고 시켰다. 지하 마트가 아니라 1층 슈퍼에서 사다 주면 욕을 했다. 100원 비싸다고.


술 취해 벤치에 누워 있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복도는 온갖 잡다한 물건과 괴상한 냄새가 나는 항아리들로 가득 찼다. 밤에 불을 끄면 바퀴벌레 기어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 녀석들은 동생을 때리고 신발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나는 야구방망이를 들고 가 복수했다.


1층 로비에는 무섭게 생겼지만 착한 형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번갈아가며 기다리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대신 눌러줬다. 그건 좋았네, 생각해보니.




임대아파트 아이들을 휴거(휴먼시아 거지)라고 한다고 들었다. 결국 터졌구나 싶었다. 30년 전에도 용어만 없었을 뿐, 우리동네 아이들을 거지처럼 보는 시선이 많았다. 특히 학교에서.


배정받은 초등학교는 기존 1군 브랜드 아파트, 고층 주공아파트 단지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임대아파트 단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니 학부모들이 아주 난리가 났다.



아이들은 단지별로 확연히 달랐다. 1군 건설사 아파트 아이들은 에어조단을 신었다. 옷태부터가 달랐다. 주공아파트 아이들은 스포츠 브랜드 운동화를 신었다. 깔끔했다.


우리동네 아이들은 딱 봐도 시장표 신발을 신었다. 옷을 해질 때까지 계속 입고, 안 씻고, 걸핏하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굳이 그 아이들의 부모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내게 "내일 학교 올 때 걔도 데려와"라고만 했다.


반년 정도가 흘렀다. 뜻하지 않게 반장이 되어버렸다. 선생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이어 부반장을 뽑는데 개표하는 목소리가 작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선생님은 "그칠 때까지 교실 뒤에 나가있어"라고 떠밀었다.  


얼마 뒤 1군 건설사 아파트에 사는 친구 생일잔치에 갔다. 친구 엄마가 '너는 몇 동에 사냐'고 묻기에 임대아파트 산다고 했더니 선생님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지나 '니들 나가서 방방 타고 와'라며 돈을 쥐어주던 아줌마는 나만 불러 말했다.  


"너무 늦었으니 엄마 걱정하겠다. 집에 가라." 그때가 오후 4시였다.




학교 운동부를 맡게 된 선생님은 웬일인지 나를 추천했다. 너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집에 가도 할 일도 없고, 운동 끝나면 빵이랑 콜라도 준다고 했다. 시청에 보여주기용이라던 운동부는 갑자기 코치가 선임되면서 협회에 등록된 팀이 되어버렸다.  


훈련 중 실수를 하거나 슛이 안 들어가면 코치는 회색 PVC 파이프로 엉덩이를 때렸다. 수십대씩 맞고 학원에 가면 엉덩이가 따가워 제대로 앉아있기 힘들었다. 집에 돌아와 누워서 책을 보면 엄마가 혼내는데, 차마 엉덩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가끔 내 엉덩이를 볼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참다못해 선생님을 찾아가 운동부를 빼달라고 했다. 단칼에 거절당했다.



어린 마음에 어떻게 하면 빠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 전교회장 선거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선생님은 이미 내보낼 친구들이 있다고 했다.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둘 다 1군 건설사 아파트 아이들이었다. 여자 친구가 끝까지 안 나간다고 한 덕분에 출마해 우리반에서 회장, 부회장이 모두 나왔다. 다음날 회장 친구와 나를 번갈아보던 선생님의 표정이 생생하다.


교장선생님은 토요일 방송조회 직전 회장 친구와 내게 "부모님이 학교 급식실 공사에 기부금을 얼마나 내셨냐"고 물었다. 회장은 대답을 했고, 나는 "엄마가 아는데요"라고 답했다. 그는 이후 졸업할 때까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전교 부회장 정도 되면 졸업식 단상에 한번쯤 세워줄 만도 한데 이조차 냉담했다. 성적순으로 상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선생님은 엄마에게 '딱 한 등수가 모자라 안타깝다'고 했다. 나를 제외한 교내 임원과 각 반의 반장들은 모두 단상에서 상을 받았다.


선생님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이니까. 오랜 뒤 어른이 된 친구들과 만나 그들의 어머니와 선생님 간 오갔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중학교는 더했다. '아빠도 없으면서'라는 말에 격분해 친구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갈수록 말은 줄었고, 점심시간에 외톨이가 됐다. 학교 말고 학원 친구들과 함께할 때가 좋았다.




나도 아파트단지 간의 차이를 받아들였다면 조금 나았을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뒤에서 조용히. 그것이 좋은 아파트 친구 엄마들이 임대아파트 친구들에게 바라는 유일한 것이었다.


당시 신도시의 아파트 브랜드는 곧 계급과도 같았다. 옷도 음식도 학원도 입시정보도 선생님도. 삼성, 한양, 롯데, 극동, 대림, 주공 한가운데 끼어 '주공이지만 주공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우리 아파트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주길동이 될 수는 없었다.


사진=군포시청


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 공부도 잘해보고, 임원도 해보고, 운동부도 열심히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 본 결과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제적 격차가 계급이 된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탓에 나는 원치 않게 훌쩍 커버렸다.


그렇게 14년 같은 4년이 흘렀다. Y2K다 밀레니엄이다 떠들기 시작하는 1999년 여름, 우리는 수원의 33평 아파트를 분양받아 공식적인 첫 우리집으로 이사했다. 그 사이 집값이 많이 오르면서 전세금도 상승해 개포주공 1단지의 대출도 모두 갚았다.


그제야 알게 됐다. 개포동 우리집이 그들의 집보다 두 배는 비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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