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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 Apr 29. 2024

그해 수원은 역사상 가장 다이내믹했다

2000년대 첫 우리집 이야기

10여 년 전, 서초구 아파트에서 자란 삼촌 아들은 수원 우리집에 오는 길에 이런 말을 했다.  

   

"어휴 이런데서 어떻게 살아."


동생은 화를 꾹 참고 "다 살아"라고 했다. 나는 웃었다. 신도시에서 수원으로 이사오던 길에서 했던 생각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안양과 수원의 경계인 지지대고개를 넘어 저 멀리서 새로운 우리집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낙후된 동네들을 지나 우뚝 솟아있는 5282세대의 신축 대단지는 마치 개포동 구축 아파트들 사이에 솟아있는 타워팰리스처럼 보였다. '이곳에 산다면 앞으로 집 때문에 무시받는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기우였다. 전학 첫날, 친구들은 집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축구 좀 하냐?"가 전부였다. 첫날은 필드에서 뛰며 한 골을 넣고, 둘째 날에는 골키퍼를 해서 몇 골을 막았더니 적응이 끝났다. 방학 한번 지났을 뿐인데 나는 신도시로 이사하기 전 본래 모습을 찾았다. 


물론 이곳에도 다양한 아파트단지가 있고 집값도 저마다 달랐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학교 앞 문방구의 아이스크림은 100원. 500원만 있어도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을 수 있었다. 이 값은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수원은 신도시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였다. 그리고 다이내믹했다.


친구들은 남문(팔달문)부터 데려갔다. 영화관도 몇 개나 있고, 거대한 시장에 반대편엔 10대들이 몰려드는 로데오거리도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신난 친구들은 이번엔 인계동을 데려갔다. 갤러리아 백화점에 들어가 눈이 휘둥그레진 내 얼굴을 보며 친구들은 촌에서 왔냐고 놀려댔다.



고등학생 시절 [엽기적인 그녀]를 보려다 중앙극장 앞에 줄이 300m는 늘어선 것을 보고 포기한 채 카페에 들어갔다. 친구들은 파르페며 체리콕이며 듣도보도 못한 음료를 시켰다. 나는 제일 저렴한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싼거 시켰다고 이렇게 조금 주나' 싶은 까만 커피와 투명한 올리고당을 번갈아 보다 커피부터 들이켰다.

   

"아우 써"


"아우 달어. 이거 뭐여 이거"


친구들은 울면서 웃었다. 사장님 누나는 멀리서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훗날 극장에서 영화 [가문의 영광]을 보며 신현준이 똑같은 모습으로 웃길 때, 나만 웃지 못했다.




진짜 촌 아이들은 고등학교에서 만났다. 당시 수원은 비평준화, 소위 뺑뺑이라 불리는 추첨제로 학교를 편성했다. 1지망에서 밀리면 대부분 거리와 상관없이 선호도가 낮은 학교에 배정됐다. 나 역시 1지망에 떨어져 집 앞에 있는 신설학교에 배정받았다.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는 '영통'이라는 곳에 산다고 했다. 어딘가 물으니 버스 타고 한 시간은 넘게 가야 한단다. 궁금하다고 따라나섰는데 버스에서 한참을 자도 도착할 기미가 안보였다. 그렇게 영통 중심상가에 내리고는 이전에 살던 신도시와 똑같은 구조에 당황했다.


'이런게 또 있었나, 세상은 얼마나 넓은 건가' 한동안 생각했다. 엄마는 영통 집값이 오를 것 같다며 이사하는게 어떻겠냐고 했다. 엄마 직장과도 멀고, 학교 다닐 엄두도 안 나고.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거긴 수원 아냐. 서울보다 멀어."


입학하고 나서 계속 빡빡머리로 다녀 크리링이라는 별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는 동네 이름으로 참 많이 놀림받았다. 똥탄이 뭐냐고, 똥탄이. 아버지가 농사짓는다는 친구는 학교 앞 원룸을 빌려 사실상 유학을 온 셈이었다.


그 친구와 함께 유학온 친구는 '똥탄 친구 팔탄'이라고 불렀다. 도대체 어디 붙어 있는 곳인지 알 수 없기에 친구들의 집은 미지의 세계와도 같았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고서야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친구들의 집이 지금의 동탄신도시라니…



농사짓냐고 놀림받았던 친구는 또 있었다. 수원인데 수원이 아닌 곳, 호매실이라고 했다. 어디 있는지 모르니 농사짓느냐고… 친구는 "아니라고" 하며 잠깐 화를 냈지만, 그러거니 말거니 우리는 그 친구를 그냥 호매실이라고 불렀다. 지금 신분당선 연장이 예정된 곳이다.


지금 주말에 놀러간다 해도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화성 남양과 송산. 그곳에서 새벽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는 친구는 항상 피곤해했다. 지금은 공장들이 아주 많이 들어선 지역이다. 


고3 시절에는 원천저수지를 아파트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멀쩡한 단오극장을 밀고, 법원사거리부터 유원지 일대를 싹 밀어버린다고 했다. 아니 그 촌동네에 무슨 아파트를 짓는다고… 친구들은 웃었다.


엄마는 그곳 아파트를 프리미엄(P) 주고 이사할지 고민했다. 영통 분양 당시 입주해 시세차익을 본 엄마 친구는 원천유원지로 넘어간다고 했단다. 나는 "완전 시골이라 남문도, 수원역도 가기 얼마나 어려운데"라며 반대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곳은 신분당선이 들어선 광교신도시가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원은 정말 큰 도시다. 도시를 4등분해 동서남북 저마다 특징이 분명하고, 팔달문 중심이던 상권의 변화도 뚜렷하다. 광교·영통과 같은 신도시와 매교역 인근처럼 거대한 재개발단지, 세류역 앞 공군비행장 등 부동산을 공부하기에 최적이다.


대도시인 수원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나는 어른들의 세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역, 브랜드, 상권이 변해가는 것을 보며 '월급 밖의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똥탄과 유원지가 신도시가 되고, CGV로 인해 10대들의 성지였던 남문 상권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다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2000년대 초중반, 개포동 아파트는 조금씩 조금씩 재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뭔 발표가 난다만다 하면 한 번씩 부동산으로부터 수십 통의 전화가 득달같이 왔다.


'개도 포기한 동네, 지금이 가장 빠져나오기 좋은 타이밍'이라고. 엄마는 항상 이렇게 답했다.


"그 집,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근데 요즘 시세는 얼마예요?"


"오... 오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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