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포주공아파트 임차인 이야기
밀레니엄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개포동을 '개도 포기한 동네'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비슷한 시기 개포주공아파트를 매입한 동료들은 신도시 개발 소식을 듣자마자 분당, 과천 등으로 많이 넘어갔다고 들었다.
엄마에게도 여러 번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냥 갖고 있겠다고 했다. 부동산을 잘 모르는 것도 있고, 아버지 유언도 있고, 귀찮기도 하고…
고등학생 시절 외할아버지가 불쑥 엄마 직장에 찾아오셨다. 대뜸 도장 내놓으라며 지금이 명의이전을 할 마지막 타이밍이라고 하셨다. 엄마는 그대로 따랐다. 개포주공 1단지 49동 (아버지가 할머니 명의로 사놓은) 집은 그렇게 십수 년이 지나 제 주인을 찾았다.
집장사로 돈을 벌었던 할아버지의 예측은 정확했다. 명의를 이전하자마자 재건축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아파트 가격이 자고 일어나면 올랐다.
사람들은 금세 개포주공아파트가 갓 준공한 타워팰리스처럼 바뀔 거라고 설레발을 쳤다. 2003년에는 재건축 조합도 설립됐다.
그리고 계속 싸웠다. 자기들끼리 싸우다, 구청과 싸우다, 상가와 싸우는데 그렇게 싸워도 안 지쳤다.
아파트값은 등락이 있었지만, 매달 1천만 원씩 오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눈치 보며 조금이라도 저렴할 때 매입하려고 눈에 불을 켰다. 부동산으로부터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가 왔다.
"지금이 매도하기 가장 좋은 시기예요. 너무 급하게 올라서 언제 떨어질지 몰라요. 재건축 그게 쉽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언제 될지 누가 알아."
나는 엄마에게 연락하시라고 했고, 엄마는 "있으나 마나 한 거라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그렇게 대학시절이 지나고, 군대에 다녀오고, 서울에 직장을 잡고 자취를 시작하자 엄마는 처음으로 내게 개포동에 다녀오라고 했다. 세입자 새로 들어온다니까 계약하고 오라고.
종로구 명륜동에서 143번 버스를 타고 개포동으로 가는 길. 회사가 있는 종로를 거쳐 명동 남산터널을 뚫고, 한남대교를 건너, 고속터미널과 압구정을 돌고 삼성역까지.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서울 전역을 돌아다녀도 단 한번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강남, 그중에도 주택지구인 개포동과 도곡동은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가볼 일이 없는 동네다. TV에서만 보던 은마아파트를 보고 신기해하다 타워팰리스의 웅장함에 압도당했다. 그리고 양재천을 건너 개포동에 들어서자 눈이 똥그래졌다.
오른쪽은 거대한 타워팰리스, 왼쪽은 똑같이 생긴 5층짜리 주공아파트가 거대한 미로처럼 늘어선 광경에 두리번두리번 거리다 생각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네'
아파트 입구에 있는 상가 1층은 부동산으로 가득했다. 간판이 다 고만고만해 엄마가 말한 부동산을 찾기 힘들었다. 전화까지 해 겨우겨우 찾아 들어가니 엄마 나이대의 아주머니가 옷을 곱게 차려입고 앉아계셨다.
아주머니는 열심히 공부시키고 유학까지 보낸 아들이 강남에 있는 외국계 직장에 취업해 처음으로 자취하게 됐다고 자식자랑을 늘어놨다. 집 컨디션을 물어봐도 아들 자랑을 했다. 고양이가 있다고 하기에 엄마에게 전화해 물어보는데도 아들 자랑을 했다. 30분이 넘었다.
부동산 사장님도 지겨웠는지 내게 어디에 사냐고 묻기에 혜화역 근처에 산다고 답했다. 성북동이냐기에 옆동네라고 했더니 아주 좋은 동네라며 화제를 전환시키려 했다. 아주머니는 "어머어머 거기 살면서 개포동에 투자할 정도면 부자 아니에요?"라고 물었다.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뒤에 반지하에서 월세 사는데요."
바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임대인란에 내 이름과 주소를 적기 시작하자 부동산 사장님은 '아이 거긴 어머니 성함 적으셔야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집인데요."
사장님은 애써 어떻게든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실패했다. 계약은 조용하고 빠르게 잘 마무리됐다. 그리고 아마 엄마의 헬리콥터에서 막 낙하산을 폈을 임차인은 일년가량 지나 조용히 짐을 뺐다.
강남에서 월세가 제일 저렴한 대단지 아파트인 만큼 임차인은 바로 나타났다. 이번엔 다른 부동산이었다.
새 임차인은 자신을 예비신부라고 소개했다. 다음 달이 결혼식이라 일단 집을 구해 놓고 살림살이를 들여놓을 예정이란다. 미리 집 상태를 보고 온 터라 "신혼인데 이런 집을 임대해 드려서 죄송하다"며 여유롭게 계약을 마쳤다.
며칠이 지나 주말 부동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세입자가 지금 입주하려고 하는데 주말이라 은행 문제도 있고, 예비신랑과 돈을 합쳐서 보증금을 내야 하니 내일 드려도 되겠냐고 물었다.
아이 뭐 그정도야… 부동산에서도 괜찮다고 하니 그러라 하고 다음날이 지났다. 보증금이 안 들어왔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야 부동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니… 세입자분이 파혼을 했다는데요."
엄마는 버럭 했고, 나는 고대로 부동산에 패스했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던 세입자는 일주일 정도가 흘렀을까 조용히 집에서 나갔다. 명도소송에 강제집행까지 수많은 부동산 이야기를 읽고 편집해 본 지금 돌아보면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모든 재건축 아파트 소유자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던 강적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