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철거 전 세입자 이야기
아버지가 개포주공 1단지를 매입한지 30년을 넘어섰다. 그동안 수십 명의 임차인이 아파트를 거쳐갔다. 따뜻했던 이도, 황당했던 이도, 무난하게 잘 잊어버린 이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임차인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기고 떠났다.
관리처분인가 초읽기에 들어선 시점이었다. 철거가 코앞인 시기인 만큼 개포주공 1단지에는 서울에서 가장 외곽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세입자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는 홀로 살았다. 직업은 없었고, 가끔 딸이 살피러 온다고 했다. 한 번씩 뭐가 고장났다며 고쳐달라고 했지만 웬만하면 그냥 쓰시라고 했다. 그런 특약이 있었다.
특약은 또 있었다. '철거가 확정되면 보상금 없이 이주할 것.' 그래도 사람이 살만한 집은 이런 특약을 넣어 적게나마 월세를 받았다. 아니면 그냥 공실로 뒀다. 빈집이 늘어갈수록 아파트는 수풀로 우거져갔다.
2018년, 조합 설립부터 무려 15년을 기다려온 철거 일정이 나왔다. 엄마는 세입자 할아버지에게 이사 가능한 날짜를 잡고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알았다고 답했다.
두어 달이 지났다. 엄마는 이삿날은 잡으셨냐고 물었다. 그는 알았다고 답했다.
한 달이 지났다. 엄마는 이사하실 거냐고 따졌다. 그는 '딸이 와서 짐도 챙겨야 하고, 이 월세에 갈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 이미 몇 달치 월세를 내지 않은 터였다.
보름이 지났다. 그는 이제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는 내게 화를 냈다. 네가 해결하라고…
모르는 번호라 그랬는지 그는 대번에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약속대로 이사하려고 했다. 그런데 집을 구하러 간 부동산에서 몇몇 오래 거주한 세입자들이 집주인으로부터 이사비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네 사람 몇몇은 돈을 받을 때까지 버티겠다고 했다. 안 나가면 집주인만 손해 아니냐면서…
긴가민가한 사이 아파트에는 철거민들에게 돈을 받아주겠다는 단체가 들어왔다. 그들은 할아버지에게 2천만원을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을 믿었다. 자신도 월세를 안 내면서 버텨보기로 했다. 손해 볼 것 없으니까.
"어르신, 그 2천만원을 누가 준답니까."
"아니, 그 사람들이 나한테 그랬다니까. 2천만원은 받을 수 있다고."
"그 2천만원은 누가 줍니까?"
"아니, 그 사람들이 준다고 했다니까 그러네."
"집주인은 전데요. 그리고 어르신, 보증금이 5백만원인데 누가 이사비로 2천만원을 줍니까."
"버티면 받을 수 있다니까 나는 어쨌든 버텨보려고."
"어르신 잘 들으세요. 이 상황에서 시간과 힘은 소유자의 편입니다. 오늘 강제집행 신청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월세 안 내신 것과 함께 강제집행 비용도 보증금에서 차감합니다. 집행 전까지만 퇴거하시면 집행비는 아끼실 수 있습니다."
그는 정말 잘 버텼다. 엄마 전화도, 내 전화도 받지 않았다. 조급하지 않았다. 강제집행 신청을 했고, 집행 날짜가 잡히자 문자로 일정을 통보했다.
강제집행 당일, 용역직원들이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할아버지의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필요한 짐을 빼고 있으니 강제집행은 멈춰달라. 집행 안 했으니 비용차감도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나는 '이미 늦었다'고 답했다.
결국 할아버지는 미납한 월세와 강제집행비용을 제하고 보증금 5백만원 중 1백만원 정도만 챙겨 그렇게 집을 떠났다.
며칠 후 쓰레기만 남은 집에 찾아갔다.
낡고, 허름하고, 볼품없었다. 연탄재 버리는 구멍이 그대로 남아있고, 싱크대 문짝은 떨어져 있고, 수돗물은 나오지 않았다. 베란다로 밀려오는 햇살 뒤로 피어오른 곰팡이가 눈에 들어왔다. 나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방 한가운데 털썩 앉았다. 사놓고 25년 동안 우리 가족 누구도 몸 한번 뉘어본 적 없는 집이었다.
이 집 한 채를 지키자고 아버지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접었다. 엄마는 차라리 없는 셈 치고 살았다. 나와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 후 청년과 학생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지원대상에서 제외됐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나를 강남에 집 있는 부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부를 만져본 적도, 느껴본 적도, 기대한 적도 없었다. 우리 가족에게 이 집은 그저 아버지가 세상에 남겨놓은 유일한 흔적일 뿐이었다.
그렇게 철거가 시작되자 이 있지만 없는 집의 가격은 20억원을 넘어섰다. 사람들은 이제 개포동을 '개도 포르쉐 타는 동네'라고 불렀다. 친구들도 직장 동료들도 걱정 없겠다며 부러워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포르쉐 2대 값은 더 들어가야 돼. 지금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