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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 Apr 24. 2024

개포주공은 내가 잘못된다 해도 절대 팔지마라, 절대로

평생 떠안아야 할 인연의 시작

1980년대 중반 아버지는 잠실 대신 그보다 저렴한 개포주공 1단지를 매입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바로 이사를 했다. 5층짜리 전세 아파트에서 아버지 회사 근처 슈퍼집 2층 월세로. 


아이러니하게도 건물주인 슈퍼 아저씨네 가족은 지하에, 세입자인 우리는 2층에 살았다. 그게 그럴 수도 있는 시절이었다. 


그 집에서 동생이 태어났다. 동그란 밥상을 엎어놓고 풍선을 불면 자기도 하겠다고 울어재끼는, 그 얼굴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 우리 집의 모습이다. 


엄마가 '밥상 제대로 놔'라고 하면 곧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밥상은 초라했다. 온갖 풀떼기만 가득했다. 엄마는 그것도 모자라 조금이라도 저렴한 슈퍼에 가겠다며 30분씩 셔틀버스를 타고 다녔다. 아들 하나는 손 붙잡고, 하나는 업고. 


당시 1층이 슈퍼였던 월셋집 / 사진=다음 로드뷰


커다란 스뎅 밥그릇에 머슴밥이 담겨 나오면, 메리야스 바람의 아버지는 한 숟가락 퍼올린 뒤 수저 뒷면을 김에 꾹 눌렀다. 그리고는 숟가락 아래엔 김, 숟가락에는 밥, 그 위에 김치 하나 올려 웅냥웅냥댔다. 엄마는 늘 얼척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아버지가 버는 돈은 족족 개포동 집 원리금으로 사라졌다. 보너스는 조금 남겨뒀다. 엄마는 월급날이 되면 다음엔 전셋집으로 가야 한다면서 아버지를 흘겨봤다. 아버지는 애써 신문만 뒤적거리다가 더 혼나기 전에 공부한다며 방에 들어갔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매주 한 장씩 주택복권을 샀다. 하나 접힌 부분도 없이 말끔하게 한 장 한 장 모인 복권이 5년 치가 됐다. 완벽하게 새것 같은 복권이 한 가방에 꽉 들어차서야 아버지는 '불로소득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라며 그만뒀다. 


훗날 엄마 옷장을 뒤적거리다 깊숙한 곳에서 복권뭉치를 찾아낸 나는 생각했다. '설마 이것도 나중에 팔면 우표처럼 돈 될까봐 번호대로 모셔놓은거 아냐?' 엄마는 아마도 그게 맞을 거라고 했다. 




6살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목이 아프다며 병원에 입원했다. 다음날 이모와 함께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아빠를 찾아갔다. 장발이 멋진 아버지는 꽃을 보고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잘생긴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이다.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뇌종양이라는 병명을 받았다. 한번 수술하자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지 않으면 걸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나와 동생은 서로 떨어져 이모댁과 큰아버지댁을 옮겨 다녀야 했다. 


한참이 지나 아버지와 다시 집에서 만났을 때, 나는 자전거를 사달라고 조르다 엄마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아버지는 "그것도 못 사주냐"며 화를 냈다. 결국 빨간 자전거를 손에 넣었다. 



아버지는 이사한 아파트 입구 벤치에 앉아 내가 자전거 타는 모습을 자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목발 짚은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저수지에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그것이 어린 시절 유일하게 행복했던 기억이 될 줄,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그런 시간이 몇 달이나 되었을까. 아버지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지도, 말하지도 못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아버지 옆에서 놀았다. 동네 아이들과 안방에서 팽이치기를 하다가 장판이 파여 엄마에게 혼났다. 숙제하다 잠들어 공책에 침 흘렸다고 혼났다. 동생이 운다고 혼났다… 


그렇게 혼나다 보니 어느새 아버지 배에 연결된 호스로 공급되는 이유식을 타거나 수술부위 소독까지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됐다. 




1992년 10월의 어느 날, 한밤중에 엄마가 깨웠다. 


"일어나라. 아빠 가신다. 인사드려야지."


엄마는 침착했다.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119에 전화해 '동네 주민들 깨니 사이렌은 끄고 와달라'고 했다. 이모도 불렀다. 나는 학교에 가야 하니 집에 남고, 동생은 이모네 차를 타고 떠났다. 


다음날 학교를 마치고 미리 집에 와있던 막내이모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으로 출발했다. 할머니댁에 도착하니 모두가 울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삐져나온 동생은 슬금슬금 다가와 "형 저 잠자리 좀 잡아줘"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모두가 다시 오열했다. 아버지는 잡으려다 놓친 잠자리처럼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개포주공 1단지 철거 전 모습 / 사진=강남구청


두 번째 수술 전, 아버지는 자신이 가망 없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내가 수술 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집 팔아서 재수술하거나 비싼 주사 놓을 생각 하지 마라. 그 집은 절대로 팔아서는 안된다. 나중에 다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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