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는 세상 모두가 부럽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행복해 보이고 자신보다 불운하고 불행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남편의 잘못된 선택은 지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일단 목표를 상실해서 너무 슬펐고, 자신처럼 성실한 사람에게 왜 이렇게 무자비한 일이 일어났는 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매일 같이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머리와 마음은 따로 놀았다. 원석에 대한 배신감, 실망감으로 자신의 남편 원석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보게 했다. 원석과의 결혼 생활, 이전의 연애기간 동안 저런 선택을 할만한 씨앗이 있었는지 왜 자신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었는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원석과 자신의 추억이 떠오르고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 있다고 하니 이해하고 용서를 해야지 했다가도 자신의 마음에서 솟구치는 '서울에 마련한 내 집'이라는 꿈이 무너진 절망감이 휘몰아쳤다.
겉으론 평온하지만 지수는 매일매일 마음이 지옥 같았다. 이 사람과 왜 결혼을 했을까?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처럼 아프지 않을 텐데 라는 생각에 원석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지수는 매일 해야 할 일을 했다. 침울함과 우울함을 감추고 서글픈 미소를 머금고서 매일 출근하고 아이를 돌보고, 혼자되는 시간엔 끝없는 우울과 절망 속에서 자신을 두었다.
어젯밤도 유진을 재우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출근길 마주하는 아이 등원을 시키는 엄마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평온한 삶을 살겠지. 오늘의 절약과 내일의 희망을 바꾸면서 차근차근 살아나가겠지. 행복한 줄 모르지만 그런 순간이 행복이었지 생각했다. 부러운 사람들. 행복한 사람들. 나는 빼고.
오늘따라 은행에 방문하시는 고객들이 많아서 창구가 붐볐다. 지수는 대출업무를 담당하지만 카드발급과 공과금 납부 같은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카드 발급실적을 동료들에게 넘겨주곤 하는 지수라 동료들은 지수의 이런 친절에 항상 고마워했다. 지수가 창구 앞을 둘러보는데 요즘 핫한 제이미 맘룩을 하신 어느 여자분이 보였다. 플리츠 원피스에 에르메스 오랜 슬리퍼, 헬빈 카민수키 모자를 쓰고, 까흐뛰애 시계와 팔찌를 한 분이었다.
지수는 그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바라는 삶. 저 사람은 그런 삶을 살겠지? 이 동네에 거주하시겠지? 원래 부자인 부모를 두었거나, 남편이 '사'자 직업이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일 거야. 그리고 풍족한 생활비로 아이 교육에 힘쓰면서 살찌지 않기 위해 운동으로 관리하고 윤기 나는 피부를 위해서 피부과와 식이조절을 하겠지. 내가 살고 싶은 그 삶을 그녀는 살겠지. 지수는 다시 원석의 실수가 오버랩되면서 나는 예쁘지 않아서 이렇게 뼈 빠지게 일을 하면서 사는 건가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를 속으로 하고 있었다. 원석이 미웠다. 그 일 이후 지수는 자주 이런 자기 연민에 빠지곤 한다. 저 사람은 남편을 어떻게 잘 만나서 저렇게 살아가는 걸까? 이런 생각을 흩어버리려고 친절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혹시 카드발급 때문에 방문해 주신 고객님 계실까요? 이쪽으로 오시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이미 맘'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다른 업무도 있고, 대출이랑 카드발급도 상담받고 싶어서 왔는데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지수는 생각한다. 역시 부유하시고 여유가 있으시니 이렇게 말씀도 우아하게 하시는구나.
네 물론이죠 고객님. 이쪽으로 앉으시겠어요.
전세자금대출에 대한 문의와 심한 은행에서 이번에 VIP층을 타깃으로 만든 카드발급을 하고 싶다고 했다. 지수는 신분증을 받아서 조회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뭐가 잘못된 걸까? 통장 잔고가 없다. 마이너스 통장밖에 없으시다. 일단 필요한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하고 신용도를 조회했다. 신용도가 대출을 받을 수 없을 만큼 너무 낮았다. 반래A아파트에 거주하시는데 이럴 수가 있을까? 대출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으니 신카라도 조회를 해본다. 가처분 소득을 체크해 보는데 100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지수는 충격을 받았다. 안내를 어떻게 기분 나쁘지 않게 해 드리면 좋을까 고민을 함과 동시에 자기가 살고 싶어 하는 아파트에 제이미 맘의 외향을 가진 그녀가 지수의 상상과는 너무 다른 현 상황에 의아했다. 제이미 맘의 진짜 인생은 어떤 것일까? 지금 상황은 일시적인 모습일까? 아니면 원래 이런 것일까?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나처럼 돈으로 고민을 하고 있을까?
은행에서 일을 하면서 종종 겪는 일이다. 부자와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은 다르다. 그걸 알면서도 지수는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더 친절해지게 된다. 자신이 판매할 상품을 구매할 힘이 있는 사람일 것 같아서. 지수가 만난 제이미맘도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실제 그녀가 가진 지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수는 보이는 게 전부다가 아닐 수도 있을까? 나처럼 이렇게 망해버리고, 겉으로 멀쩡한 척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까? 그들도 힘들겠지. 나만힘들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잠시 위안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