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인생의 굴곡은 있게 마련이다.
추석이 되었다. 지수는 시댁도, 친정도 가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고만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깜깜한 어둠 속에 자신을 두고 싶었다. 하지만 지수는 늘 그렇듯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해야 할 일을 선택했다.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 표정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당부했다. 시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다. 맞벌이를 핑계로 살뜰하게 챙겨드린 적도 없으면서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심려를 끼쳐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유진을 깨우고 한복을 입혔다. 해맑은 유진은 지수에게 장난을 치면서 돌아다녔다. 유진이의 반짝이는 눈과 듬성듬성 이가 빠진 채 웃는 모습에 지수는 마음에 기쁨이 스쳤다. 그래. 힘을 내자. 지수야. 힘을 내자.
원석과 데면데면하게 지낸 지 근 1년이다. 작년 겨울 이사를 오고부터 지수는 원석을 예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욕심으로 자신의 꿈을 빼앗아간 사람, 독단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원망 섞인 미움이 원석에 대한 사랑과 섞이면서 애증을 느꼈다. 자신의 어두운 마음을 표현하기를 꺼리는 지수인지라 그저 회피할 분이었다. 대화를 최소화하고 아이를 교대로 보는 형태로 일정을 조정했다.
원석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에 대한 원망과 비난 무시가 느껴지는 지난날들이었다. 자기 잘 못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지수의 차디찬 눈빛을 마주할 때면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 나 혼자 잘 살아보자고 그런 것도 아닌데, 가족을 위해서였는데, 의도는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늘 그렇듯 원석은 유진을 품에 안아 장난을 치면서 구멍 난 가슴의 바람을 막아보았다.
차를 타고 노운구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부모님은 이미 음식을 차려두고 현관문을 열어두고 기다리고 계셨다. 유진을 반갑게 안으면서 원석과 지수에게도 인사했다. 같은 서울에 있어도 명절이나 어버이날 아니면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이 서울살이니까.
밥을 먹고 정리를 하면서 시어머니는 지수에게 제사용 마른오징어랑 명태를 못 샀다면서 산책 겸 동네 마트에 잠시 같이 가자고 했다. 지수는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지수야, 우리 차나 한잔 마시고 장 보고 갈까? 요즘 내가 카페 중독이 됐잖니. 퇴직하고 나니 시간은 많지 집에 있으니 무료하지 친구들하고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면 재미있고 시간도 잘 가서 거의 매일 한 잔 한단다. 오늘 못 갔더니 생각이 나네.
절약왕 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하기니 저 놀라네요. 호호호. 어머니 제가 맛있는 커피 사드릴게요 가세요.
카페빈이 있어서 거기로 들어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켜두고 고부는 마주 앉았다. 유진이 이야기, 퇴직 후 생활을 이야기하다가 시어머니가 이야기를 꺼냈다.
지수야, 힘들지? 안색이 안 좋네. 나도 마음이 너무 아프다. 원석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한숨이 나오고 또 그 녀석을 붙잡고 혼을 내볼까 싶다가도 지 속은 오죽할까 나라도 따뜻하게 품어줘야 할 것 같아서 아무 말 않았다. 하지만 너를 생각하면 또 내 마음이 얼마나 안 좋은지…
지수야 견뎌라. 앞만 보고 몇 년만 견디면 지나가 있다. 내 나이 36살이었나? 26살에 결혼해서 일하고 애 키우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살다가 저기 승계주공 1단지 18평을 샀다. 안 먹고 안 입고 안 썼지. 애 군것질 하나 제대로 사 준 적 없이 마련한 집이었다.
어느 날 집에 와보니 법원에서 무슨 서류가 와있더라. 집을 경매에 부친다고. 무슨 일인가 알아보니 너희 시아버지가 사업하는 큰아버지 보증을 섰더구나. 집을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봤지만 액수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렇게 집을 날리고 퇴직금도 날렸지. 일부 돈을 돌려받긴 했지만 다 받지 못했다.
그때 콱 죽고 싶었다. 남편이란 사람은 그때도 형님이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말로 오히려 형님 편을 들지. 앞이 캄캄했는데 원석이를 보면서 내가 이것 하나는 키워 놓고 가야지 싶어서 그날부터 하루만 살았다. 오늘 하루만, 너무 힘들어서 죽겠는 날에도 오늘 하루만 살자며 버텼다. 그랬더니 또 돈이 조금 모이고 기억도 희석되면서 이런 게 사는 건가 싶더라.
굴곡진 것이 인생이라더니 내 굴곡은 이 굴곡인가 싶고 나보다 더한 굴곡을 겪는 친구들도 보였지. 부자지만 남편은 계속 바람피우고 집에 오지 않는 친구, 남편이 멋대로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는 바람에 쫄딱 망한 친구, 또 술로 애먹이는 남편을 둔 친구 하며 완전한 행복을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걸 사십 넘어서 알 게됐지. 그리곤 마음이 편해졌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자 다짐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작지만 빚 없는 집 한 칸, 소소한 연금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다해도 저축할 수 있는 생활을 가지게 되었다.
지수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고 있었다.
그래 울어라 울어. 얼마든지 울어라. 원석이를 용서하라고는 못하겠다. 내가 그 마음을 너무 잘 아니까. 하지만 유진이와 너를 생각해서 더 나아질 수 있는 생각을 해보라고 하고 싶다. 지수야 내가 너를 도와줄 경제적 여유는 없다마는 유진이 학원 하나 보내 줄 형편은 되지 않겠니? 혹시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렴. 그리고 이거 용돈이다. 이건 다른 것 하지 말고 너 먹고 싶은 것 사 먹고 깨끗한 옷 한 벌 사 입어라. 사람이 이럴 때일수록 깔끔하고 단정하게 다녀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복이 들어오지. 잔소리가 길었지? 우리 이거 마시고 장 봐서 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