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맡겨만 주세요.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깁니다.

by 알럽ny


지수가 엄마와 장을 보러 나가고 얼마 안 있어서 원석은 후배 동우의 연락을 받았다. 같은 노운고를 나온 후배로 후배 부모님도 여전히 노운구에 사셔서 명절마다 만났다. 지수와 어머니가 돌아오고 원석은 동우를 만나러 잠시 나갔다. 영화맥주라는 체인점에서 만났다. 얼음맥주 2잔에 먹태를 시켰다. 동우는 설날에 봤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져 보였다. 워낙 관리하는 스타일이라 요즘 유행하는 저속노화에 편승했냐는 농담을 던지며 살 빠지니 더 잘 생겨 보인다는 인사를 했다.



형 저속노화면 좋겠는데 이가 과속노홥니다. 잠 못 자고 못 먹어서 빠진 살이에요. 요즘 죽겠네요 형.



앓는 소리 잘하는 동우라 원석은 한 귀로 흘리며 안부를 물었다.




요즘 회사에선 어때? 승진은 했고? 애는 잘 크지? 유진이보다 한 살 어렸잖아.


형덕분에 회사에선 승진도 하고 편안합니다. 승진하고 발령도 잘 받아서 9 to 6 생활하고요. 애는 잘 크는데 제가 큰일이네요.



두 번째 얼음맥주를 마시던 원석은 후배의 이어진 이야기에 먹던 잔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저 지금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어요 형. 형 락훈이 형 알죠? 형 동기인데. 그 형이 사업하고 지인도 많잖아요. 어느 날 형이 자기가 하는 모임에 저를 데리고 가주더라고요. 좋은 술에 같이 모인 분들도 하나같이 재미있고, 또 있어 보이더라고요. 부내가 철철. 다 형님이고 비싼 술도 사주시고 좋았어요. 그렇게 몇 번 만났는데 어느 날 그 형들 중 하나가 자기 아는 사람이 사모펀드를 한다면서 거기에 투자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더라고요. 액수가 최소 10억부터라 저는 해당이 없어서 그냥 보기만 했죠. 근데 세상에 몇 달 지나서 수익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10억을 넣은 형은 14억을 돌려받더라고요. 고맙다면서 형한테 롤렉스 시계를 선물하고... 아무튼 거기서 내 인생은 뭔가 싶었어요. 나처럼 이렇게 살면 뭐 하나 싶기도 하고......




말을 끊은 동우는 맥주를 한 잔을 들이켜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 모임에 안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마음이 안 좋기도 하고 나도 뭔가 도움이 되면 좋겠는데 재미로 계속 나가기엔 입장이 좀 그렇더라고요. 근데 락훈이 형이 제 맘을 알고 다 너 좋아한다고. 너만큼 재미있는 애 없다고 이야기한다면서 오늘은 일단 가자고 하더라고요. 갔는데 새로운 사람이 있었어요. 펀드매니저라고... 그분이 형들 돈을 굴려준다고 하더라고요. 몇십억을 운영해 주는데 수익률이 20%는 된다고 웃으면서 형들이 그러더라고요. 아무나 맡아 주진 않지만 저도 원하면 끼워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서... 5천만 원을 대출받아서 맡겼어요. 근데 정말 매달 수익금이 들어오더라고요. 매달 200만 원에서 300만 원 사이가 들어오는데... 6개월 차가 되니까 이걸 1억 맡기면 얼만가 싶었어요. 그래서 또 5천만 원을 대출내서 더 줬어요. 그때 매니저 형이 매번 물어서 운영하기도 번거롭고 하니 신분증이랑 폰을 개설해서 맡기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분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고. 그래서 별 의심 없이 그렇게 했죠. 돈은 들어오지 월급만큼 되는 돈이 들어오니 정신이 나갔었죠. 와이프한테 가방도 사주고, 수익 일부는 써도 될 것 같아서 차도 바꿨어요.




흠..... 신분증을 맡겼다고?




형 이해가 안 가죠? 근데 그 모임에 가면요 달라요. 다들 그렇게 맡기고 그게 정상처럼 느껴져요. 형 결론은 저 지금 빚이 4억이에요. 제가 맡긴 1억에 제 이름으로 튼 계좌로 미수 거래를 했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계좌에 남은 돈이 3천만 원이더라고요.




하... 동우야... 어떻게 하냐. 너 괜찮냐?




안 괜찮으니까 형한테 보자고 했죠. 지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와이프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매달 나가는 이자 내려고 대출을 더 내고 이런 걸 몇 달 하다 보니 사람이 이상해지네요. 형 저 어떻게 할까요? 죽을까도 생각해 봤는데 또 내가 겨우 4억에 죽자니 존심상하고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살려니 1년에 천만 원 모으기도 힘든 마당에 빚 4억을 무슨 수로 갚나 싶고.....



동우야 일단 와이프한테 말해라. 그리고 해결책을 찾아. 넌 아직 어리니까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야. 수습하고 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야.




원석은 후배에게 이 말을 하면서 쓴웃음이 났다. 차마 내가 그렇게 수습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 되뇌었던 말을 후배에게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가슴이 답답했다. 열심히 살던 후배가, 성실히 살던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나름 사회적 인정을 받는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돈'앞에 조급함과 탐욕을 느끼며 처절한 실패를 마주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똑똑했던 우리가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너도나도 투자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누구보다 못했던 것이 없었기에 투자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료를 분석하는 능력과 그것을 취합해서 판단을 내린다면 큰 무리 없이 부의 추월차선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석이 간과했던 것은 무엇일까? M2 유동성은 분명 늘고 있었고 시중에 유통되는 뉴스, 블로그, 유튜브 모두 영원한 것은 없지만 부동산의 상승과 원자재값 상승으로 인한 건설비 오름 등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주택가격은 떨어질 수가 없다고 말했다. 논문을 쓰듯 오피스텔 투자에 대해 나름의 리포트를 작성했었다. 돌이켜보면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결론에 적합한 증거만 편향되게 수집했던 것은 아닐까? 그동안 원석은 투자를 복기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복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투자를 머릿속으로 복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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