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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Jun 03. 2024

내 친구 윤정이에게.

진심으로 전하는 감사의 마음.


친구(親舊)란 가깝게 오래 사귀어 정이 두터운 사람,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친해져 사실상 반쯤 가족인 인간관계를 한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친구가 많기로 유명하다. 친구들이 다른 친구의 안부가 궁금하면 다들 나에게 전화를 하기도 한다. 지금 내 친구들은 대부분 같은 곳에서 태어나 같은 고등학교까지 다닌 고향 친구들이다. 워낙에 시골이고 반이 3개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향 친구들과는 더 끈끈함이 있다. 당시 선생님들과도 아직 연락을 주고받고 가끔 모임을 갖기도 한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자주 만나고 수시로 연락을 했지만 다들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나에겐 사회에서 만나 절친이 된 윤정이라는 친구가 있다. 아들을 초등학교에 적응시키고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일을 시작했다. 결혼 전에는 입시학원 강사로 일을 했지만 8년이라는 경력 단절이 있었고 친정이 멀어서 아들을 맡기고 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물론 아들을 이 학원 저 학원을 뺑뺑이 돌리면 일하는 게 가능이야 하겠지만 워낙에 잔병치레가 많고 낯을 많이 가려서 출퇴근하는 직장은 엄두도 못 냈다. 아이를 돌보면서 하는 일이 뭘까 고민하던 차에 공부방이라는 창업 열풍이 불었고 이거 다 싶어 바로 창업을 했다.


집에서 일을 하는 것은 좋은데 매주 지사 교육이 있었다. 교육이라고 해서 불렀으면 교육을 시켜줘야지 보험회사나 다단계 회사도 아닌데 회원 모집을 하라고 압력을 주고 회원 모집을 못하면 팀장이나 지사장들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니 공부방 회원을 뭐 쇼핑을 할 수도 없는데 어쩌라는 건지 귀 막고 눈감고 입 닫고 교육 시간만 억지로 때우고 집에 오곤 했다.

어느 날 교육이 끝나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어떤 원장님 한 분이 먼저 말을 걸었다.

"집이 어디세요? 제 차로 태워다 드릴게요."

낯을 좀 가리는 편이라 속으로 탈까 말까 망설이다가 차를 얻어 탔다. 차를 타고 가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동안 본사와 지사에 쌓인 불만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나이도 동갑이고 집도 바로 옆동네가 아닌가?

그날 이후 우리는 친구가 됐다.




친구가 생기고 나니 지겨운 교육도 친구 만날 생각에 신나서 가게 됐고 학교 앞 홍보를 할 때는 서로 시간을 내서 도와주기도 했다. 아무리 경력이 오래됐다고 해도 학교 앞에서 혼자 전단지 홍보를 하기가 쉽지 않은데 친구와 둘이 하니 즐거웠다. 별일 없으면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시고 드라이브 가고 남편보다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사소한 오해로 싸우기도 한다.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왜 싸웠는지 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말이다.  당시 나는 남편과 심각한 갈등 상황에 있었고 아들에게도 문제가 있어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와 풀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친구의 말이 마냥 서운하게 다가와 삐진거다. 나는 그렇게 친구와 달간 연락을 끊었고 친구도 연락이 없었다.




어느 날 아들과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친구에게서 공부방 일을 그만뒀다는 카톡이 왔다.  친구는 공부방 일에 정말 열심이었고 아이들 하나하나 진심을 다해 챙겼던 선생님이었다. 힘들게 키운  공부방을 그만뒀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그리고 그다음 내용을 읽었는데 "숙아, 나 암 이래. 유방암 2기 ."친구가 암에 걸렸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전화기를 든 손이 떨렸다. 그동안 친구가 이렇게 아팠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자괴감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 나는 친구에게 사과를 했다. 그동안 연락 안 해서 미안하다고 무조건 내가 잘못한 거라고 사과를 했다. 그렇게 해야 같았다. 그게 그동안의 내 진심이었으니까.




친구는 검사를 받고 입원을 했고 수술을 했다. 친구는 담담했다. 어떻게 저리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했는데 나중에 친구가 그랬다. 정말 너무 힘들고 아팠다고.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리며 힘든 항암 과정을 이겨냈다고 했다. 나는 아픈 친구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있을까를 생각했다. 당시에 나는 수업을 오후 4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항암을 받기 위해 친구가 입원을 하거나 퇴원을 집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집으로 태워다 주는 일을 자청했다. 솜씨는 없지만 밑반찬이나 김치, 김밥도 만들어다 주고 내가 있는 선에서 친구에게 최선을 다했다.


친구는 8번의 항암 치료와 36번의 방사선 치료를 했다. 길었던 머리는 점점 빠졌다. 내가 상황이었다면 매일 울고 사람도 만나지 않았을 텐데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가발을  쓰고 웃으며 나를 반겼다. 그때 친구가 그랬다. "너한테만 이런 내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라고. 나는 친구가 고마웠다. 나를 정말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는구나 싶어서다. 다른 암환자들과는 다르게 친구는 음식을 먹었다. 특히나 내가  김밥이 맛있다고 좋아했다.  항암 치료를 마치고 친구는 지방에 있는 병원에 내려가서 방사치료를 받으며 요양을 했다.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왔고 평소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라 그런지 이겨내고 자기 관리를 잘해서 지금은 수술 후 5년이 지나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일하고 있다.




친구에게 고마웠던 일이 정말 많지만 지금도 잊지 않고 가슴에 간직한 이 있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고 게다가 남편과도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다.  장례식장이 있는 거제도까지 가야 하는데 버스 멀미를 심하게 하는 나는 남편에게 김포 공항이 집에서 가까우니 비행기를 타고 가야겠다고 했다. 남편은 돈이 그렇게 많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너무 서러웠다.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친구는 화를 낸 남편을 같이 욕해주며 나를 달래 줬다. 전화를 끊고 나니 친구가 비행기 타고 가라고 통장에 돈을 입금한 것이다. 나는 한참을 울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퍼서도 울었고 먼저 돌아가신 아빠 생각에도 울었지만 그보다도 정말 내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들 때 자기도 넉넉하지 않으면서 나를 위해 비행기값을 쥐어준 친구의 그 마음에 더 눈물이 났다."숙아 비행기 타고 편하게 가. 봐서 미안해."  힘들고 서러울 때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 내 친구 윤정이의 이 한마디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모두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친구는 나를 뒤돌아 보게 해서 좋은 길로 이끌어 주는 친구. 내가 힘들 때 기꺼이 나의 힘듦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친구. 서로에게 완벽함을 기대하지 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친구이다. 그런 친구가 내 주위에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됐다.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진정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윤정이와 제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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