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쯤이었나?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어른들이 다들 울고 있었다. 그중에는 처음 보는 어른도 계셨다. 저 분들은 누구이고 이게 무슨 일인가 혼란스러웠다. 엄마에게 이 분들은 누구냐고 물으니 어릴 적 잃어버린 아빠의 여동생이라고 했다. 특히나 작은 아버지와 잃어버렸다가 찾았다는 고모는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다들 우리 집에 모여 밥을 먹고 옛날 얘기를 하며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다시찾은 배다른 고모는작은 아버지 집으로 갔다. 작은 아버지는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살았다. 잃어버린 동생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상했다.
나는 엄마한테 조용히 물어봤다.
"저 고모는 어떻게 찾은 거야?"
"사실은 아빠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두 집 살림을 했었어. 그때 두 번째 부인이 낳은 딸을 찾은 거야."
더 충격적인 사실은 배다른 고모와 부둥켜안고 울던 작은 아버지도 두 번째 부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작은 아버지는 결혼을 해서 딸이 하나 있는 그 나이까지도 자신이 두 번째 부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첩과의 동거
할아버지는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이다. 결혼을 하고 큰 아버지가 아기일 때 할아버지는 돈을 벌겠다며 일본 광산에 일을 하러 갔다. 몇 년 만에 돌아온 할아버지는 돈이 아닌 병을 얻어 왔다. 돌아와서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막노동판이나 광산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 두 집살림을 차리게 됐고 1남 1녀를 낳았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두 번째 부인과 할머니는 함께 살았다고 한다. 두 번째 부인은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할아버지와 못 살겠다며 집을 나가겠다고 했고 아이 둘 중 아들인 작은 아버지는 할머니가 키워 주겠다고 해서 딸만 데리고 집을 나가 다시 시집을 가서 살았다고 했다.
출생의 비밀
두 번째 부인이 데리고 나간 딸, 즉 나에게 고모인 그분이 어른이 되고 시집을 가서 살다 보니 형제가 그리웠다고 한다. 그래서 친인척들에게 수소문을 해 연락을 해 왔다. 연락을 받았을 때 할머니와 아빠는 이 사실을 작은 아버지에게 알려야 하는지 많이 고민을 했다고 한다. 여태까지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복잡한 과거를 밝히는 것이 맞은 일인가 내키지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고모와 작은 아버지를 낳아준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도 아들이 보고 싶다고 계속 연락을 해와서 어쩔 수 없이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를 비롯해 큰 아버지, 우리 아빠, 우리 할머니가 낳은 고모도 배 다른 동생을 놀리거나 주워왔다고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시 작은 아버지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점점 멀어지는 배다른 동생들
시간이 갈수록 우리 가족들과 두 번째 부인의 자식 둘은 점점 사이가 멀어졌다. 배다른 고모는 나이 차이가 나는 돈 많은 남자와 재혼을 했다. 우리 가족들을 그 고모가 사는 대구로 초대를 해서 관광을 시켜주고 산해 진미를 대접하고 집에 올 때 선물을 한 아름 안겨 주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올 때도 마찬가지로 선물 공세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작은 아버지와 대구 고모는 우리 가족 몰래 연락을 하고 몰래 서로의 집을 방문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 가족들이 배다른 동생이 못마땅했다면 애초에 찾았을 리도 없었을 테고 친동생처럼 챙겼을 리도 없다. 우리 아빠나 고모가 배다른 동생들을 시기 질투할 사람들도 아닌데 말이다. 그럴 사람들이었다면 배다른 동생을 집에 데리고 왔을 때 구박하고 차별을 했겠지 결혼해서 아이를 나을 그 나이까지도 전혀 눈치재지 못하게 잘해줬는데 말이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법이 아니다
아빠는 중학교 중퇴이다. 너무나 가난해서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일본 징용에서 얻은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넷이나 되는 애들을 콩나물 장사로 키웠다고 한다. 아빠는 공부를 잘해서 초등학교 3학년에서 5학년으로 월반을 했다. 거기다 그림도 잘 그려서 미술대회에서 늘 상을 받았다. 그런데 집이 가난하다 보니 물감을 쓰는 그림 대신 연필로만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고등학교 땐가 아빠가 중학교 때 그린 그림을 보여준 적이 있다. 언덕에서 아래 동네를 내려다보는 남자아이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자신의 모습을 그렸던 걸까? 그 어려운 가정환경에서중학교라도 졸업한 형제는 작은 아빠가 유일하다. 큰 아빠도 우리 아빠도 고모도 다들 중학교 중퇴가 최종 학력이다. 작은 아빠는 막내라고 그래도 형제들이 번 돈으로 중학교 졸업은 시켰던 거다.
자신보다는 동생을 챙긴 아빠
아빠는 늘 배움에 대한 갈증이 많았다. 항상 독서를 하면서 갈증을 채웠다. 이런 아빠를 알아본 분이 계셨다. 강원도 출신이고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를 거쳐 민주정의당 4선 국회의원을 지닌 심**이라는 분이 가방 끈은 짧지만 다방면에 똑똑한 아빠를 알아보시고는 동생처럼 아껴 주셨다고 한다. 그분께서 아빠에게 "살면서 정말 힘들 때 내가 소원 3가지를 들어주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빠는 첫 번째 소원으로 작은 아버지의 취직을 부탁했다. 자신도 식당을 해서 겨우 먹고살았지만 광부로 일하는 동생이 자신보다 더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분은 작은 아버지를 말단 공무원에 낙하산으로 취직을 시켜 주셨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자신의 취직을 부탁했다. 나와 남동생을 대학에 보내야 하는데 등록금을 댈 형편이 안 되니 당시 자녀 둘까지 대학 등록금을 전액 지원해 주는 공기업에 취직을 부탁했고 아빠는 말단 경비직으로 40대에 취직을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세 번째 소원으로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 내 취직을 부탁하려고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분은 내가 대학교 1학년 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공무원을 때려치운 작은 아버지
작은 아버지도 아빠 못지않게 똑똑한 사람이다. 다만 가난으로 배우지 못한 것이 콤플렉스였다. 가방끈도 짧고 낙하산으로 취직한 작은 아버지는 능력은 인정받았으나 학벌이 딸린다는 이유로 늘 승진에서 탈락을 했다. 심지어는 한직으로 밀리고 밀려서 결국은 직장을 그만뒀다. 직장을 그만두고 작은 아버지는 거제도에 내려가 식당을 차렸다. 거제도에는 고모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고모를 믿고 무작정 내려가서 식당을 차렸는데 장사에 대한 경험도 없고 음식 솜씨가 없던 작은 엄마는 주방을 온전히 책임지지 못해 결국 식당은 망했다. 작은 아버지가 식당을 오픈했을 때 나는 한 달간 매일 점심시간에 일을 돕고 학원에 출근을 했다. 가진 돈을 다 날리고 작은 아버지는 거제도 고모와 우리 아빠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아빠한테는 왜 자신을 말리지 않았냐 원망을 했고 거제도 고모한테는 왜 식당이 잘 된다고 했냐며 자기를 속였다고 원망했다. 아빠는 분명히 말렸다. 어쨌든 학벌이 딸리는 건 사실이니 애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참고 다니라고 했고 거제도 고모는 조선소가 있기 때문에 식당은 잘 되지만 경험이 없으니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몰리면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잘못을 찾으려고 한다. 작은 아버지도 그랬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거 싫어하는 아빠가 자신의 취직 자리보다는 동생을 먼저 어렵게 말단 공무원 자리에라도 취직을 시켜 줬는데 너무 성급하게 그만뒀고 경험도 없는 식당을 차려서 가진 돈을 다 날리고 부모 형제를 원망하는 작은 아버지를 보며 많이 속상해했다.
나날이 늘어 가는 원망과 멀어져 가는 형제 사이의 거리
전재산을 날린 작은 아버지는 조선소에 취직을 했고 작은 엄마는 식당에 일을 하러 다녔다. 힘들일을 해본 경험이 없는 작은 엄마가 식당일을 힘들어하자 고모는 자신을 원망하는 동생이지만 그래도 힘들게 사는 게 안쓰러워 작은 엄마를 고모가 하는 식당에서 일하게 했고 월급도 다른 직원보다 더 많이 챙겨줬으며 심지어는 반찬이나 쌀도 대주며 도와줬다. 하지만 작은 아버지는 전 재산을 날린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는지 매번 고모 가게에 와서 원망 섞인 말들을 늘어놓았고 그 일로 인해 고모와 고모부까지 부부싸움을 하기에 이르렀다. 고모부는 술만 마시면 고모한테 처갓집 흉을 보았고 참다못한 고모는 또 고모부와 싸움을 하고 싸운 소식을 들은 아빠와 엄마는 속상해하고 나날이 형제 사이는 멀어져 갔다.
작은 아버지와 연락을 끊었다.
아빠와 엄마는 작은 집을 많이 도와줬다. 사촌 동생들도 잘 챙겨 줬고 제사 지낼 때 늦게 오거나 제사 비용을 조금만 내놔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사실은 우리 아빠는 둘째 아들인데 제사와 할머니 부양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엄마 아빠를 원망하더니 나까지 미워하는 게 느껴졌다. 아들 홍이가 세 살 무렵 거제도에서 사촌 동생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작은 아버지를 만났는데 아들은 아는 척도 안 하더니 사촌 오빠 아들만 이쁘다고 안아주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작은 아빠에 대한 섭섭함이 미움으로 변했다. 그래도 작은 아버지가 결혼하기 전까지 한 집에 살았었고 작은 아버지를 좋아하고 잘 따랐었다. 부모들끼리야 어떻든 나는 작은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 자식까지 미워하는 모습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나는 작은 아버지와 연락을 끊었다.
그래도 핏줄이니까.
9년 전 아빠가 갑자기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다. 당시 아빠는 퇴직을 하고 공공근로인 산불 감시원을 하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지셨다. 소식을 듣고 작은 아버지가 나에게 10년 만에 전화를 했다.
"아빠가 일했던 부서 담당이 아는 사람이다. 내가 전화해서 아빠 일을 해결해 볼 테니 너는 그쪽에서 전화가 오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라고 했다.
나는 형제가 없다. 장례절차도 잘 모르고 갑가기 일을 당하다 보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서 울고만 있었다. 남편도 여기 사정을 잘 모르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작은 아버지의 전화가 힘이 됐다.
작은 아버지가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담당 군청에 가서 군수와 담당 공무원을 만나 근무 중 일어난 일이니 군에서 책임이 있는 거 아니냐 장례도 책임져라 등을 얘기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무로 인해 죽었다는 증거도 없고 그런 것을 증명하려면 부검을 해야 한다니 나는 생각만으로도 괴로워서 다 필요 없다고 하고 장례를 치렀다. 작은 아버지가 나서서 해결된 일은 하나도 없지만 해당 부서와 군수에게 항의해 준 것만 해도 너무 고마웠다. 작은 아버지가 공무원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지역 공무원들과 군수까지 문상을 와서 사과를 하고 갔으니 나는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서로 감정이 상해서 10년이란 시간을 모른 척 살았지만 작은 아버지의 이런 행동은 지난 10년에 대한 미안함과 사과의 마음이라고 느껴졌다. 장례를 다 마치고 아빠 유품을 정리하면서 아빠가 입던 옷을 작은 아버지가 가져가서 입어도 되겠냐고 해서 가져가시라고 했다. 죽은 이의 옷을 버리지 않고 입어 준다는 것도 너무 고마웠다. 아빠의 옷은 작은 아버지와 남편이 나눠 가졌다. 유품 정리를 마치고 작은 아버지는 다시 거제도로 내려갔다.
용서
나는 작은 아버지가 너무 고마웠다. 그 이후 매년 명절과 생신 때 항상 홍삼을 보내 드렸다. 그러다 몇 년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적이 있어서 못 챙겨 드렸다. 나는 작은 아버지를 용서했다. 아직 엄마는 섭섭함이 남아 있다고 가끔 분함을 표출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 가진 게 없어 때로는 빈손으로 엄마 집에 들르지만 그래도 엄마한테 들렸다가 가는 작은 아버지가 고맙다. 엄마는 빈손으로 와서 자식 자랑만 잔뜩 하고 홍이 안부는 묻지도 않고 간다며 밉다고 하지만 나는 그래도 작은 아버지가 고맙다. 시민 기자가 되고 기사가 나오면 항상 작은 아버지께 카톡으로 기사를 보낸다. 늘 읽고는 답이 없었는데 며칠 전 처음으로 답장을 보내셨다. 답장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 그래도 작은 아버지가 내가 잘 되기를 바라고 계셨구나 그 마음이 느껴져서 한 참을 울었다. 작은 아버지도 곧 칠순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좋은 감정만 갖고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