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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Jun 24. 2024

통일의 집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

'통일의 집'에 가다

지난 6월 14일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강북문화예술회관 진달래홀 갤러리에서 열린 문익환 목사 서거 30주년 기념 기획전 '늦봄, 평화를 심다' 의 주최 작가인 '평화의 소녀상' 김운성 작가님의 인터뷰를 마치고 전시관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문익환 목사의 사택이었던 '통일의 집'에 들렀다. 길치인 나는 네이버 길찾기를 이용해 무사히 통일의 집에 도착했다. 조용한 주택가 골목길 끝에 위치한 '통일의 집' 문을 두드리니 금방이라도 문익환 목사님께서 반겨 주실 듯 마음이 설레였다. 집으로 들어가니 낡은 피아노가 거실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문익환 목사가 살았던 당시 구조 그대로의 각 방에 각종 자료와 사진, 그림들이 전시돼 있었다. 마침 '통일의 집'에서도 작은 전시회인 '밥알들의 양심'이라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 작품도 함께 둘러볼 수 있어 좋았다.


<  조아진 작가 '늦봄의 대문' : 통일은 늦게 찾아오지만 대문을 열어 두면 언젠간, 반드시 찾아온다  >


사택을 시민들의 일상속 박물관으로 공개

'통일의 집'은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가 1994년 문익환 목사 별세 후 살던 집을 토론과 교육의 장으로 만들고자 살던 집을 '통일의 집'이라고 이름 붙이고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통일의 집'에는 한국근현대사 자료 2만 5천 여 점이 있지만 제대로 보관되지 않고 있는 문제가 있었다. 민족의 유산인 민주화운동자료를 보존하여 평화, 통일을 논의하고 지역의 문화공간으로 조성하여 일상 속에 뿌리내린 박물관으로 만들어 역사 교육의 장으로 만들기위해 가옥을 복원하고 재정비해 사단법인 '통일의 집'을 만들어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  문익환 목사가 풀무원 동지들을 위해 쓴 붓글씨 : 풀무원을 시작한 환경운동가 원경선 선생과 문익환 목사는 뜻을 함께하는 친구였다 >


목사로서의 삶을 택한 문익환

문익환 목사는 1918년 6월 1일 만주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피해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북간도 만주 용정으로 이주했다. 윤동주와 같은 동네 에서 태어나 같은 학교에서 공부 했고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윤동주와 송몽규의 죽음으로 문익환은 목사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와 통일이 되지 않으면 민주화가 될 수 없다는 기독교적 신념으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문익환 목사는 연세대학교와 한국신학대학교에서 구약성서를 강의했으며 구약 성서를 번역을 하는 성서학자로도 활동했고 민중의 관점에서 알기 쉽게 설명한 '히브리 민중사'와'삼민사 刊'을 저술하기도 했다.  


< 류연복 작가 '숲 - 늦봄 ' : 6장의 판화를 겹쳐 찍은 작품으로 문익환 목사의 모습을 십자가로 표현 >


문익환 목사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

문익환 목사는 친구인 사회운동가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익환 목사는 군부독재와 유신헌법에 저항하였고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투옥되기 시작해 투옥된 기간은 총 6회에 걸쳐 11년 3개월이 넘는다. 1987년 7월 8일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여 다음날 열린 고 이한열열사의 영결식에서 민주화 열사 들의 이름을 모두 같은 음량으로 한 명 한 명 불렀던 일화는 유명하다.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문익환 목사는 통일운동에 매진한다. 1989년 정부와 협의 없이 독자적을 북한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하고 귀국했다. 평양에 도착해 성명을 발표 하면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잠입죄'로 투옥되었다.


< 백영욱 작가 '열사여!' : 먹으로 그린 캘리그래피 , 1987년 7월 9일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 '조사, 문익환 목사님 서서 30주년, 선생의 처절한 절규를 소환하다. >


문익환 목사의 평생의 동지 부인 박용길 장로

활발한 통일운동과 강연활동을 펼치던 문익환 목사는 1994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문익환 목사의 자녀로는 재야운동가로 활동한 장남 극작가 문호근, 차남 문의근, 삼남인 배우 문성근과 딸인 문연금 그리고 부인 박용길 장로가 있다. 부인 박용길 장로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요코하마 신학교에 입학했고  일본에서 문익환을 만나 결혼했다. 귀국하여 문익환의 신앙과 사회활동을 도왔다. 문익환 목사가 민주화의 길에 늦게 들어섰다는 뜻으로 '늦봄'이라는 호를 짓자 박용길 장로는 그 길에 끝까지 함께 동참하겠다는 뜻으로 호늘 '봄길'로 지었다고 한다.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했고 독재정권에 투쟁하는 한국 운동가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원을 호소하는 역할을 했다. 문익환 목사가 11년 3개월 동안 투옥 되었을 때 가족들은 남방을 하지 않고 지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사후에는 자신의 각막을 기증했으며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남편 문익환과 함께 합장되었다.



 < 1944년 6월 17일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의 혼례식  >


문익환 목사 서거 30주년 통일의 집에서 '밥알들의 양심' 특별전 열려

문익환목사가 부인 박용길 장로와 주고 받은 수 백장의 옥중 편지엔 양심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문익환 목사는 양심을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는 마음' 이라고 설명하며 글의 양심은 땅에서 밥알에서 시작되며 밥알이 나의 생명을 지탱해주며 다른 이들의 생명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문익환 목사 사후 30년 동안 그가 남기고 간 밥알은 수많은 이들의 살과 뼛속, 핏속에 스며들어 양심이 되었다. 이번 '밥알들의 양심' 전시회는 문익환 목사의 사상의 뿌리이자 평생의 화두였던 '생명과 평화'에 대한 기록을 전시한다.


< 레오다브 그라피티 작가: '역사를 그리다, 뿌리다, 새기다'라는 의미로 실제 박물관 벽면에 작품을 남겼다  >



전시기간 23024년 7월 31일까지(월~금 10시부터 17시, 토요일 13시부터 17시, 공휴일 휴관)

문의 : 02-902-1623

통일의 집 위치 : 강북구 인수봉로 251 - 38


초청작가 : 고경일, 권산, 김운성, 김서경, 김진희, 레오다브, 박지혜, 이구영, 이세림, 이하. 임대니, 임의진, 정경숙, 조정태, 최병수, 윤경순, 허윤희


후원정보 : 우리은행 1005 - 003 - 075342 예금주 사단법인 통일의 집


늦봄문익환 기념사업회  : https://www.archivecenter.net/tongilhouse


*대문사진*

이구영 작가 '문익환 부활도' : 온 평생을 통일 운동에 몸 바치신 문익환 목사의 모습을 남과 북, 온 누리의 화합을 상징하는 태극기 문양을 배경으로 그렸다. 두 팔 벌려 평화를 끌어안으려는 모습은 세상을 품에 안고자 했던 문익환 목사의 의로운 삶을 상징한다.


글에 쓰인 그림들은 '늦봄, 평화를 심다'  기획전에 출품 된 작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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