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퇴직'이라는 불청객
나는 두 가지 장점이 있다.
나는 장점이라 칭하고, 아내는 가끔 그게 문제점이라고 반박한다.
하나는 어디서든 잠을 잘 잔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잠이 드는 시간이 남들보다 훨씬 짧다. 머리만 대면 잠이 든다.
다른 하나는 일 년 내 식욕이 없는 날이 없다.
아무리 아파도 나의 식욕은 항상 왕성하다.
내가 잔병치레가 적은 원인도 병원균들이 나의 왕성한 식욕에 놀라 달아나는 이유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던 내가 밤에 잠이 오지 않는 날이 갑자기 늘어났다.
나를 불면의 밤으로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감정의 세트메뉴'들이었다.
메인 메뉴는 억울함이었고, 사이드 메뉴는 불쑥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상대적 박탈감이었다.
톰 행크스와 멕 라이언이 주연한 로맨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에서
톰 행크스가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잠 못 들었던 그런 애틋한 불면증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억울함은 주관적 감정이다.
당하는 사람은 이유가 어떠했던 억울하다고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마지막 해 임원 재직기간은 소위 대과(大過)도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조직을 잘 세팅하고 조직의 역할 수준도 어느 정도 끌어올렸다.
그런데 왜?...Why me?...
과거에 어떤 CEO를 역임하신 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감정의 정리 후 세상 밖으로 나오는 데 만 2년이 걸리더라고...
살다가 미친놈처럼 불쑥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다.
그것도 자다가 불쑥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엽기적이다 못해 신선하기까지 하다.
살면서 겪어 본 분노의 감정은 대부분 분노할 그 현장에서 바로 느끼는 일종의 인스턴트 감정이었는데,
분노가 숙성된 후 시도 때도 없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될 수도 있구나 하고 느끼는 것도 사뭇 새롭다.
그리고, 나의 퇴직 무렵, 굳이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들려왔던 지인들의 영전과 이동 소식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보다 나은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들은 왜?...
아무리 혼자 생각해 봐도, 주변의 의견을 들어 보아도,
단순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차원의 감정이나,
지독히 그릇이 작은 나라는 인간이 느끼는 유치한 감정만은 아닌 것 같아 더욱 소화해 내기가 힘들었다.
이 상대적 박탈감은 다시 억울함으로 회귀하여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악순환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었다.
한 술 더 떠 이젠 안 꾸던 꿈까지 꾼다.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이려는데...
꿈은 여러 가지 정의가 나와 있지만 '수면 중에 뇌의 일부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기억이나 정보를 무작위로 자동 재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꿈의 내용은 과거 프로이트는 '의도적으로 억제되어 있던 기억'들이 나타난 것이라고도 하고,
현대 연구에서는 주로 우리의 '일상생활'이 나타나는 것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최근 나의 꿈은 후자이다.
옛날에 힘들 때면 가끔 다시 대입시험을 보거나, 다시 군에 입대하는 꿈을 꾸곤 했었다.
하지만 최근의 꿈들은 한결같이 회사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 힘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구명(救命)하는 내용이다.
문득 잠에서 깨고 나면 기분이 영 아니다. 자존심 상해서...
밤새 이 난리를 치고는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든다.
그러고는 해가 중천에 뜰 무렵 겨우 일어난다.
아내가 밥 차려 놓았으니 같이 밥 먹자고...
문득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이 사람이랑 결혼 안 했으면 지금 이맘때쯤 진짜 비참하고 외로웠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