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원망하랴.
이미 나는 속절없이 떠나고 있는 결혼이라는 버스에 올랐다.
내 손에는 23살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결혼 전 엄마가 나를 전남편 집에 억지로 보내면서 처음으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 OO이 (전남편) 사랑 안 하니?"
"당연하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엄마가 아니라 누가 봐도 사랑에 빠져 행복한 허니문을 앞둔 예비신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툭하면 핑계를 대며 결혼식을 늦추면 안 되나, 결혼을 안 하면 안 되나 징징거리기 일쑤였다.
"결혼은 사랑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야. 애 낳고 살다 보면 정이 들고 나중엔 그 정 때문에 살아가는 거다. 모든 부부가 다 그래. 부부는 사랑으로 사는 것 아니야. 너 힘들게 할 집안 아니잖아. 그냥 편한데 시집가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야."
평범하게? 내가 늘 소망하던 단어였다.
새아빠가 속 썩이고 난 뒤에 우리 집 가정사가 진절머리가 나서 나는 친구들에게 집에서 된장찌개나 끓이며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는 게 꿈이라고 말해왔다.
비록 등 떠밀리듯 하는 결혼이었지만 평범하고 평온하게 살 수만 있다면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도 선을 봐서 결혼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나고 나서 결혼을 결정했단다.
하지만 사랑 없는 결혼은 몇 년 뒤 가난한 남편에게서 죽도록 두들겨 맞고 버려진 결말을 가져왔다.
그때는 몰랐다. 평범할 줄 알았던 내 결혼이 몇 년 뒤 엄마와 똑같은 결말을 내게 줄 거라는 걸.
오빠는 정말로 내가 이혼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는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나에겐 애가 둘이 생겨 있었다.
사랑했던 여자이긴 했지만 엄마이기도 했다. 오빠는 내 애들을 같이 키워 줄 마음도 먹었었다.
그렇지만 난 또다시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왜 받아주지 않는 거냐고 오빠는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상식적으로는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내가 뭐라고 딴 남자랑 결혼해서 애까지 낳아온 여자를 그 정도로 기다렸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어야 했다.
하지만 난 이혼 후 이상하리만큼 냉소적으로 변했다.
핏덩이들 둘을 키워야 했다.
연애, 사랑, 재혼이라는 건 우리 셋 앞에 놓인 상황에서는 사치스러운 말이었다.
특히 아이들에게 '새아빠'라는 난데없는 선물을 주고 싶지 않았다.
엄마처럼 남자를 데려와 사는 일은 죽어도 없을 거라고 아무리 힘들어도 혼자 버티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새아빠의 트라우마를 내 자식들에게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외롭고 지친 하루의 끝을 술로 달랬다.
오늘 기막힌 일이 있었어도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퇴근길이 허전했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소리가 거의 안 들리게끔 티비를 틀고 혼자 술을 마시다 잠드는 것이 고작인 날들이었다.
마흔을 막 넘겼던 어느 날, 큰 아이가 이제 엄마도 밤에 술 그만 먹고 남자 좀 만나보라는 말을 할 때까지
내가 밤에 혼자 조용히 즐기는 취미생활을 아이들이 까맣게 모를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즈음 운명처럼 만났던 한 남자에게 오래도록 잊고 있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꺼내졌다.
그 사랑은 내 나이도 잊고, 내가 누구의 엄마라는 사실도 잊을 정도로 깊고 매혹적이었다.
1000일을 목전에 두고 내 첫사랑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와 헤어진 기억이 오래도록 괴롭혔고, 그 상처가 쉽게 아물어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결과는 똑같을것 같았다.
난 이제 사랑이 싫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