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비를 피해 도피여행

미국에 산다면 보스턴에서

by 임지훈

[미국에서도 당일치기]

20240402_151550.jpg 보스턴 공공도서관

뉴욕은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비가 계속 내렸다. 그나마 어제는 오전에만 비예보가 있어서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오늘은 하루종일 비 예보가 있다는 슬픈 소식.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른 지역으로 가보자.' 남미에서 자주 하던 당일치기 습관이 또다시 꿈틀댔다. 뉴욕에서 갈만한 근교도시는 네 군데 정도 있었다.


1. 쇼핑을 하러 가거나 한인들이 많이 사는 곳을 보러 갈 수 있는 뉴저지

2. 2시간 거리에 있고 미국 역사상 최초의 수도였던 필라델피아

3. 4시간 거리에 있고 미국의 수도이자, 뉴욕보다 남쪽에 있어서 따뜻한 워싱턴 DC

4. 4시간 거리에 있고 유서 깊은 교육도시 보스턴


며칠뒤면 한국으로 돌아갈 거고 쇼핑 생각도 딱히 없어서 뉴저지는 패스, 필라델피아는 가깝긴 한데 여기도 비예보가 있어서 패스, 뉴욕보다 날씨도 따뜻하고 볼 것도 많은 워싱턴이 제일 끌리기는 하는데 여기도 비예보가 있었다. 결국 남은 건 뉴욕보다 춥지만 비예보가 없는 보스턴. '그래 가자 보스턴으로'


6시쯤 기상 후 반찬가게 '우리 집'에서 사 온 밥과 반찬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뉴욕에 온 후 매일 아침마다 한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엄청 든든하다.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려면 매디슨스퀘어 가든 근처의 플릭스버스-미드타운으로 향하면 됐다. 지하철로 터미널까지 이동하면서 급하게 티켓을 끊었는데, 다행히 자리는 넉넉하게 있었다.



[하버드 그리고 MIT]

20240402_123050.jpg 하버드 교정

'보스턴' 하버드와 MIT 등 세계적인 대학교가 모여 있는 교육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그 외에도 실용음악으로 유명한 버클리 음대, 마틴루터킹의 모교 보스턴대학교, 힐러리클린턴의 모교 웰즐리 칼리지 등 유명한 대학교들이 모여있는 교육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이렇게 많은 대학교가 있지만 내가 방문한 곳은 하버드와 MIT였다. 보스턴 버스터미널에서 지하철 레드라인을 타고 조금만 이동하면 하버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스턴 지하철의 첫인상은 뉴욕과 달리 매우 깔끔했다. 조금 오래된 느낌은 있었지만 뉴욕처럼 칙칙하고 지저분한 느낌이 아닌, 고즈넉한 느낌이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뉴욕처럼 왁자지껄한 분위기도 노숙자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도 아닌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20240402_123513.jpg 존 하버드의 발을 만지면 자녀가 하버드에 간다 (믿거나 말거나)

하버드 정문에 도착하자 붉은색 벽돌로 된 건물들이 사방에 깔려있었다. 붉은 벽돌은 운치 있는 느낌을 제공했고, 역사적으로 오래된 곳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하버드 안쪽으로 들어가자 관광객이 몰린 곳이 있었다. 바로 하버드의 창립자 '존 하버드'의 동상이 있는 곳이었다. 하버드 동상의 발을 문지르면 자식이 하버드에 입학한다는 전설 때문인지 하버드의 왼발은 도색이 벗겨진 채 구릿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녀가 있는 건 아니지만 미래에 태어날 아이를 위해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나도 하버드의 발을 만지며 사진을 기록했다.


20240402_124757.jpg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하버드는 세계적인 대학치고 그리 캠퍼스가 크지 않았다. 그리고 몇몇 외부인에게 오픈된 공간을 제외하고는 대학교의 시설을 이용할 수는 없었기에, 관광할 수 있는 공간은 더욱 좁았다. 하버드 재학생들이 진행하는 가이드를 이용했으면 더욱 알차게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시계가 통째로 돌아간다...!

하버드를 나와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우리에게 MIT로 유명한 학교였다. MIT에 들어서자 독특한 시계가 눈에 띄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시침과 분침만 움직이는 게 아닌, 시계가 통째로 움직이는 괴상한 시계가 있었다. 역시 괴짜들의 대학교답게 첫인상부터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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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의 독특한 건축물들

하버드와 달리 MIT는 모든 공간이 외부인에게 오픈되어 있었다. 도서관을 비롯해 다양한 건물들을 외부인들도 이용할 수 있었고, 하버드에 비해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건물들은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형상화 한 창문이 있기도 하고, 바람을 막아주는 조형물이 있기도 하는 등 독특한 구조물과 조형물을 보는 맛이 쏠쏠했다. 보스턴에서 한 군데의 대학만 방문한다면 MIT를 고를 정도로 재미있는 곳이었다.



[보스턴 레드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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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에서 빠져나오니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었다. 다음 목적지인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 '팬웨이 파크'를 방문하려면 지나가야 하는 다리였다. 다리 너머로 보이는 보스턴의 건물들은 뉴욕만큼 높지는 않았지만 깔끔하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20240402_141251.jpg 보스턴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리그 우승 이력

보스턴 레드삭스는 뉴욕양키스, LA다저스와 함께 명문구단이라 불릴만한 구단이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우승 후 계속해서 우승을 하지 못했던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2004년 86년 만에 우승한 이야기로도 유명한 구단이다. 이후로도 3번의 우승을 더 차지했으니 완전히 저주를 벗어던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오늘 방문하는 팬웨이 파크는 메이저리그 홈 구장중 가장 오래된 구장이다. 100년이 훌쩍 넘는 구장답게 고즈넉한 느낌이 일품이었다. 하버드처럼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외벽은 100년 전의 보스턴 풍경을 연상케 했다. 비록 이 날은 경기가 없어 직관을 할 수는 없었지만, 메이저 최고(最古)의 구장을 방문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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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웨이 파크와 근처의 보스턴 레드삭스 기념품샵에 들른 후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마치 해리포터에 나올 것처럼 아름다운 내부를 자랑하는 보스턴 공공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이라고 하기에는 각종 조각상들이 계단을 지키고 있고, 벽면에는 아름다운 그림들이 장식하고 있는, 마치 미술관과도 같은 풍경이다.


예전 오스트리아나 프랑스에서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에는 그 그림이 그 그림 같고, 딱히 감흥이 없었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이런 그림들이라 굉장히 신비롭게 다가왔다. 왼벽을 봐도 오른 벽을 봐도 그리고 천장을 봐도 미술품들로 장식된 도서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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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내부 역시 아무나 이용이 가능한 듯했다. 자리는 이미 빼곡하게 공부를 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고, 맥북을 들고 혹은 노트에 끄적이기도 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공부에 집중했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데도 공부에 집중하는 학생들을 보니 '괜히 하버드, MIT를 다니는 대학생이 아니구나'하는 감탄마저 들었다,


물론 해리포터에 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내부는 덤!



[집으로 가는 버스, 그리고 약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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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은 뉴욕에 비해 사람도 없고 한적하다. 히지만 그 점이 보스턴을 살기 좋은 곳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뉴욕의 자동차 경적 소리도, 무단횡단 하는 사람도, 대마초를 피우며 길거리에 누워있는 노숙자, 노상방뇨 때문에 지린내가 나는 골목 그 무엇도 없었다. 만약 미국에서 살 수 있다면 보스턴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보스턴은 거주하기에 정말 좋은 환경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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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기 전 보스턴의 명물 랍스터롤을 먹을 겸 퀸시마켓이 들렀다. '여기가 그렇게 유명하다는데?' 그런데 가격들은 전혀 착하지 않았다. 'Hot buttered maine lobster roll' '$34.23' 메뉴판을 보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랍스터라지만 빵쪼가리에 랍스터 조금 끼워놓은 저 빵 하나가 5만 원 정도라고?


미국의 물가는 언제라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보스턴이라 이 정도지 뉴욕이었으면 50달러 정도 받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결국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돈도 써본 사람이 잘 쓰지. 평소에 안 쓰던 버릇이 있으면 여행 나와서도 매한가지다. 괜히 부모님들이 '이 돈이면 한국에서 백반이 몇 접신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보다. 딱히 음식에 미련이 없던 나는 근처 과자자판기에서 4천 원짜리 도리토스를 뽑고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했다.


보스턴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금방 뉴욕행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렇게 무탈하게 뉴욕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때까지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와글와글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쳐다보니 건장한 흑인 한 명이 버스기사 옆에서 랩을 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 랩이지. 욕인지 시비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버스기사에게 내뱉고 있었지만 승객들은 아무도 제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30분 정도 랩을 하던 남성은 갑자기 랩을 멈추고 맨 뒤 자신의 좌석으로 돌아갔다. '이제 저 사람도 지쳤나 보네. 다행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쯤 매캐한 연기냄새가 났다. 미국 길거리에서 흔하게 맡을 수 있는 냄새. 대마초 냄새였다. 이 남성은 약빨을 받았는지 다시 버스기사 옆으로 가서 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핸드폰으로 비트까지 깔면서!


지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발 사고만 나지 않기를 바라며 빨리 버스가 뉴욕에 도착하기를 바라며, 안전벨트를 꽉 동여매는 것 밖에.

저 남성이 대마초를 태우고 랩 하기를 3번 정도 반복하니 버스는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 신이시여. 약쟁이 때문에 버스사고로 죽지는 않게 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저런 사람을 아무도 제재하지 않는 미국의 삭막함과 총기에 대한 두려움이 만든 현실 아니었을까. 참 생각이 많아지는 버스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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