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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바트로스 Jul 05. 2024

1. 글바트로스, 추락

1990년 4월 1일 13시, 김포 공항 이륙. 13시간의 긴 비행 후, 드골 공항에  착륙한 시간, 아직도 오후 18시! 시간 계산, 공항에 공황이 온다. 만우절 매직? 8시간 늦은 시차를 모르는 나에게는, 매직 현상!       

유학원 직원의 안내로 도착한 작은 호텔도, 내 취향이다. 다만, 노크 소리와 동시에 들어온 호텔 직원의 말은

“어ㅣ어ㅣ러미ㅑㅓ리ㅑ더리무ㅢ의림리댜랴”

너무 빠르다. 불어전공 후, 6개월이나 프랑스 문화원을 다녔는데도. 도대체,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현지 불어가 아라비아나이트 주술처럼, 빠르게 몇 차례 지나갔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내 내뱉은 나의 “농(Non)” 소리를 듣자, 그는 바람처럼 휙~ 사라졌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 만난 유학원 직원이, 정오에 다시 왔다. 랭귀지 스쿨이 있는 도시, 내가 생활할 스튜디오까지 데려다주려고, 온 것이다. 전날, 비행기에서 기내식 점심 먹은 이후, 지금껏 24시간 동안이나 옴팡지게 굶은 전후사정을 들은 후, 그가 데려다준 곳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빵빵빵!!! 그중에서도, 푸르스트가 섬세하게 묘사한 빵, 매일 아침 식사로 먹었다는 갓 구워진 빵, 달콤한 버터 향으로 은근히 유혹하며, 반질거리는 크로와상빵에, 유독 군침 돌았다. 그 크로와상만, 큰 봉지에 고봉으로 담은 후, 기분 좋게 계산했다. 차창 밖 고풍스러운 광경에 경탄하며, 게걸스러운 아이처럼, 그 많은 크로와상을 모조리 다 먹어치운 후, 식곤증으로 골아떨어졌다.     

“그만 자고 일어나요. 도착했어요.” 소리에 놀라 뜬 눈으로 들어온, 그림 같은 아담한 건물! 설레는 기대감으로 2개의 거대한 드렁크를 자동차 밖으로 힘차게 끌어내렸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서늘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등줄기가 오싹한 냉기! 죽어라고 들고 다니던, 손.가.방.이. 없.다! “어! 내가 들고 다니던, 작은 손가방이 없어요!” 자동차 시트 뒤까지, 몇 번이나 탈탈 털고 난 후, 손가방이 없다는 현실을 인지한 순간, 망치로 뒤통수 세게 맞은 것 같은 충격, 콰~당!      

글바트로스프랑스호 갑판 위로 수직으로내리 꽂히는 순간이다!      

주저앉았다. 사방은 칠흑처럼 변했고, 호흡은 곤란해졌다.     

그 손가방 안에는, 나의 신원을 보증하는 여권을 필두로, 스튜디오 계약서, 3개월 언어학교 입학허가서, 대학 졸업 및 성적 증명서와 필수적인 다양한 공증 서류들이 들어있다. 그 무엇보다도, 3개월 생활비, 그리고 귀국 비행기 비용 수표들. 나의 생존보증서가!!!      

유학원 직원의 도움으로, 겨우 스튜디오에 입성. 찔끔대는 모습으로, ‘국제미아 신세’라고 징징거리는 목소리로, 돈 가방을 꼭 찾아달라고, 그에게 애걸복걸했다. 파리 소재의 한국대사관과 경찰서에 신고하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성가신 짐짝을 떼어내듯이 나를 남겨두고, 그는 서둘러 떠나갔다. 


난생처음,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더 새벽을 기다리며 뜬 눈으로, 애절한 청원 기도로 지새운 밤이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꺽꺽 울어대다가, 기이한 내 울음소리에 놀랐다. 자세를 바꾸어 침대에 엎딘 채,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베개로 막고, 재차 시작된 기도는 스스로 비하하는 질책에서, 점점 뻔뻔스러워지고, 드디어 온갖 공허한 공약들을 겁 없이 쏟아냈다. 정치인의 “당선만 시켜준다면~” 대신 “돈 가방만 찾아준다면~”만 다를 뿐!     

쏟아내는 아무 말 쓰나미로, 대리석처럼 매끄럽고 단단했던 나의 겉모습과 옹벽처럼 고집스러운 내벽이 와해되면서, 동시에 무너져 내린 밤이다! 여명 무렵에는, 마치 그분이 가방 분실 책임자인양, 대범한 협상 조건까지 나열하다가, 종국에는 “돈 가방 안 찾아주면, 나 죽어요!”라는 협박까지도!      

긴~밤이 끝나고. 이른 아침! 숙소 밖으로 나가서, 성당을 찾아 헤맸다. 다행인 것은, 미사에 참석할 수 있는 일요일이라는 사실. 다행이지 않은 것은, 건물들 전부, 성당처럼 보이는 것과 거리엔 아무도 없다는 사실. 비상사태의 내 처지와 무관한 프랑스인들의 한가한 주말이었다, 그날은!       

새벽, 유유히 흐르는 넓은 강의 긴 다리 위를,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도대체 몇 번이나 오고 갔는지 모른다. 그만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던 순간, 마치 구세주처럼 다가온 여인의 도움으로, 겨우 미사에 참석했다. 미사 끝날 때까지, 반 협박성 음조로 끊임없이 중얼댔다!     

그 일요일 새벽, 나에게 손을 내민 그녀, 강변 카페 주인의 회상이다. “뭘 찾느냐?” 묻자, ‘Church(영어)’로 대답했단다, ‘불어(Eglise)’ 대신. 옛 고성이 즐비한 고풍스러운 도시, 품격 있는 고급 불어에 어깨 힘주는 거리에서, 눈치 없는 글바트로스가 뒤뚱대는 영어로, 프랑스호 선장님과 첫 대면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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