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지지 않는 이별
세 번째 유산, 익숙해지지 않을 이별에 대해서
일주일 전 피검사로 임신수치 60을 확인하고 원래대로라면 내일모레 피검사를 하러 가기로 예약했었다.
1차 검사에서 임신수치이고 수정은 된 상태인데 아직 초기라 착상이 되지 않은 것 같다고 더블링 되지 않으면 유산이거나 자궁 외 임신일 수 있다고 했다.
체온은 내내 37도였는데 매일 아침 한 임테기가 점점 눈에 띄게 흐려지고 있었고,
내가 느꼈던 임신 초기증상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잘못된 게 맞는구나.. 잘못된 거구나..
이번에도 안된 거구나..
낮은 임신수치를 확인하고, 또다시 지난번처럼 더 진해지지 않다가 흐려지는 임테기를 보는 과정은 더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처음은 아니라서인지, 지난번 유산들에서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인지 상처받지 않겠다는 몸부림으로 처음엔 울지도 않고 그저 받아들였다.
그냥 덤덤하게 벌써 2주는 늦어진 생리가 언제 다시 시작될지 기다리는 수밖에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직전에 화학적 유산을 겪어서인지 이 과정을 미리 알아서인지 그때와 같은 수순을 거치면서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지난주 병원을 다녀와서 남편과 함께 며칠간 세포를 응원했었다. 세포가 자리를 잘 잡아야 한다며 며칠 두유, 싫어하는 두부나 고기만 먹고 최대한 내 작은 세포를 지키려 했다.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세포가 잘못되면 어쩌지?" 하며 초조해할 때마다 남편은 "잘못되면 다시 가지면 되지, 아직 젊으니까 쉬면서 준비하면 생길 거야" 하면서 또다시 유산을 겪으면 힘들어할 나를 부단히 위로했었다.
벌써 5개월간 세 번의 유산을 겪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세 번의 유산을 겪은 사람도 흔치는 않을 거다.
12월, 10주 계류유산으로 소파술을 한 이후로 금방 생길 것 같은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첫 번째 아기의 심장이 멈췄던 10주.. 그때부터 나도 늘 살아있지만 죽은 상태였다.
여름이면 그때의 아기가 무사히 자랐더라면 곧 태어날 시기여서 나는 여름이 될수록 더 괴로웠다.
매일 자책했다. 임신하고서도 초기까지 야간근무를 계속했던 나를 탓했고 아기의 심장이 멈추기 직전의 진료에서 입원하라고 했을 때 근무표가 나오지 않을까 봐 눈치 보여서 거절하고 계속 일을 하면서 좀 더 일찍 퇴사하지 않은 내가 항상 원망스러웠다.
유산 이후에 친구들도, 가족들도 모두 나를 감싸주고 위로해 주려 노력했지만 나는 괜찮아지지 않았다.
나 역시도 괜찮아지려 발버둥 쳤지만 괜찮아질 수 없었다.
친구를 만나거나 가족들을 만나 웃어도 혼자 있을 때 자주 괴로워했고 울었다.
특히 혼자 운전을 할 때면 거의 매번 울었다.
오열하다가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소리 내어 울다가 진정되면 다시 출발하는 게 언제부턴가 당연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내가 왜 우는지도 모르는 채로 우는 게 당연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항상 슬퍼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될수록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쳤다.
난임병원에라도 가볼까 싶은데 내가 사는 곳은 분만취약지이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제일 가까운 산부인과를 가려면 한 시간 반을 구불거리는 산을 넘어 운전을 해야 한다.
임신을 하더라도 나 혼자 매주 세 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것도 걱정이고, 이런 오지에서 나 혼자 유산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너무 무기력하다.
남편은 다음 주까지 바빠서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전에 얼른 늦은 생리가 시작되길 바란다.
이렇게 무덤덤한 척 해도 사실은 너무 슬프다.
난 괜찮다고 최면을 걸어왔는데,
아까 머리를 말리면서도 울고 설거지를 하다 말고 주저앉아 울고 청소기를 돌리다 말고 청소기를 내팽개친 채 바닥을 기어 다니며 울었다.
한바탕 울고 나면 또 멀쩡하게 일어나 적막 속에 멍하니 앉아있길 반복한다.
오히려 조용할 땐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 혼자 이 산골의 적막한 집에 혼자 있다 보면 미칠 것 같다. 계속 나 혼자 울면 안 된다고 하면서, 지금 울면 이 울음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애써 울음을 참았다.
그러다 시끄러운 소음이 함께할 때면 그 시간 동안은 늘 울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울고 싶었다.
난 이번에도 해낼 수 없었다고..
이젠 자신이 없다고..
혼자 되뇌다가 문득 다음 주 긴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에게 이 과정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 너무 혼란스러웠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내가 잘못했다고 해야 할지,
그냥 아기를 갖지 말자고 해야 할지...
어떻게 반응을 할지도 모르겠고 이미 이전의 유산들로 남편도 충분히 울고 힘들어한 탓에 다시 짐을 지게 하기도 싫었다.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도, 내가 사랑했지만 임신을 위해 포기한 내 직업도 모든 게 원망스럽고 마음이 아프다.
병원을 다닐 때 교대근무를 하면서 한 번에 임신이 잘되는 선생님도 있었지만 뜻하지 않게 몇 달 동안 시도해도 생기지 않는 선생님도 많이 봤다.
그게 내가 되어서 이젠 퇴사를 선택하고 임신준비를 하는데 자꾸 실패하니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
당장 마음도 너무 힘들지만 이번에도 한참은 늦어진 생리가 엄청난 통증과 많은 양의 피를 몰고 올 생각을 하면 벌써 괴롭다.
생리를 하는 동안 내가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 남편에게 내 모습을 보이기 싫다.
차라리 다음 주까지 집에 못 들어오는 게 다행이다.. 싶다.
그 시간은 나 혼자 온전히 힘들어하고 감당하며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이다.
피검사로 임신수치가 더블링 되는지 보기 위해 병원 예약을 해두긴 했지만 가지 않을 거다.
가봐야 정상적인 임신 수치도 아닐 거고, 가서 우는 것밖에 달리 할 게 없을 것 같다.
괜히 가서 상처를 들쑤실 필요는 없다.
아마 나중에 임신인걸 확신할 때까지 난 산부인과를 절대 다신 가지 못할 거다.
결국 이렇게 떠나갈 내 작은 세포가 너무 불쌍하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건강한 세포가 찾아와 줄 거라 생각하면 힘들어도 버틸 수 있다.
지금 임신이 자궁 외 임신이거나 다른 이벤트를 남기지 않고 조용히 늦은 생리로 흘러가버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지금의 세포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지친다.
이 과정들이 반복될수록 나는 버틸 수가 없다.
아직 20대니까 할 수 있다는 다른 사람들의 위로가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든다.
"난 20대인데 왜 자꾸 잘못되는 거지? 대체 뭐가 문제인거지? 순전히 임신준비를 위해서 일도 관두고 시골로 왔는데 그럼 난 앞으로 일도 못하고 애도 갖지 못하고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한 상태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에서 영영 다른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건가 "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마지막은 늘 자책으로 끝난다.
대화할 사람도 없는 이 시골에서 유산의 과정을 겪으면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늘었다.
남편도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 하루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연락조차 되질 않아 대화할 상대도 없는 이곳에서 고작 하루에 한 번 잠깐 밖에 나가 산책을 하는 게 내 유일한 일과였다.
요즘은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임테기의 흐린 줄을 봤을 때부터 나는 내 작은 세포가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에 꼼짝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혼자 내가 망가져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게 너무 괴롭다.
2주 넘게 늦은 생리를 기다리는 마음은 마치 시한폭탄을 기다리는 마음과 같다.
고통의 순간이 점점 가까워질걸 느낀다.
한동안 바다를 보러 가고 싶었는데 작은 세포가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에 장거리운전도 부담되어 선뜻 가지 못했다.
혼자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
내게 잠시 머물렀던 작은 세포에게 잘 가라고 마지막인사는 해줘야겠다.
더 이상 임신에 집착하지 말아야겠다 수없이 다짐해 놓고
오늘 마지막으로 더 희미해진 임테기를 확인하고,
또다시 유산임을 짐작하자마자 오늘 또 배란테스트기를 종류별로 주문하고 엽산을 3개월치 새로 주문했다.
사면서도 비참하고 의욕이 없었다.
임신에 집착하지 말자고 다짐해 놓고 아마 곧 찾아올 생리가 끝나자마자 배테기를 할 거고 또 그렇게 시도하면서 다시 집착하고 망가져갈 것 같다.
대화할 사람도 없고,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는 이 시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