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적 유산을 겪고 한 달 뒤,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또 엄청난 이벤트가 생겼다.
내가 임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불과 5개월 전에 계류유산으로 소파술을 하고, 한 달 전에는 화학적 유산도 겪었다.
화학적 유산이란 게 뭔지도 몰랐던 내게 진해지지 않고 흐려지는 임테기와 뒤늦게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생리는 계류유산만큼이나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많이 피폐해졌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나는 안되는가 보다고, 근데 왜 나는 안되는 거냐고 하면서 점점 생기도 잃고 나를 잃어갔다.
유산 이후로 지나가는 아기나 임산부들을 보면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게 벌써 몇 달째다.
소파술을 하고 한번 생리를 한 이후로 계속 임신을 시도했다. 벌써 5개월이 지났는데 임신은 되질 않고 뜬금없이 생각지도 못했던 화학적 유산까지 겪고 나니 마음이 공허했다.
그래서 이번달은 쉬어가자, 하고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남편과 나 둘 다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해 흔히 말하는 숙제 날짜를 맞추지 못하기도 했고, 이달은 내가 이사하는 달이기도 하고 혼자 살던 생활들을 정리하는 중이라 여러모로 이벤트가 많았다.
화학적 유산을 겪은 직후라 시도하더라도 임신이 당연히 안 될 줄 알았다.
우리가 그다음 달부터 아예 함께 살기 시작해서 남편에게는 그때부터 시도해 보고, 안되면 병원을 다녀보자고 말했다.
남편은 "너도 이십 대고 우리 둘 다 젊은데 안될 리가 없다, 그렇게 초조해하면 될 일도 안된다, 혹시 몰라-우리가 나중에 쌍둥이를 낳게 될 수도 있고 애를 많이 낳게 될 수도 있는 거다. "
하면서 나를 토닥였다.
알겠다고, 집착하지 않겠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늘 집착하고 있었다.
작년 처음 아기 심장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그 작은 생명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직업 특성상 벌써 몇 년 동안 3교대 근무를 하고 살아온 터라 내 직종의 사람들이 특히 난임이 많다고 하는 것도 너무 걱정되고 초조했다.
내가 내 직업을 포기하고 남편을 따라 시골로 가면서 전업주부가 되겠다한 것도 병원 자체가 없는 시골이라 일자리가 없기도 했지만 순전히 임신준비 때문이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가 되는 게 꿈이었고,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을 만난 지 몇 달 만에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따로 없고 그저 처음 만났을 때 지나가는 말처럼 애를 셋은 낳아야 한다는 말이 좋았다.
서로 공통된 목표가 잘 맞아서 결혼을 한 건데, 그 목표를 못 이루면 나는 결혼을 한 의미가 없었다.
남편의 말에 조금의 위로를 얻고 특히 바빴던 이번달을 정신없이 지내던 와중에 이번달에 특히 임신 초기증상 같은 증상들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보통 임신 초기증상은 생리 전증후군과 비슷해서 나는 그전의 임신에서도 "곧 생리를 하는가 보다 " 하고 말았는데 그때와 조금 더 심하게 임신 초기증상들이 있는 거다.
착각인가 생각하기엔 너무 뚜렷했다.
최근 내 일상 글들에 툭하면 "졸려서 갑자기 잤다." "밥을 먹고 갑자기 잠들었다." "몸이 너무 무겁고 피곤하다"라는 문장들이 자주 보이는 것도 모두 임신초기증상이었다.
그래서 혹시 몰라 임테기를 해봤다.
근데 정말 흐리게, 하지만 분명하게 한 줄이 더 보였다.
매직아이인가? 너무 간절해서 헛것을 보나보다- 했는데 또 해봐도 연한 줄이 또다시 나와서 일말의 기대를 했다.
임테기 두줄을 보고도 일찍 가봐야 피검사밖에 달리 할 게 없다는 걸 알기에 너무 궁금했지만 또 실망하고 싶지도 않아서 5주까지 병원에 갈 생각은 없었는데, 착상혈인 듯 한 피도 한번 다량 비췄고 그 이후로 갈색혈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와중에 눈에 띄게 선이 뚜렷해지지 않는 것 같아서 병원을 달려갔다.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새벽엔 지난번 화학적 유산처럼 갑자기 피가 흐르는 악몽을 꾸며 한두 시간 겨우 잠드는 생활을 반복하다가 "너무 이르지만 이러다 불안해 죽어 버릴 것 같으니 병원이라도 가보자" 하고 혼자 울다가 급하게 나와서는 산부인과 앞에서 한 시간을 망설였다.
오랜만에 찾은 산부인과에서.. 손이 떨리고 너무 두려웠다.
한 달 전 생리를 하고 오늘은 인터넷 임신계산기 상으로 4주 1일이었다.
사실 5개월 전 유산을 하고 산부인과는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너무 두려웠다.
수술 직후에 경과를 보러 가야 했지만 아직도 내겐 수술하루뒤 대기실에서 임산부들이 웃던 모습, 아기를 안고 행복해 보이던 모습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병원을 갈 수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언제까지나 아기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었다.
오늘 용기를 낸 건 순전히 지금 내게 찾아왔을지도 모를 아기가 걱정이 되서였다.
오랜만에 병원을 찾아본 내 차트 옆에 이전 아기의 조직검사 결과가 붙어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꾹 참고 결과를 물어보지 않았다.
결과를 물어보는 것도 너무 두려웠다.
주치의를 만나 지난번 수술 이후로 경과를 안 보러 왔는데, 임테기 두줄을 봤다 하니 초음파부터 보자고 했다.
질초음파를 보는데 아기집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역시 너무 이르긴 했다.
그리고 hcg 피검사를 했다.
결과가 나오는 30분이 내겐 어떤 시간보다 길고 불안했다.
대기하는 동안 피검사수치 정상범위를 한참 찾아보다가,
어느새 내 주변에 임산부와 남편들이 많아져 그때부터 이전 트라우마가 떠올라 호흡곤란이 오고 위축되어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간신히 자리를 지키고 가방 속의 임테기를 꼭 쥐고 앉아있었다.
20분 뒤 나온 결과는 60.
마지막 생리 딱 한 달 후의 피검사였으니 내 주수에는 크게 이상한 것도 아니란다.
10 이상이면 임신은 임신이라는데,
60.. 이 작은 수치에 나는 더 불안해졌다.
주치의는 결과에 대해 일단 수정은 된 상태인데..
아직 자궁 속 어딘가를 떠다니고 있다가 착상을 할 시기이거나, 유산이거나, 자궁 외 임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래도 정상임신초기 과정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말을 해주신 덕에 마음은 조금 놓였다.
일주일 뒤 피검사 경과를 보기 위해 예약을 잡고
또다시 집에 와 피검사 결과를 여기저기 찾아봤는데, 대부분이 적어도 100은 넘어있어서 나는 더 불안해졌다.
그래서 남편을 붙들고 하루종일 "괜찮겠지? 잘못되지 않겠지? 근데 내가 본 카페 글에서는 100 이상 이어야 한다는데 잘못되는 거 아닐까?"를 반복하니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은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서 탈이다, 그렇게 걱정하면 될 일도 안된다"라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는 금세 수긍하며 돌아서다가 갑자기 서운해져서
"근데 오빠는 오빠 앤 데 어떻게 그렇게 무심해?" 따져 물었다가 또다시 나를 묘하게 설득시키는 남편의 언변에 조용히 침대로 들어가 체온을 한번 재보니 37.1이었다. 요즘 하루에 몇 번씩 체온을 재면서 37도 이상인 체온계를 보면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지난번 화학적 유산 때 37도 이상 체온이 유지되다가 늦은 생리와 동시에 체온은 36.5 밑으로 뚝떨어졌었다.
체온계를 내려놓고 불안한 마음에 이미 몇 시간을 둘러본 피검사수치를 한참 찾다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심란할 때는 글을 쓰면 한동안은 괜찮다.
이번 임신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나는 모른다.
60이라는 수치가 떨어지던 중의 숫자였는지, 이제부터 더블링 될 숫자이던지 모르지만 결과야 어쨌든 당장은 내게 찾아온 세포가 나는 너무 반갑다.
"유산 후 재임신" 같은 글을 한참 찾아볼 때, 나는 그 블로그의 최신글을 항상 먼저 보곤 했다.
임신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 아기가 무사히 태어났는지.
그 글들 하나하나에 나는 천국도 갔다가 지옥을 갔다가를 반복했다.
확실한 건 나도 정말 엄마가 되고 싶다는 거다.
이 긴 터널 끝에 언젠가 너를 만날 수 있을까?
사실 갈수록 지친다.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기대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이번 임신도 지난달처럼 늦은 생리로 흘러가버리면 나는 이젠 나를 포기하게 될까 봐 두렵다.
내겐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어둡고 무서운 터널의 한가운데인데,
그래도 너를 만날 수 있다면 무서워도 용기 내서 끝까지 걸어볼 거다.
이 길의 끝에 언젠가 너를 꼭 만났으면 좋겠다.
만물이 피어나는 지금, 너도 같이 자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정말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