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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꽃 Sep 26. 2024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혼자 떠난 경주여행

어느덧 가을이 찾아왔고
첫 계류유산을 한 지 일 년이 되어간다.
계속된 유산 이후로 임신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거듭되는 화학적 유산 끝에 난 아직도 임신하지 않은 상태이다.
임신준비를 하며 야간근로가 좋지 않다기에 오래 일했던 간호사로서의 직업도 포기하고,
퇴사 이후 정말 나는 매달 임신에만 골몰하며 살았다.
최선의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임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신을 하려면 더 이상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분만취약지인 강원도 끝자락에 살면서도 온갖 노력을 다 했다.
임신에 도움 된다는 영양제들부터 시작해서 한약도 먹고,
배란테스트기며 임신테스트기를 달마다 몇 박스씩 써댔다.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음에도 유산 이후 일 년이 되도록 여태껏 나만 임신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에 내내 괴로웠다.
오랜만에 어른들을 만나도 내 안부를 묻는 게 아니라
 
‘왜 아직 임신을 하지 않은 거냐’
‘검사는 해봤냐, 누구 문제냐’
‘나는 유산해 본 적도 없는데 유산 한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
‘예전 같으면 애 못 낳으면 소박맞았다’
 
아무렇지 않게 폭력적이기 그지없는 얘기를 한다거나,
내가 가끔 커피라도 마시면


‘ 커피 마시면 애가 까맣게 나온다더라- 커피 마시지 마라 ’


별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늘 당연하게 들으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노력하고있다는 뻔한 대답을 반복했다.
나는 늘 죄인이었다.
유산을 한 것도 내 탓이었고,
그 후로 계속 임신이 되지 않는 것도 내 탓이었고,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임신을 위해 내가 노력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변명이었다.
갈수록 내 마음엔 까맣게 멍이 들어갔다.
내가 왜 아이를 갖고 싶은지,
이게 내 목표가 맞는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에 대한 생각들은 제쳐두고 임신에 대한 집착만 남은 나를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목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표를 쫓고 있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임신이고 뭐고 당장에 살고 싶지가 않았다.
 
 
 
 
이십 대 후반의 나이에 주변에 임신한 사람이 많진 않지만,
최근 주변 친구가 하나둘 임신을 한 소식을 보면 도망치듯 차단을 했다.
그 친구와 어떤 추억을 쌓았건 얼마나 친했건 당장 임신에만 몰두하고 있는 내게 누군가의 임신 소식은 고통 그자체였다.
도망치는 게 정답은 아니지만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타인의 임신 소식은 늘 지겹게도 나를 따라다녔다.
최근에 결혼한 남편의 사촌동생이 나와 동갑인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며 혼전임신이라 경사라며, 장하다며 유산한 나와 비교를 해 댈 때는 그 자리에서 죽고 싶었다.
어른들에게 나는 영락없는 실패자였고,
그들의 배려없는 이야기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나도 나를 실패자라 느끼는 그 순간이 너무 괴로웠다.
사람들도 나를 유산하고 임신도 못하는 사람이라 비난하는데,
나도 나를 죽어도 마땅한 사람이라 늘 비난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내게도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임신에 관한 문제에 골몰하기 전의 나는 늘 밝게 웃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제 그만, 나를 다시 되찾고 싶었다.
다시 내가 나를 찾으려고 했을 땐,
임신 이전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희미해져 있었다.
넋이 나간 채로 툭하면 눈물 바람인 낯선 사람.
핸드폰을 잡고 하루종일 남의 임신 얘기를 찾아보며 피가 날 때까지 손을 뜯으며 자학하는 사람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내가 뭘 하고 싶고 뭘 좋아하는지 어떤 걸 할 때 행복한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임신 외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나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툭툭 뱉는 말보다도 나는 나를 잃은 채 살아가는 내 모습에 더 상처를 받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힘들어서 충동적으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문제에서 도망쳐서 혼자 오래 여행을 왔다.
퇴사 이후에도 나는 임신준비 때문에 제대로 된 여행도 다니지 못했다.
'배란일이라서, 혹시나 임신이 되었을까 봐,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늘 있지도 않은 아기에게 내 모든 일상을 끼워 맞춰왔다.

늘 내 일상에 나는 없었다.

어느순간 내 모습을 잃어버린  망가진 내겐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여행이라기보다 도망에 가깝긴 했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는 여행은 결혼 이후 처음이었다.
강원도 끝자락에서 경주까지 혼자 다섯 시간을 달려 혼자 조용한 술집에서 술도 한 잔 해보고, 그 좋아하는 책방도 다녀보고, 오랜만에 자전거도 타며 경주 시내를 누볐다.
모든 순간이 소중해서 예쁜 풍경 앞에 앉아서는 그곳에 있는 내가 믿기지 않아 그저 눈물만 흘렸다.
‘ 아직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살아서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 ’
나를 다독이면서.
 
 



여행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거나 삶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나는 여행지에서 낯선 타인으로 머무른 그 순간 그저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했고,
내가 이런 상황들 속에서도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고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아기를 가지지 않았어도 나로 행복해지길 원한다.
남에게 맞추기만 하는 삶은 괴롭다.
제일 중요한 건 나 자신이니, 돌아간 자리에선 나 자신에게 최선인 선택들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에 그들만의 잣대를 들이밀고 아기가 없으면 내 삶이 부정당하는 것 같은 폭력적인 말들을 해도,
휘둘리지 않고 언제나 나를 지키며 나를 위한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
이제는 내가 나를 위해서, 조금은 이기적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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