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사는 곳, 화천은 첫눈이 내렸다. 첫눈이 온 것뿐만 아니라 첫눈과 함께 대설주의보도 내리고, 강풍주의보도 내렸다. 살면서 이렇게 요란한 첫눈은 처음이었다. 새벽부터 비가 엄청나게 많이 내렸는데 곧이어 우박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눈으로 바뀌어 내리다가, 눈이 순식간에 쌓였다가 짧긴 하지만 금세 화창한 하늘이 나타나기도 했다. 거센 바람에 하늘의 구름은 지금껏 내가 본 구름 중 제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가 베란다로 돌덩이들을 던지는 것처럼 '투두둑-' 거친 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해가 떴을 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오늘 나는 오전 내내 미뤄왔던 겨울옷들을 꺼내 옷장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베란다 구석에 다시 여름옷들을 넣어두면서 바깥의 우박 소리를 비트 삼아 흥얼거렸다. 첫눈이 오면 이제 여행을 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우울할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우울하진 않았다. 비록 이번에도 혼자, 낯선 곳에서 첫눈을 봤을지라도 첫눈은 '첫눈'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 설레는 법이니까. 그냥 눈이 왔으니 곧 봄이 오겠다, 신나는 마음이 들었을 뿐이다. 아마 조금만 더 버티면 봄이 올 거란 생각에 들뜬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사는 곳은 올해 5월에도 대설주의보가 내렸던 곳이라 다른 곳에 비해 겨울이 유독 길긴 하지만, 그래도 눈이 오고 나면 겨울이 곧 끝날 거라 믿고 싶었다. 눈 사진을 찍어 친정 아빠와 엄마에게 눈이 오는 동네 사진을 보내며 제천은 어떻냐 물으니 화창한 하늘이 답장으로 돌아온다. 여기는 비만 잠깐 왔어~ 눈이 진짜 많이 오네, 감탄하는 말과 함께. 곧 엄마 아빠가 화천으로 놀러 오기로 해서 더 눈이 쌓이기 전에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점심 즈음에는 강풍경보, 대설주의보 문자 알림이 요란하게 울려서 밖을 봤더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과 우박이 내리고 있었다. 설상가상 겨울이 시작되면서 커버를 씌워놓고 타지 않는 남편의 차 커버가 반쯤 벗겨져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펄럭이고 있기에 후다닥 내려가 눈보라를 뚫고 차 커버를 씌우고, 내 차에 쌓여 얼고 있는 눈들도 한번 쓸어냈다. 강원도에서 벌써 두 번째 계절을 맞으며 이미 작년의 겨울을 경험한 나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은은하고 예쁘게 내리는 눈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 내가 바로 강원도의 첫눈이다! '라는 듯 존재감이 엄청난 첫눈이었다.
눈을 보고 신난 강아지처럼 바깥에 서서 눈과 우박을 맞다가 얼굴이 너무 따가워서 금방 들어왔다. 그 와중에 하늘을 향해 있는 내 시선 너머로 까치 한 마리가 비틀비틀 날고 있었다. 아마 까치도 우박을 맞는 게 따갑나 보다, 생각하면서 까치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멀어지는 걸 지켜봤다. 곧이어 까치는 하얀 눈보라 사이로 형태만 간신히 보이더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장 집으로 올라와서도 신기한 마음에 창밖에 손을 내밀어 때때로 우박이기도 하고 눈이기도 한 것들을 만졌다. 시간이 지나자 누가 설탕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소복소복 쌓이기 시작하는 눈들을 보는 게 참 예뻤다.
그렇게 한참을 추위도 잊고 베란다에 서서 눈을 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 과일 트럭 아저씨의 익숙한 확성기 소리가 가까워진다.
' 고구마~양파 한 망에 오천 원~감~ 싸게 팔아요~ 얼른 오세요! '
폭설을 뚫고 산속까지 과일을 팔러 오는 아저씨가 이제는 친한 친구 같고 반갑다. 겨울이 되면 트럭 아저씨도 오지 않는데, 여길 오는 것도 언제가 마지막일까? 문득 궁금했지만 이번에도 나가진 않았다. 아저씨는 악천후에 아무도 과일을 사러 나오질 않아 우리 집 앞에 평소보다 짧게 머물렀다가 다시 떠났다. 나는 베란다에 기대어 아저씨가 떠나는 걸 바라보며 다음에 아저씨가 또 온다면 그때는 말을 걸어봐야지- 생각했다. 그자리에서 한동안 눈이 내리는 걸 지켜보고,
저녁에는 남편을 기다리며 집 앞 놀이터에서 혼자 흰 눈위에 낙서를 하며 놀았다.
첫눈에 대설주의보까지 몰고 온 요란한 화천의 첫눈. 아마 조금 있으면 이 눈이 지긋지긋해지겠지만 그래도 첫눈은 아무리 요란해도 로맨틱하다. 화천에서의 두 번째 겨울의 시작을, 오늘의 요란한 첫눈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