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사건은 살리고 작품과 인물을 특정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않기 위해 작품과 인물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삼갑니다. 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드려 죄송합니다.*
<누구세요?>
아침 7시 버스는 지방으로 출발한다.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방송국으로 출발했다. 나는 일찍 도착해서 혼자 장비를 버스로 옮겨 실을 준비를 하였다. 일찍 일어나고 준비하는 것은 내가 오랜 스텝생활을 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나는 달리기도 못 하고 급하게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을 무척이나 못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 도착해서 팀원을 기다렸다. 붐맨친구와 라인맨동생은 여의도로 오는 출근길이 익숙하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친구와 라인맨 동생은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을 했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부터 내 마음을 불안했다. 현장으로 도착하고 녹음기사가 바뀌었다고 했는다. 사람들은 누가 녹음기사인지 잘 알지 못했다. 촬영이 시작되고 내가 녹음기 앞에 앉으면서 사람들은 저 사람이 녹음기사님이라 판단하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구세요?" 나는 방송국에 얼굴이 많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지겹게 들은 이야기다.
<녹음기사의 첫 촬영>
촬영장에 도착을 했다. 촬영은 강가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나도 사극은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다. 두 배우가 말을 타고 와서 만난 다음 강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그것이 우리 녹음팀의 첫 장면이었다. 나도 긴장을 했지만 붐맨인 친구와 동생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도 잡지 못 하고 있었고 앞으로 닥칠 위기는 나 혼자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정신을 더욱 바짝 차렸다. 붐맨 친구와 라인맨 동생이 적응할 때까지는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을 옆에서 일일이 알려주어야 했다. 나는 숙소로 도착하면 긴장이 풀려서 씻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아직도 그날 이야기는 친구와 나의 안주거리다. 그날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이후에는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기를 더 정확히 기록했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든다.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있다. “1,2회차 나는 친구를 붐맨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친구와 동생은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나는 만족하고 있다. 다만 밥값과 술값이 너무 많이 나간다는 생각은 조금 있다. 하지만 친구와 동생은 그 이상에 것들을 부응해 준다.“ 아마 촬영이 끝나고도 나는 그들을 숙소 내 방으로 불러서 맛있는 안주와 술을 먹이며 위로하고 응원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촬영이 끝나면 일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았다. 잠시 잊어야 또 다음 촬영을 준비할 힘이 생긴다. 하지만 위기는 3일 차에 있었다.
<사운드의 문제>
촬영 전에 비씬이 있는 것을 알고 나는 철저히 준비를 했다. 하지만 비씬 촬영에 들어가고 마이크에 빗물이 닿으면서 내가 준비한 것들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좋지 않은 녹음파일들이 쌓이면서 혼자 애가 탔다. 다행이면 다행인 게 그날은 해가 지면서 모든 촬영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촬영을 마치고 나는 혼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나는 숙소로 돌아왔지만 촬영을 한 비씬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애써 잊어버리고 다음 회차를 준비했다. 그리고 정말 큰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촬영장에는 보통 카메라가 2대 움직인다. 흔히 A, B 카메라라고 부른다. 2개의 카메라는 서로 다른 사이즈의 앵글을 잡아서 결과물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다만 2개의 앵글 크기가 너무 차이가 나면 조명은 물론이고 녹음도 어려움을 겪는다. 드라마란 촬영 혼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파트를 이해하고 같이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 다만 처음에 나는 이 작업이 익숙하지 못했다. 나도 녹음기사로의 능력이 부족했지만 붐맨 친구도 아직 자신의 위치를 잘 잡지 못 했다. 그런 경우 내가 마이크의 위치를 잡아주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런 다음 급하게 녹음기 앞으로 돌아와서 내 일을 해야 했다. 나는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B카메라의 앵글을 잘 확인하지 못했다. A카메라는 넓은 앵글을 잡았고 B카메라는 아주 타이트한 인물을 잡았다. 때문에 아주 작은 소리가 녹음이 되었다. 편집실에서 녹음파일의 문제를 확인하고 곧 연락이 왔다. "편집본을 확인하면서 사운드에 문제가 있으니 서울로 올라오면 편집실로 오라"는 것이다..
<편집실에 끌려가다>
촬영을 할 때는 분명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는데 편집실의 연락을 받고 난 후부터는 서울로 올라가고 싶지가 않았다. 다른 스텝들은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피로감에 잠이 들었다. 여기저기 스텝들 코를 고는 소리가 버스 안에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집으로 도착하고 새벽 3시가 넘어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약속시간 전에 일어나 일찍 여의도로 향했다.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나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나는 편집실에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편집실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일단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방송국 앞에 있는 순댓국집에서 밥을 든든하게 먹고 방송국입구로 가서 편집보조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편집보조분이 내려와 나를 편집실로 안내했다. 편집실로 들어가고 곧 나는 편집감독님을 마주했다. 편집감독님은 오랫동안 편집을 해온 배테랑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짝꿍이랑 손잡고 교과서를 받을 때 그분은 이미 편집감독이었다. 앞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두 손이 모아졌다. 나는 어떠한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편집감독님은 모진 말들을 뱉어냈다. 편집감독님의 표현은 단호했다. "도저히 편집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이건 방송사고다.” “너 때문에 도저히 편집이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 너무 괴로웠기 때문에 오히려 편집감독님의 말들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사운드에 문제 있음을 그 자리에서 연출 감독님께 전화로 알려드렸다. 연출 감독님은 길게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게 해 달라는 당부를 남길뿐이었다. 이건 어떠한 사죄를 드려도 할 말이 없는 부분이었다. 상황이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재촬영을 할 것이고 아니면 후시녹음을 해야 했다. 일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이 사고로 나는 일에서 잘리게 될 확률이 컸다. 하지만 그건 그때 일이고 일단은 내가 하는 데까지는 더욱 철저하게 촬영을 준비해야 했다. 나는 다시 출장을 내려가기 전까지 촬영만큼 바쁘게 움직였다. 촬영장에 도착해서는 죄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스스로 너무 힘든 순간에 나에게 가장 도움을 많이 준 것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였다. 조금 더 나아갈 수 없을 때 그냥 버티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산티아고 할아버지처럼 낚싯줄을 놓아주지 않고 그냥 버티는 것뿐이었다. 오히려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면 당장 편해질 텐데 하는 약한 생각마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세트촬영에서 나를 드라마에 들어오게 해 준 몬스터피디형이 방문을 했다. 나는 쉬는 시간 몬스터피디형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말들이 많다. 마이크도 많이 화면에 걸리고 결과물도 좋지가 않다." 나는 솔직하게 지금의 상황을 피디님에게 알려주었다. 피디님은 나에게 당부를 했다.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나를 자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 나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는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나 스스로 나에 대한 믿음의 불씨가 꺼져갈 때 누군가 이렇게 믿어주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나는 동시녹음 기사로 책임감을 다시 느낄 수가 있었다. 물론 이 사건 이후에도 녹음을 하면서 어려운 상황은 셀 수 없이 일어났다. 하지만 현장에서 문제라는 것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냐다, 물론 방송에 지장을 줄 만큼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 일어난 사고만큼 힘든 것도 없었다. 쉬는 날에는 다음 촬영을 더 철저히 준비했고 녹음에 대한 공부도 부지런히 했다.
<방영일>
촬영이 어느 정도 지나고 첫 방영일이 다가왔다. 나는 솔직히 드라마를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성적표를 열어보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감정이지만 시험을 못 본 것을 본인이 알고 있는데 성적표를 받아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드라마가 시작이 되고 곧 내 이름이 나왔다. 그 순간 벅차기도 했고 부끄러움도 느낄 수가 있었다. 집에서는 형이 캡처를 해서 가족 채팅방에 올렸다. 가족들도 본방을 보고 다들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부모님들이야 아무리 많은 영화를 찍든지 상관없이 TV에 나오는 게 최고였다. 신기하게도 부모님은 내가 가는 길에 대해서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았다. 녹음기사가 된다는 것은 너무 힘들기도 했지만 정말 값진 일이었다. 나는 더욱 열심히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녹음한 결과물을 방송에서 들어보는 것은 도움이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녹음을 하면 좋을지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하였다. 촬영이 거듭날수록 친구는 점점 붐맨의 모습을 갖추어 갔고 나도 녹음기사가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