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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녹음기사의 보람 (3/3)

by 녹음노동자 Mar 12. 2025

*최대한 사건은 살리고 작품과 인물을 특정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않기 위해 작품과 인물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삼갑니다. 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드려 죄송합니다.*


<녹음기사의 일기장, 사운드 어떡하죠>

이틀간의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날이다. 하지만 정말 쉽지 않은 촬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실제 촬영은 더 어렵게 흘러갔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배우 동선도 쉽지 않고 무선장비 상태도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 판단력이 좋지 않았다. 촬영은 길어져서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머리는 너무 복잡하였다. 어떻게 녹음을 해야 할지 도무지 답이 없었다. 녹음이 재미있어지려던 참이었는데 너무 큰 시련을 마주하였다. 마지막 씬은 동시녹음을 쓸 수 있는지 내가 녹음을 하고도 의문이 들었다. 시간은 지나 촬영은 종료되었다. 촬영이 끝나고 감독님은 애를 쓴 나에게 다가와 수고했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배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잘되는 날이 있으면 안 되는 날들이 있기 마련이다." 버스에 탑승한 나는 조금의 기력도 없어 그대로 자리에 찌그러져 잠이 들었다. 수원 세트장 앞으로 도착하니 곧 동이 틀 시간이 되어있었다. 버스가 도착하였는데 스텝들은 잠에 취해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힘겹게 방으로 들어가 배터리 충전을 물리고 다시 잠에 들었다. 내가 버틸 때까지 버텨야 한다.


<세무사 이야기2>

 나는 전에 세무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전에는 수입이 없었는데 지금은 조금 수입이 생겨서 당당하게 세무사로 들어갔다. 물론 덥수룩한 수염과 밑창이 모두 달아서 무늬가 없어진 크록스를 끌고 말이다. "안녕하세요" 세무사분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누추한 모습에도 세무사분은 내가 상담실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나는 전에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도무지 깔끔한 옷을 입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하고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동안 사업자등록증도 만들고 수입도 조금 생겼다고 세무사에게 설명을 했다. 세무사분은 잠깐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자리를 비웠다. "사장님, 확인하고 왔습니다" "사장님?" 나는 혼자 앉아 있는데 뒤돌아 볼 뻔했다. "저요?" 다행히 이번에는 전처럼 나의 무능함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항상 친절한 세무사에 감사하다.  


<이젠 걱정 한 해도 되겠다>

세트촬영이었다. 녹음을 하고 있는데 몬스터 피디형이 옆에 앉았다. 몬스터 형은 간단한 씬에 컷을 너무 많다고 답답해했다. 내가 붐맨 때도 우리는 촬영현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제작팀에게 있어서 시간은 곧 돈이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30분?"  몬스터형은 오랫동안 내 자리 옆에 앉아 있었다. 친한 형이고 옆에 있으면 참 재미있는 형이지만 직장에서는 피디니까  "왜 집에 안 가는 거야?"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 촬영은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촬영을 마쳤다. 피디님은 나에 대해서 걱정했는데 "이젠 걱정 안 해도 되겠다"며 서울로 향했다. 나는 그대로 인 것 같은데 형의 눈에는 뭐가 달라 보였을까. 


<좋은 연기>

촬영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배우들을 참 많이 본다. 배우들은 가끔 내가 일하는 녹음기 옆으로 와서 발음이 어땠는지 연기가 어땠는지 물어본다. 나는 스텝으로 일을 하면서 기술적인 부분에서 고민을 했지 연기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좋은 연기가 뭐지? 그래도 답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평소에 대본을 보고 열심히 하는 배우에게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굉장히 좋았습니다." 응원을 한다. 하지만 배우는 내 말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자신의 연기가 어땠는지 다시 물어본다. 나는 다음부터 조금 정확한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 생각했다. 좋은 연기란 무엇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연기자분이 쓴 책을 보며 공부했다. 한 책에서 좋은 연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보면 안다" "뭐야 이 사람 잘 모르는데 괜히 아는 척하려고 이런 이야기하는 것 아니야?" 속으로 의심이 들었다. 


<녹음기사의 보람>

 언젠가 방송에서 윤여정 선생님이 말했듯이 대사를 틀리는 배우는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종종 대사를 버벅거리거나 감정 없이 국어책 읽어가듯이 대사를 하는 배우들이 있다. 준비가 되지 않는 사람. 반대로 가끔은 이런 배우들도 있다. 자신의 대본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 그런 배우들을 만나면 사실 나도 긴장하게 된다. 행여나 내가 그들의 대사를 녹음하는 것에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지 않을까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배우 주변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있으면 주의를 준다. 특히 붐맨 친구는 스텝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많은 주의를 주었다. 드라마에는 주인공의 아내로 나오는 여자배우가 있다. 나는 특별히 그 배우에 대한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실제로 만나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배우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정말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스텝을 위해서 커피차를 부르기도 하고 간식을 많이 나눠주기도 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인간적이라고 느낀 것은 절대 아니다. 그 배우는 바로 촬영을 하지 않거나 늦어지는 경우도 웃으며 항상 스텝을 배려하였다. 그리고 배우는 대본을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좋았다. 그 분과 작업을 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드라마는 점점 극이 후반에 들어가고 여배우는 극 중에서 닫힌 문 너머에 있는 남편을 향해 절규하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배우를 위해서 조금도 실수하고 싶지 않았고 완전한 감정의 소리를 녹음하고 싶었다. 나는 다시 한번 내 팀원들에게 배우 주변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주의를 주었다. 나도 녹음기 앞에 앉아서 세팅이 잘 못 된 것은 없는지 몇 번이고 체크를 했다. 목소리의 톤이 일정하면 어려울 것이 없지만 이런 씬에서의 감정이란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녹음의 실수로 컷을 다시 촬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곧 배우는 도착하고 카메라 앞에 앉았다. 다들 바쁘게 움직였다. 배우는 큐싸인을 기다리며 감정에 집중하고 있었다. 배우가 원하는 타이밍에 슛이 들어가는 게 최고였다. 배우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듯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촬영과 조명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도무지 슛이 들어가지 않자 내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촬영, 조명이 준비를 마치고 감독의 슛 사인이 나왔다. 여배우는 울음이 섞인 대사를 절규하며 뱉어 냈다. 소리가 작을 때는 좀 더 키우기도 하고 클 때는 줄여야 했다. 배우분의 처절한 울음소리에 나도 마음이 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배우는 준비한 연기를 끝나고 모니터에서 감독의 "컷!!" 하고 외쳤다. 나도 긴장이 풀려서 참고 있는 숨을 뱉었다. 배우의 연기를 완전히 기술로 담아내지 못한다면 나 스스로 너무 속이 상할 것 같았다. 다행히 녹음된 소리는 아주 좋았다. 그녀는 훌륭한 배우였다. 나중에 방영이 되고 댓글에 사람들이 그녀의 연기를 칭찬했다. "보면 안다"라고 말했던 책이 완전한 헛소리는 아니었다.  "참 좋은 연기였다"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보면 그때의 긴장감을 느낄 수가 있다. 이런 게 녹음기사의 보람이 아닐까 싶다.


<드라마의 마지막 촬영>

 드라마에 어느새 마지막 촬영날이 다가왔다. 여름에 시작해서 추운 겨울이 되어 우리의 드라마는 끝이 났다. 스텝들은 쉬는 시간이 있으면 평소 좋아했던 배우들과 사진을 찍으면서 추억을 남겼다. 나는 평소 이런 일을 잘하지 못한다. 이유는 단지 부끄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 여자배우분과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 다가갔다. 사실은 다들 찍고 있는 분위기여서 용기를 내기 쉬웠다. 배우분은 다정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어 주셨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평소 질리도록 하는 촬영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점점 촬영은 막바지로 다가갔다. 녹음을 하는 중에 누군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아!" 돌아보니 몬스터 형이 있었다. "야 장비 좋아졌다." 형은 농담을 던지고 장난을 쳤다. 그리고 고생이 많았다는 말과 함께 꽃을 받았다. 누구보다 나를 믿어준 피디님이고 감사한 형이다. 형의 믿음 덕분에 마지막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 할 수가 있었다. 마지막씬 "이런 날이 오는구나" 곧 헤어져야 할 사람의 손을 잡고 있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 컷 "오케이" 하는 순간 다들 너무 조용했다. 고요함이 조금 길게 느껴질때 조감독의 무전이 들렸다. “제군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환호하기 시작했다. 끝이 났다. 나는 마지막 데이터를 넘기고 감독님들과 스텝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장비를 정리하고 버스로 돌아가는 길목길목마다 촬영했던 씬들이 생각났다. 맞아 저기서 어떤 장면을 찍었지.. 저기서는 어떤 장면을 찍었는데... 항상 내 옆자리에 타는 스크립터는 버스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너무 고생이 많았다. 누구보다 뜨거운 눈물을 흘릴만한 자격이 있다. 나는 작품을 마친 것에 대한 만족감도 있었지만 결과물에 대해서는 역시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또 다시 나에게 기회가 온다면 그땐 정말 멋진 녹음을 해야겠다." 나의 첫 드라마는 끝이 났다. 나는 몇 편의 단편영화, 장편영화, 그리고 웹드라마를 녹음한 적이 있었지만 이 작품을 마치면서 나는 녹음기사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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