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자-네트워크
작품명: 운전자의 절규
제작 시기: 저녁 퇴근 시간
재료: 교통체증, 움직이지 않는 차 안 운전자의 소리 없는 절규, 행위자-네트워크
설명: 붉은 하늘과 헤드라이트 불빛의 강렬한 색채로 퇴근 시간 교통체증으로 마비된 도로 위 운전자의 절망감을 표현했다.
'이동과 리듬' 전시실의 세 번째 작품은 <운전자의 절규>입니다. 직장인들에게 퇴근은 참 신나는 일입니다. 물론 차를 타기 전까지만요. 대부분 근무 시간이 아침 9시에서 오후 6시까지라서 집으로 향하는 시간이 비슷합니다. 사람이 많긴 하지만 지하철이 막힐 리는 없고, 버스도 전용 차선이 있어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닙니다만 자차로 퇴근하는 사람들은 어둠이 슬슬 내리깔리는 퇴근 시간을 환하게 밝히는 헤드라이트 강물에 "집에 언제 가지" 절망감이 올라옵니다.
이런 교통체증 속에 멈춰 서 있을 때면 헷갈립니다. '내가 차인가, 차가 나인가'. 분명 내 의지로 엑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운전대를 돌리지만, 동맥경화처럼 자동차로 꽉 막힌 도로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우리의 움직임을 제한합니다. 이미 자동차와 우리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가 되어,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서는 운전하는 내가 본체인지 달리는 차가 본체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시에 보이는 자동차 행렬 속에서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인과 자동차의 관계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운전자의 절규>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오늘날 자동차는 도시의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 되었습니다. 6.25 전쟁 휴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55년에 국내에서 최초로 자동차가 생산되었는데요, 그 이름하야 '시발(始發)' 자동차입니다. 어감이 뭔가 좋지는 않지만, 뜻 자체는 지금의 제네시스(Genesis, 창세)와 일맥상통하네요.
이후 국내 자동차 산업의 발전과 경제 호황, 그리고 도로 인프라의 구축이 맞물리면서 80년대 후반부터 '마이카 붐'이 일어났습니다. 1990년 300만 여 대였던 국내 자가용 수는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999년에 1천 만대, 2016년에는 2천만 대를 넘어섰습니다. 2024년 기준 국내 자가용 수는 2천6백만 대 정도이니, 우리나라 인구를 대략 5천만 명으로 잡으면 2명 당 차 한 대씩은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자동차가 대중화되면서 우리 사회에 자동차는 각 가정에 적어도 한 대씩은 꼭 있어야 하는 '반려 기계'로 자리 잡았습니다. 마치 차에 생명이라도 있는 듯이 차를 애지중지 쓸고 닦고 아끼면서, 어디 작은 흠집 하나라도 나면 가슴이 찢어지는 우리 모습이 떠오르지 않으신가요?
현대 사회에 등장한 자동차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큰 틀을 바꿔왔습니다. 과거에 도시의 면적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대략 반경 2.5km였죠. 그런데 내 발을 대신해 주는 자동차 덕분에 이동 거리가 획기적으로 늘어나면서 도시의 경계는 점점 더 넓어졌습니다. 또한, 강변북로나 올림픽대로 같은 고속화 도로는 중심도시 주변에 택지 위주의 신도시가 들어설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멀리서 차를 타고 중심도시로 출퇴근하는 것이 일상이 되다 보니, 이제 '직주근접'이라는 말도 무색해진 것 같습니다.
날씨에 영향을 받는 걷기나, 특정 시간에 맞춰 낯선 사람들과 함께 타야만 하는 대중교통과 같은 애로사항이 없는 자동차는 곧 '자유로운 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자동차 CF에서 쭉 뻗은 길을 시원하게 달리는 자동차의 이미지와 '자유를 향해 달리다' 이런 느낌의 슬로건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도시에서 자동차의 자유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도시에는 언제든지 차를 멈춰 세울 수 있는 신호와 "이 선 넘으면 침범이야" 명확하게 말하는 차선이 있습니다. 게다가 도시의 연식이 오래되면서 도로가 수용할 수 있는 교통량이 한계를 넘어섰는데, 차는 점점 많아지니 교통체증이 발생하기 십상입니다. 차들끼리 엉키고 설키면서 '빵빵' 클락션 소리까지 울려 퍼지면 도시의 풍경 완성입니다.
분명 운전자는 언제 어디를 갈 것인가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일단 차에 탑승하면 땅에 두 발을 딛고 있을 때와 달리 교통법규와 신호, 도로, 다른 차, 심지어 내비게이션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운전이라는 행위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인간과 기계, 제도, 시설, 기술 등 여러 가지 것들의 결합인 셈이죠. 따라서 도시의 교통체증은 인간과 '비인간'의 절묘한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인간만을 주체적인 행위자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자동차와 관련된 모든 것, 예를 들면 자동차 사고, 교통체증, 주차난, 과속 등은 다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입니다. 사회학자 부르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는 바로 여기에 의문을 던집니다. "진짜 인간만이 우리 사회의 유일한 행위자일까?"
그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란 인간들 뿐만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사물, 기술, 제도, 자연, 동물 등)이 함께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거대한 연결망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만이 사회의 행위자인 것이 아니라 비인간도 행위자라는 것이죠! 이런 관점을 기반으로 라투르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인간이 아닌 것도 행위자라니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행위'의 범위가 좁기 때문인데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서 행위는 쉽게 말해 관계망 내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주 직관적인 예시를 먼저 말씀드릴게요. 삼국지의 관우가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로 적장을 베었을 때, 단순히 관우만 행위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적토마나 청룡언월도가 없었으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즉, 행위자-네트워크의 관점에서는 "누가 적장을 벤 행위자인가?"라는 질문에 "관우라는 인간, 적토마라는 동물, 청룡언월도라는 사물의 결합이 베었다"라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생물학 실험실에서는 연구자와 실험도구, 실험실, 세균 등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과학적인 사실을 만들어 내고, 일상에서는 자동문이 한 손에 짐을 들고, 카톡을 확인하면서도 다른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균도 자동문도 모두 행위자인 것입니다. 라투르는 단순히 행위자가 인간인지 비인간인지 구분하는 것보다도 그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하는지, 그 관계 속에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지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앞서 얘기했듯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교통신호 체계, 도로 인프라, 다른 차량, 내비게이션 모두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에 연합된 행위자들입니다. 이 네트워크에서 갑자기 끼어든 앞차에 대한 분노는 클락션으로, 양보해 준 차량에 대한 고마움은 비상등으로 표현되고, 운전자는 최적의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맞춰 핸들을 움직이고, 속도 제한과 신호등에 따라 엑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습니다. 자동차와 사람의 합체는 분명 보행자나 대중교통 이용자와는 다른 새로운 행동 패턴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자 간의 상호작용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네트워크 내에 수많은 행위자가 결합되어 있다는 의식조차 없을 때가 있는데, 이런 상태를 라투르는 블랙박스(black box)라고 불렀습니다. 즉,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 다른 행위자가 안정적인 관계로 자리 잡으면서 당연한 일상의 관행처럼 여겨지는 것이죠.
우리 도시는 자동차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블랙박스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태초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이동 방식인 보행은 오늘날 자동차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건널목 신호를 기다려야 합니다. 보도를 걷다가도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 차량에 의해 섰다 멈췄다를 반복합니다. 거기에 불법주정차로 인해 시야기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교통사고의 위험이 늘기도 했죠.
이런 자동차 중심의 도시가 돌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행위자들은 점점 더 늘어납니다. 자동차의 폭발적인 증가로 현존하는 도로가 교통량을 수용하지 못하자, 도로를 넓히고 더 많이 만들자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와 마틴 모그리지(Martin Mogridge)가 세운 루이스-모그리지 명제(Lewis-Mogridge position)에 따르면, 도로가 많아질수록 그만큼 교통수요가 증가하여 교통체증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로를 더 많이 깔아봤자 새 도로도 어차피 막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밤가시마을은 '밤리단길'이라는 이름의 핫플레이스로 유명해지면서 불법주정차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이런 불법주정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 어린이공원을 주차장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는데요, 그렇게 하면 정말 불법주정차가 사라질까요? 뛰놀 공간이 사라져서 애꿎은 아이들만 피해를 볼까 걱정입니다. 자동차가 주인공인 사회는 더 많은 자동차를 도시로 불러들이기 마련입니다.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고, 기술이 고도화되며, 자동차를 위한 행위자-네트워크는 점점 더 견고해지고 넓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자동차를 타지 않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는 점점 약해지고 줄어갑니다. 도시에 사는 이상 아무리 차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결국 두 발을 땅에 딩어야만 하는 우리 인간은 차에서 내릴 때에서야 자동차 네트워크가 만든 블랙박스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차 앞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보행자가 답답하게 보이던 사람도 차에서 내리면, 내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고 클락션을 울리는 차에 불안감을 느낄 것입니다. 역지사지라는 옛말이 틀린 게 없습니다.
퇴근길, 운전대를 잡은 운전자는 교통체증 속에서 하염없이 차창 너머를 바라봅니다. 차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다리는 것 말고는 운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운전하는' 게 아니라 '운전되는' 양상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운전자의 절규>는 도시의 견고한 자동차 네트워크 안에서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는 운전자의 소리 없는 절규를 새빨간 하늘과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차량의 대수가 늘어날수록 그 절규 또한 커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고된 하루를 마친 여러분 모두 부디 안전하게 귀가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행위자들의 유형 간 구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누가 행위하는지, 누가 중요하며 무엇을 원하는지를 끊임없이 다시 협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힘의 원천과 새로운 정당성의 원천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것들은 이전까지 정치적 공간을 구성해 왔던 코드들로는 환원될 수 없다.
- 부르노 라투르, 《프랑스의 파스퇴르화》, 1993 -
부르노 라투르는 사회를 인간들만의 관계망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얽혀 만들어내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보며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초석을 마련했다. 그는 의지와 의식을 가진 인간만을 행위자로 간주하던 기존 인문사회과학의 시각을 넘어, 사물과 기술, 제도, 자연, 동물 등 비인간적인 존재들 역시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행위자로 재정의했다. 즉, 이들은 더 이상 인간의 도구나 배경이 아니라, 세상을 함께 움직이는 동반자로 이해된다. 라투르는 이러한 인간과 비인간의 연합 속에서 '누가 행위자인가' 명확히 구분하는 것보다 '무엇이 함께 작동하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가'에 주목했다. 다시 말해,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인간과 비인간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세상을 구성하는 과정을 탐색하는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