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 29일, 대한민국과 덴마크의 2004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전. 사상 초유의 2차 연장전까지 치르는 대접전이 펼쳐졌다. 34-34. 두 번에 걸친 연장전으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두 팀은 결국 승부던지기에 돌입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최고의 명승부로 꼽힌 한국과 덴마크의 여자핸드볼 결승전
30대 노장 선수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대표팀은 2차 연장전까지 치르며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다. 올림픽 내내 맹활약을 한 임오경과 문필희의 혼신을 다한 슛은 덴마크 골키퍼의 다리에 걸렸고, 덴마크 4번째 슈터 로엔데 헨리테의 볼이 네트에 꽂혔다. 2-4. 100분 넘게 이어지며 19번의 동점과 역전을 거듭하던,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아테네 올림픽> 최고의 명승부는 거짓말처럼 이렇게 끝이 났다. 덴마크 선수들은 환호하며 코트로 몰려나왔고 우리 선수들은 그 자리에 쓰러져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아름다운 패배가 무엇인지 가르쳐 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아테네 올림픽> 여자핸드볼 결승전 승부던지기에서 2-4로 패배한 후 눈물을 흘리는 한국 대표팀
한국 여자핸드볼, 전설의 시작
1984년 <LA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은 중국에게 패배, 본선 진출에 실패한다. 핸드볼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유럽과는 달리 아시아의 핸드볼 수준은 많이 떨어졌었던 까닭에 아시아에 주어진 올림픽 본선 티켓이 단 1장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행운이 찾아왔다. 대표팀은 4년 전 <모스크바 올림픽> 본선 진출권을 얻었지만,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 표시로 미국과 서방세계가 행한 올림픽 보이콧에 한국 정부가 동참하면서 올림픽에 나가지 못했었는데, 이번엔 거꾸로 본선 티켓을 따낸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이 <LA 올림픽>에 불참을 선언하면서 대신 본선 진출권을 얻게 된 것이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하는 서방세계를 그린 만평. 소련과 공산진영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LA 올림픽>을 불참한다.
이로써 84년 <LA 올림픽> 여자핸드볼은 개최국 미국과 유럽의 3개국(오스트리아, 서독, 유고슬라비아)과 중국과 한국 등 6개국이 본선에서 겨루게 되었는데 아시아 예선도 통과하지 못했던 한국은 유럽강호들을 상대로 예상 밖의 선전을 거듭하며 3승 1무 1패를 기록, 5전 전승의 유고슬라비아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하는 대이변을 일으킨다.
84 <LA 올림픽> 여자핸드볼 결승전에서 유고슬라비아에 패한 한국. 하지만 여자농구에 이어 올림픽 구기 종목 역사상 두 번째로 은메달을 획득하는 뜻밖의 성과를 거둔다.
은메달이라는 예상치 못한 쾌거에 대한민국은 이듬해부터 여러 명의 핸드볼 유망주들을 선발하여 무려 500여 일 동안 태릉선수촌에서 맹훈련에 돌입한다. 88년 서울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한 승부수였다. 강력한 높이와 피지컬을 갖춘 유럽 선수들과 대등한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조직력과 체력의 우위가 필수적이었다. 올림픽 전까지 각 소속팀에서 뛰다가 올림픽 직전 소집되는 유럽 대표팀과 비교했을 때 500일이 넘도록 같은 멤버들이 손발을 맞추고 혹독한 체력 훈련을 마친 우리 대표팀은 조직력과 체력 면에서 완벽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966년 개장 후 2017년 <진천 선수촌>으로 이전할 때까지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산실이었던 <태릉 선수촌>
한국 여자핸드볼, 세계를 제패하다!
500여 일 동안의 지옥 훈련으로 무장한 한국은 홈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까지 등에 없고 유럽의 핸드볼 강국들과 대등한 경기를 했다. 신장과 피지컬의 현저한 차이로 고전했지만 끈끈한 조직력과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체력으로 마침내 한국 구기종목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는 감격을 누렸다.
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 결승전에서 한국 대표팀이 당시 세계 최강 소련을 꺾고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는 장면
1980년부터 이어진 대표팀은 88년 <서울 올림픽>의 금메달을 끝으로 임오경, 홍정호, 오성옥, 이미영 등 한국 여자핸드볼의 새로운 스타들로 대체되었다. 이들은 <서울 올림픽> 여자핸드볼 금메달의 효과로 89년 출범한 <핸드볼 큰 잔치>의 새로운 스타들이었는데 이후 20년 가까이 한국 여자 핸드볼을 묵묵히 지킨 주인공들이었다. 새로운 스타들로 무장한 한국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금메달을 따내며 올림픽 2연패를 달성, 한국 여자핸드볼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당시 한국체대 재학 중이었던 임오경은 30골을 넣으며 득점 2위, 대회 베스트 7에 뽑히면서 한국 여자핸드볼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한국 여자 핸드볼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임오경(현 국회의원)
덴마크와의 악연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대표팀은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사상 초유의 올림픽 구기 종목 3연패에 도전했다. 한국은 조별 예선부터 유럽 챔피언 독일을 꺾으면서 산뜻하게 출발했고 이어진 경기에서도 여유 있는 격차로 연승행진을 하면서 결승에 안착, 올림픽 3연패를 위한 마지막 고비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시상식. 한국은 88년-92년 올림픽에 이어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여자핸드볼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3연패에 도전했다.
결승전에서 만난 덴마크는 만만치 않았다. 한국은 전반전까지 특유의 속공이 살아나며 17-13으로 앞서 나갔지만 후반 맹추격을 당하며 29-29 동점을 허용, 결국 연장전에 돌입했다. 덴마크의 거친 수비에 고전하던 한국은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까지 겹치며 연장전 끝에 37-33으로 석패했다. 그래도 값진 은메달이었다. 임오경은 이번 대회에서도 무려 41골을 몰아넣어 득점왕에 올랐고 홍정호, 김은미와 함께 베스트 7에 선정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임오경과 함께 한국 여자 핸드볼의 간판스타 홍정호. 우리나라 선수로는 최초로 노르웨이 리그에 진출했다.
하지만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결승전 패배를 시작으로 덴마크와 지독한 악연이 이어졌다. 4년 후 개최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세대의 마지막 올림픽 출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반드시 금메달을 되찾아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선수들의 각오가 남달랐다. 이런 각오는 뛰어난 경기력으로 이어져 대표팀은 4전 전승, 조 1위로 8강에 올랐고 8강전에서 브라질을 여유 있게 물리치면서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준결승 상대는 지난 대회 결승에서 한국 여자 핸드볼의 올림픽 3연패를 좌절시키며 뼈아픈 패배를 안겨 준 덴마크였다. 이 <시드니 올림픽> 여자핸드볼 준결승 경기도 손에 꼽을만한 명승부였는데 한국은 후반 막판까지 승부를 알 수 없는 치열한 접전을 펼쳤지만 결국 29-31로 패배, 덴마크의 벽에 또다시 가로막혔다. 한국을 꺾은 덴마크는 결승에서도 승리하며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고 준결승 혈전의 여파로 한국은 3.4위전에서 체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노르웨이에게 21-22, 한 점 차로 패배하며 노메달에 그친다.
한국 대표팀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준결승전에서 덴마크에 패한 후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테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지난 5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 2회, 은메달 2회, 4위 1회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지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둔 여자핸드볼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 후 야심 차게 출범했던 ‘핸드볼 큰잔치’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미 굴지의 대기업들이 농구나 배구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 창단을 하기는 어려웠고 올림픽에서만 반짝할 뿐, 국민적인 관심도 전혀 끌지 못했다. 무엇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그나마 있던 구단도 해체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었다. 2002년 광주시청에 이어 2003년에는 ‘핸드볼 큰잔치’ 최고 명문 팀이자 국가대표 4명을 보유한 <알리안츠 생명>이 해체되는 등 여자 핸드볼 세계 최강국 중 하나였던 한국은 믿기지 않는 추락을 거듭했다.
2008년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흥행 돌풍에도 '핸드볼 큰잔치' 관중석은 텅 비어 있다.
국내 리그가 이런 상황이었으니 올림픽 예선도 순조로울 수 없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진출권이 달린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20년 만에 처음으로 조 2위로 밀리며 본선 직행 티켓을 따지 못했고 이 위기에서 팀을 맡은 임영철 감독은 이미 국가대표에서 은퇴하고 일본에서 뛰고 있던 임오경과 오성옥 등 노장 선수들을 삼고초려 끝에 다시 소집했다. 주전 선수 대부분 30대 노장 선수들로 꾸려진 대표팀은 그해 12월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프랑스, 헝가리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가까스로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하늘을 찌르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유럽팀들을 상대로 믿을 수 없는 선전이었다.
임영철 감독의 설득으로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국가대표팀에 합류한 임오경(좌)과 오성옥(우).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속 김정은과 문소리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렇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시작됐다. 나는 당시 올림픽 중계를 위한 <MBC 올림픽 방송단>의 일원으로 아테네에 와 있었는데 현지에서도 우리 여자핸드볼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과거의 영광을 이어갈 젊은 선수들로 문필희, 이상은 정도가 있었지만 사실상 30대 노장 선수들로 구성된 대표팀이 강력한 피지컬을 자랑하는 유럽팀들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2004 <아테네 올림픽> 여자핸드볼 대표팀의 신성 이상은. 문필희와 함께 대부분 30대 노장 선수들로 구성된 대표팀의 거의 유일한 20대 주전 선수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한국 대표팀은 조별 예선 1차전부터 이변을 연출한다. 가까스로 본선에 진출한 까닭에 시드가 낮았던 한국은 세계 최강 덴마크와 프랑스, 스페인 등 쟁쟁한 유럽팀들과 같은 조에 속해 있었는데 올림픽 3연패에 도전하던 세계 최강 덴마크와의 예선 첫 경기에서 29-29 무승부를 기록한 것이다. 이어진 앙골라, 프랑스, 스페인을 모두 격파하면서 8강에 진출했고 8강에선 브라질을, 준결승전에서는 다시 만난 프랑스를 또다시 격파하면서 결승에 안착,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의 임영철 감독. 임감독은 위기의 대표팀을 구하기 위해 임오경, 오성옥, 오영란 등 노장 선수들을 삼고초려로 합류시켜 아테네에서 돌풍을 일으킨다.
마침내 2004년 8월 29일, 아직도 올림픽 여자핸드볼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고 있는 대한민국과 덴마크의 결승전이 시작됐다. 한국은 <애틀랜타 올림픽> 결승전과 <시드니 올림픽> 준결승전 등 중요한 길목마다 우리를 가로막았던 덴마크에게 설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과연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한국의 올림픽 3연패를 저지했던 덴마크의 올림픽 3연패 도전을 이번에는 한국이 저지할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기적과도 같았던 2004 <아테네 올림픽> 여자핸드볼 은메달 이야기를 다룬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포스터
위력적인 높이와 강력한 피지컬을 내세운 덴마크에게 대형을 갖춘 상태에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은 속공으로 활로를 찾았다. 치열한 접전을 펼치던 한국은 후반 중반 이후 연속 3골을 내주며 22-25로 뒤지면서 큰 위기를 맞았지만, 경기 종료 3분여 전 오른쪽을 파고든 최임정과 중앙을 돌파한 문필희, 왼쪽 사이드 슛으로 가세한 장소희가 순식간에 25-25 동점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공격권을 획득한 한국의 문필희가 종료 3초 전 회심의 강슛을 던졌다. 하지만 이 슛은 상대 골키퍼의 왼손을 맞고 튀어나왔다. <애틀랜타 올림픽>에 이어 또다시 연장전에 돌입하는 순간이었다.
노장 선수들이 즐비했던 대표팀의 막내(당시 22세) 문필희. 종료 3초 전 던진 회심의 슛이 덴마크 골키퍼에 막히고 만다.
연장전에서도 일진일퇴의 손에 땀을 쥐는 공방이 계속되었다. 연장 종료 20초 전까지 29-29로 맞서던 두 팀, 장소희가 왼쪽 다이빙 슛을 던졌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이 슛마저 골대를 벗어났다. 올림픽 여자 핸드볼 역사상 최초로 2차 연장에 들어갔다. 한국이 33-31로 앞서던 2차 연장 후반, 이날 경기에서 무려 22개의 선방을 기록한 오영란이 덴마크의 슛을 또다시 막아냈다. 하지만 두 명의 폴란드 심판은 덴마크의 공을 선언했다. 규칙상 골키퍼의 몸에 맞은 공이 골라인 밖으로 나갔을 때는 수비 팀에게 공이 주어지는데, 오영란의 손에 맞지 않았다고 판정한 것이다. 명백한 오심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억울함에 펄쩍펄쩍 뛰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경기 종료 10초 전 덴마크의 카트리네 프루엘룬드가 던진 중거리 슛이 오영란의 방어를 뚫고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34-34. 2차 연장에서도 두 팀은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오랫동안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의 골문을 지켰던 오영란
경기장에 있었던 선수들과 관중들, 중계진까지 이 명승부에 흠뻑 빠져 있었다. 덴마크를 일방적으로 응원하던 유럽 관중들은 후반부터 우리 선수들의 투혼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경기는 승부던지기로 이어졌다. 주축 선수들이 30대 노장 선수들로 구성이 된 한국팀의 체력은 100분 넘은 사투에 이미 바닥나 있었다. 도저히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덴마크 골키퍼의 큰 키도 부담이었다. 결승전 내내 맹활약을 했던 한국팀의 주포 임오경과 문필희의 슛이 덴마크 골키퍼의 발에 걸렸고 덴마크는 4명의 슈터가 차례로 볼을 네트에 꽂았다. 승부던지기 2-4. 올림픽 여자핸드볼 최고의 명승부는 이렇게 끝이 났다.
2004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전에서 승부던지기 끝에 덴마크에 패한 한국 선수들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있다.
올림픽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뛸 소속팀이 없었던 한국선수들은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한국 대표팀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세계의 언론들이 앞 다투어 우리 대표팀의 선전을 ‘아테네 올림픽 최고의 명승부’라고 부르며 보도하기 시작했다. 1000여 개의 팀과 200여 개의 전용 체육관이 있는 덴마크를 상대로 감동적인 플레이를 보여 준 한국 대표팀의 투혼에 전 세계는 감동했다.
2004 <아테네 올림픽> 여자핸드볼 은메달 소식을 전하는 스포츠 서울의 기사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에서 감동적인 은메달을 따낸 대표팀의 시상식 모습
이 이야기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어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우리는 핸드볼 대표팀을 통해 패배도 그 어떤 승리보다 감동을 줄 수 있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우리는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을 얻었고 그것은 ‘각본 없는 드라마’로 불리는 스포츠가 줄 수 있는 ‘우리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