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출범 2번째 해인 1983년. 개막전 마운드에 배가 볼록 나온 아저씨가 한 명 올라왔다. 프로야구 출범 원년, 독보적인 꼴찌였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선수인 데다가 어린 나의 눈에 도저히 야구를 잘할 것 같지 않은 비주얼이었던 그 선수는 설렁설렁 던지다가도 위기 때면 전력투구를 하고 오버핸드로 던지다가 갑자기 사이드암으로 던지기도 하고, 하여간 처음 보는 이상한 피칭을 하며 7이닝 1실점, 승리투수가 되었다. 중간중간 위협구를 던졌고, 화난 타자들을 보며 씨익 웃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시즌 30승을 거두었으며 427.1이닝을 소화하고 36완투를 기록한, 그 어떤 선수도 깰 수 없을 것이며 깨져서도 안 되는 기록의 소유자, 그의 이름은 장명부였다.
옆집 아저씨 같은 몸매와 얼굴로 한국 프로야구를 평정한 30승 투수 장명부
<삼미 슈퍼스타즈>의 탄생
1982년, 최고의 인기스포츠가 된 프로야구가 출범하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있었다. 특히 프로야구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야구단을 창단할 기업이 모자랐는데, 서울에 MBC, 경상남북도에 롯데와 삼성, 충청에 OB, 호남에 해태, 이렇게 5개 팀이 겨우 확정된 상황에서 인천-경기-강원-이북 5도를 연고지로 팀을 창단할 기업이 없었다. KBO는 휴전선 이북의 강원도가 고향인 현대 정주영 회장에게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물론 현대는 훗날 이 제안을 거절한 것을 후회하며 무리하게 리그에 들어오게 되지만.
프로야구는 서울과 경상남북도, 충청과 호남 5개 지역을 연고로 하는 구단만 창단이 확정되어 있었다.
5개 팀으로 출범을 하자니 인천-경기-강원지역이 소외당하고 게임이 없는 팀이 생기는 등 여러 가지 애로점이 있었다. 이 와중에 KBO에 예상치 못한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삼미그룹의 젊은 총수 김현철 회장이었다. 삼미그룹은 무역, 해운, 광업, 특수강 등이 주 종목으로, 프로야구로 인해 홍보 효과를 누릴 만한 소비재 분야가 없었기 때문에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며 얻을 것이 없었지만, 당시 30대였던 김현철 회장이 미국 유학 시절 메이저리그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까닭에 야구단 창단을 결심한 것이다.
약체의 대명사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엠블럼. '슈퍼스타'가 한 명도 없는 '슈퍼스타즈'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식. 삼미의 합류로 6개 구단으로 출범할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만년 꼴찌의 대명사이자 박민규의 소설로도 등장하는 등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삼미 슈퍼스타즈>가 탄생했다. 출범 당시에는 드래프트 제도가 없었고 모든 선수를 연고지 출신 선수로 뽑아야 했는데 인천-경기-강원-이북 5도를 연고지로 하고 있다지만 사실상 고교 팀이 인천고와 인천동산고(이 당시 제물포고는 없었다) 2개 팀 밖에 없었던 삼미는 선수구성 자체가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투수가 부족했는데, 창원에 전지훈련을 갔다가 훈련 시 배팅 볼을 던져준, 삼미 특수강 창원공장 구매 팀에 근무하던 감사용(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주인공)을 정식 투수로 영입할 정도였다.
2004년 개봉한 이범수 주연의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 삼미 특수강 구매팀 직원이었던 프로 통산 1승, 감사용 선수의 꿈과 인생을 그렸다.
이런 상황이니 <삼미 슈퍼스타즈>의 성적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총 80경기 중 전기리그 10승 30패 승률 0.250, 후기리그 5승 35패 승률 0.125, 전후기 종합 15승 65패 승률 0.188의 처참한 결과였다. 전 세계 모든 야구 리그를 살펴보진 못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야구리그에서는 단연 최저 승률이었다.
개막 첫 해 15승 65패, 종합 승률 0.188로 역대 최저 승률을 기록한 <삼미 슈퍼스타즈>
첫 시즌, 너무나 압도적인 꼴찌였던 <삼미 슈퍼스타즈> 때문에 팀 간 전력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게 제기되었고 KBO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KBO가 고심 끝에 내놓은 해법은 당시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고 있던 재일교포 선수들의 영입을 추진하는 것. 전력 보강을 원하고 있던 <삼미>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첫 시즌 꼴찌였던 만큼 <삼미>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다른 구단이나 팬들은 그래봐야 일본리그에서 이미 밀려났거나 노쇠한, 은퇴하기 직전의 선수들이 오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삼미>는 뜻밖에도, 불과 2년 전, 15승을 거두며 <히로시마 도요카프>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에이스 장명부의 영입을 발표하며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삼미 슈퍼스타즈>를 향한 팬들의 사랑은 그 어떤 팀보다 컸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메시아, 장명부
일본 이름 후쿠시 히로아키, 장명부는 1950년 일본 돗토리현에서 태어났다. 당시 모든 재일동포들이 그렇듯 매우 가난하게 자랐고 노골적인 따돌림과 차별 속에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다. 몸도 굉장히 병약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초등학교 4학년 글짓기 시간에 ‘병이 나으면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요’라는 글을 지어 아버지에게 보여줬더니 다음 날 아버지가 야구 글러브와 배트를 사 가지고 오신 것이 계기가 되어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장명부의 아버지가 징용을 끌려가기 전까지 살았다는 충남 아산시 배미동의 집. 지금은 장명부의 이복형제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불행했던 장명부에게 야구는 한줄기 빛이었다. 그가 이 지긋지긋한 가난과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야구밖에 없었다. 1968년 돗토리니시高를 졸업하고 일본 최고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은 보여주지 못했는데, 1973년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하게 되면서 장명부는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적 첫해 7승을 기록하며, 팀의 주축 투수가 되었고 1977년 <히로시마 도요카프>로 트레이드, 그의 야구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는 1978년 시즌과 1980년 시즌에 무려 15승을 거두었고 1980년엔 리그 최고승률까지 기록하며 1979년과 1980년 <히로시마 도요카프>의 일본시리즈 2연패 달성에 일등 공신이 된다. 비록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에 단 3승에 그치는 극단적 부진에 빠져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일본 최정상급의 투수가 이제 막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로 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명부의 한국행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대단한 화제였다.
일본시리즈를 두 번이나 제패한 일본 프로야구 최정상급 투수인 장명부의 한국 프로야구행은 엄청난 화제였다. (삼미와 계약하고 있는 장명부)
당연히 <히로시마> 구단은 한국행을 강력하게 만류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지막 선수생활을 하고 싶다는 그의 뜻을 꺾지 못했다. 결국 장명부는 계약금 4,000만 원, 연봉 4,000만 원에 <삼미 슈퍼스타즈>와 계약한다. 당시 서울의 아파트 값이 3000만 원 정도였고 원년 최고스타였던 박철순의 첫 해 연봉이 2400만 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 금액도 엄청난 거액이었지만 <삼미>는 실제로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제공했다. 발표된 계약금과 연봉 외에도 아파트와 승용차를 제공했고 세금을 구단에서 부담하기로 하는 등 총액으로 계산하면 약 1억 8천만 원에 달했다. 당시 <삼미>는 그만큼 꼴찌 탈출을 염원하고 있었고 장명부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메시아’였다.
'모국서 뛰고 싶다' 한국 프로야구행을 선언한 장명부.
전무후무한 시즌 30승 투수의 탄생
장명부의 진가는 1983년 4월 3일 롯데와의 개막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장명부는 그날 7이닝 동안 29 타자들을 상대로 삼진 7개, 6안타 4볼넷으로 1실점, 한국 프로야구 첫 경기에서 첫 승을 따낸다. 그는 당시 최고 수준인 145km의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 능수능란한 완급 조절로 상대 타자들을 압도했다. 1982년 일본을 극적으로 꺾으며 우승을 차지했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멤버들이 모두 입단한 상태였지만, 아직까지 한국과 일본의 프로야구 수준은 큰 차이가 있었다.
145km를 넘나 드는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를 활용한 뛰어난 완급 조절로 한국 프로야구를 평정한 장명부.
이후에도 이런 강력한 구위에 능수능란한 완급 조절 능력까지 갖춘 장명부를 막을 자는 없었다. 그는 사실상 아마야구 수준이었던 한국 프로야구에선 많이 볼 수 없었던, 소위 ‘빈볼(Bean Ball)'을 자주 사용하면서 상대 주요 타자들을 위축시켰고 벤치 클리어링을 자주 이끌어내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빈볼(Bean Ball)'에서 Bean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콩'을 말하는데 여기서 '콩'은 사람의 머리를 뜻하는 은어이다. 즉 타자의 머리로 향하는 볼을 '빈볼(Bean Ball)'이라고 했는데, 점점 의미가 넓어져 몸 쪽으로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모든 볼을 '빈볼(Bean Ball)'이라고 부르고 있다.
'빈볼'의 대명사 장명부. 몸에 맞는 공을 던진 후 화가 난 타자를 바라보며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있다.
장명부의 이런 피칭 스타일은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차별과 따돌림을 당해 온 재일 교포 선수로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선수들이 자신을 함부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으며 마운드 위에서 공으로는 일본 선수들을 마음껏 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장명부의 이런 전략이 결코 미화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플레이였고 미국이나 일본 등 긴 프로야구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행해지던 ‘빈볼(Bean Ball)'같은 불문율을 접하게 해 준 것이 바로 장명부였다.
장명부의 투구 스타일을 처음 접한 야구계에선 비판이 일었다.
장명부는 1983 시즌 60경기 등판, 44경기 선발, 427.1이닝, 30승(28선발승), 36완투, 26완투승, 6완봉승, 8경기 연속 완투승 등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기록을 남겼다. 장명부의 이런 기록들은 선발진과 불펜의 명확한 분업 시스템이 확립되고 선수들 몸 관리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현재 프로야구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앞으로도 결코 깨질 수 없는 기록들이며, 절대 깨져서도 안 되는 기록들이다.
83년 <삼미 슈퍼스타즈> 돌풍의 두 주인공 김진영 감독(좌)과 장명부(우). 장명부는 83시즌 무려 30승을 거두는 괴력을 보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믿을 수 없는 혹사를 한 장명부는 서서히 무너져 갔다. 한 시즌동안 427.1이닝을 던진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고 허리통증이 너무 심해 타이어를 몸에 감고 등판을 하기도 했다. 장명부가 이렇게 무리를 한 까닭은 당시 <삼미>의 허형 사장이 ‘30승을 거두면 1억을 더 주겠다’고 식사 자리에서 약속을 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는데,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장명부는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그의 구위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 웃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보너스 지급 약속을 믿고 무리를 한 장명부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보너스 지급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30승 투수, 슈퍼스타의 몰락
<빙그레 이글스>로 트레이드된 장명부는 결국 1987 시즌을 끝으로 한국 프로야구에서 퇴출된다.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하는 날, 종합소득세 730만 원을 체납한 사실이 밝혀져 혼자만 출국금지를 당했고 이후 삼성과 롯데 등에서 투수 코치를 역임했지만 1991년, 성낙수, 박찬 등과 함께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가 드러나면서, 시즌 30승을 기록한 大투수였고 만년 꼴찌 <삼미 슈퍼스타즈>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장명부는 완전히 몰락했다.
삼성 투수코치 시절 성준(좌)을 지도하고 있는 장명부(우)
한국에서 추방된 후 그의 행적은 묘연했다. 간혹 사기혐의로 피소되었다는 소식이나 일본에서 건물 야간경비, 택시 운전 등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질 뿐이었다. 2004년 <SK 와이번스>는 시즌 개막에 맞춰 인천 야구의 슈퍼스타인 장명부에게 시구를 부탁하려고 수소문했지만 끝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개막전 시구의 영광은 감사용에게 돌아갔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실제 주인공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 감사용의 시구 모습
그리고 1년 후,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장명부가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 하우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마작 하우스 벽에는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살일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부검 결과 사망원인은 마약중독이었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장명부 사후 제작된 KBS 스페셜에서 마작하우스 벽에 쓰여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글귀를 재현한 장면.
장명부는 잊을 수 없는 기록과 기억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마약과 도박으로 점철된 그의 말년의 삶은 결코 미화되거나 용서되어서는 안 되지만 일본과 한국, 어느 곳에서도 자리잡지 못한 그의 인생을 반추한다면 그가 왜 그런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