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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친 PD Dec 17. 2024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번호 '42번'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

현대 스포츠에서 흑인 선수들이 없다면? 아마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목을 막론하고 가장 빼어난 활약을 며 관중들을 열광하게 하는 슈퍼스타들의 상당수가 바로 흑인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흑인 특유의 강인함과 탄력으로부터 나오는 신체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에 이제 흑인 선수들이 없는 스포츠는 그 어떤 종목이건 존재하기 어렵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

하지만 불과 8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스포츠 주요 리그에서 흑인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흑인들은 백인들이 이용하는 음식점을 사용할 수 없었고 화장실도 전용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시대였다. 이런 인종차별은 스포츠에도 만연해서 흑인들은 백인들과 같이 뛸 수 없었고 흑인들끼리 따로 리그를 만들어 뛰어야 했다.

같은 공간에 나뉘어 있는 백인 전용 음수대와 흑인 전용 음수대

이런 상황은 메이저리그도 마찬가지였다. 흑인 선수들은 메이저리그에서 뛰지 못하고 ‘니그로 리그’라고 불리는 흑인 리그에서 뛰어야 했는데 이렇게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20세기 미국에서 흑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한 선수가 있었다. 극심한 따돌림과 괴롭힘, 살해 위협을 묵묵히 이겨내고 메이저리그를 실력으로 평정했고 이후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이 되었으며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메이저리그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이 선수의 이름은 바로 재키 로빈슨이었다.

1950년까지 지속되었던 <니그로 리그>의 엠블럼

피지컬 끝판왕, 야구를 선택하다

1919년 미국 조지아주에서 태어난 재키 로빈슨은 학창 시절부터 다양한 종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전미대학리그 미식축구 선수로서 패싱, 러싱 야드와 득점 부문 선두를 기록한 팀의 에이스였고, 전미 대학리그 농구에서는 40년과 42년 두 차례나 컨퍼런스 득점왕을 차지한 대학농구의 스타였다. 같은 대회 멀리뛰기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1940년 올림픽이 취소되지 않았더라면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도 있었던, 피지컬 끝판왕이었다.  

전미대학리그(NCAA) 멀리뛰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재키 로빈슨

그러나 재키 로빈슨은 대학시절 두각을 나타냈던 그 많은 종목들을 버리고 야구를 선택하는 뜻밖의 결정을 한다. 졸업과 함께 본격적으로 팀을 구하던 로빈슨은 니그로 리그 소속의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에 입단하여 맹활약하게 되는데, 이때 로빈슨의 활약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 사상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를 만들어 낸 일등 공신이자, 당시 메이저리그 <브루클린 다저스>의 단장이었던 브렌치 리키였다. 브렌치 리키는 지금은 어느 구단이나 실시하고 있는 ‘스프링캠프’를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 정착시켰고 연습 시 배팅 케이지와 피칭 머신을 도입하는 등 메이저리그의 훈련을 체계적으로 정립시킨 장본인이었다.  

니그로리그 <캔자스시티 모나크스> 시절의 재키 로빈슨(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브렌치 리키는 대학 코치 시절 원정길에 올랐다가 팀 내 최고의 선수이자 흑인 선수였던 찰스 토머스가 호텔에서 숙박 거부를 당한 후 자신의 검은 피부를 한탄하며 통곡하는 것을 보고 이런 잘못된 일들을 반드시 바로 잡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리키는 <다저스>의 단장이 된 뒤 메이저리그에 흑인 선수들을 영입하려고 노력했지만 이 시도는 당시 메이저리그 초대 커미셔너인 케네소 랜디스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극렬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초대 메이저리그 커미셔너 케네소 랜디스. 흑인 선수들을 영입하려는 브렌치 리키의 노력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아주 극렬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케네소 랜디스는 다양한 미국 야구리그에서 뛰고 있던 흑인 선수들을 메이저리그 출범과 동시에 모두 쫓아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의 순수성을 유지한다는 미명 하에 흑인선수들이 메이저리그로 넘어오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1944년 랜디스가 사망하자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상 최초, 흑인 메이저리거의 탄생

랜디스의 후임으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 자리에 오른 해피 챈들러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흑인들이 미국을 위해 유럽에도, 태평양에도 가서 싸우는데 메이저리그에서는 왜 뛸 수 없냐’며 사실상 흑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입성을 허락했다. 그러나 구단들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당시 백인이 대다수인 메이저리그 팬들이 흑인 선수들을 영입할 경우 리그 보이콧 등 단체행동에 들어가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2대 메이저리그 커미셔너 해피 챈들러.  <브루클린 다저스>와 재키 로빈슨의 계약을 허락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브렌치 리키는 이런 팬들의 으름장에도 자신의 소신대로 흑인 선수를 영입하기로 결심한다. 그에게 첫 번째로 선택된 선수는 바로 재키 로빈슨. 브렌치 리키는 로빈슨을 불러 훗날 아주 유명해진 단독 면담을 한다. 리키는 로빈슨에게 ‘인종적인 모욕을 당하더라도 화를 삭일 수 있겠느냐’고 물었는데 로빈슨은 그 질문에 화가 나서 ‘흑인들이 맞서 싸우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대답했다. 리키는 ‘시대와 맞서 싸워 이기려면 모욕을 당하더라도 인내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리키의 깊은 뜻을 알아챈 로빈슨은 ‘내 뒤에 올 흑인 선수들을 위해 모든 부당한 일들을 감수하겠다’고 약속했다.      

재키 로빈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42>의 포스터. 브렌치 리키 役의 해리슨 포드와 재키 로빈슨 役의 채드윅 보스만
마침내 메이저리그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하고 있는 재키 로빈슨(좌)과 브렌치 리키(우) 다저스 단장

1947년 4월 15일, 2만 6천여 명의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역사적인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전이 열렸다. 사상 최초 흑인 메이저리거가 탄생한 것이다. 재키 로빈슨은 1880년대, 미국 야구리그에서 뛰던 흑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출범과 동시에 리그에서 모두 쫓겨난 후 메이저리그의 인종 장벽을 넘은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최초라는 수식어 뒤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온갖 협박과 무시, 괴롭힘과 조롱이었다.  

1947년 4월 15일.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의 재키 로빈슨은 마침내 역사적인 메이저리그 데뷔 전을 치른다.  

피 위 리즈를 만나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타석에 들어갈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쏟아졌다. 상대 투수들은 로빈슨의 몸 쪽으로 쉴 새 없이 위협구를 던졌고, 투수가 던진 공에 머리를 맞고 실신하는 경기까지 있었다. 당시 1루수였던 로빈슨의 발목을 일부러 밟아 쓰러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심판의 판정도 당연히 편파적이었는데, 판정에 대해 로빈슨이 항의하자 백인 심판은 ‘야구 때려치우고 면화나 따러 가라’고 노골적인 조롱을 일삼았다. 남부로 원정경기를 갈 때에는 다저스 선수단이 묵는 호텔에 들어가지 못하고 흑인 전용 숙소로 향해야 했고, 심지어 같은 다저스 선수 중 일부는 그와 같은 팀에 있기 싫다며 퇴출하라는 연판장을 돌리기도 했다.

사상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가 된 재키 로빈슨. 하지만 그는 온갖 협박과 조롱을 견뎌야만 했다. (더그아웃 밖에 서있는 사람이 재키 로빈슨)

그런 시련 속에서도 로빈슨은 끝내 브렌치 리키와의 약속을 지켰고 그 많은 수모를 모두 참아냈다. 만약 그가 그런 부당한 괴롭힘을 참아내지 못했더라면 메이저리그 흑인선수의 역사는 많이 미루어졌을 것이다. 그의 끝없는 인내는 다른 백인 선수들과 관중들이 스스로 자성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노골적인 인종 차별의 부당함을 마음 깊이 느끼고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났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미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달라'고 주장하는 흑인 옆에서 '니그로는 집으로 가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백인. 인종차별로 얼룩진 당시 미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1947년 6월 21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 경기. 로빈슨에게는 잊지 못할 날이었다. 경기장의 관중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로빈슨에게 ‘니그로’를 합창하며 야유를 퍼붓고 있었다. 그 순간, <다저스>의 강타자이자 간판스타였던 유격수 피 위 리즈가 1루수 로빈슨에게 걸어왔다. 그는 아주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걸었고 로빈슨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로빈슨에게 야유를 퍼붓고 있던 경기장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다저스>의 최고 스타가 흑인 선수의 어깨에 올리다니!

야유가 쏟아지고 있던 경기 중 재키 로빈슨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는 피 위 리즈. 이 장면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상징적인 장면이 되었다.  
영화 <42>에서 피 위 리즈 役의 루카스 블랙과  재키 로빈슨 役의 채드윅 보스만

이 장면 하나로 분위기는 달라졌다. 로빈슨을 안쓰럽게 보고 있던 관중들이 서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침묵하던 팀 동료들도 그를 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로빈슨이 ‘다음 경기에도 나오면 42번 검둥이, 너 총으로 쏴 버릴 거야’라는 정체불명의 살해협박을 받고 두려워할 때, 외야수 진 허만스키는 ‘우리가 모두 42번을 입으면 누군지 모를 거야’고 말하며 로빈슨을 격려했다.  

로빈슨이 경기에 나오면 죽이겠다는 내용의 실제 협박편지

수많은 미국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백인 피 위 리즈가 흑인 재키 로빈슨과 어깨동무를 한 이 사건은 미국 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특히 피 위 리즈는 당시 노골적인 인종차별 정책을 펴던 켄터키 주의 루이빌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어려서부터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고향 사람들의 행동의 부당함을 가르쳤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 피 위 리즈는 죽을 때까지 자신과 재키 로빈슨이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소중히 간직했다고 한다. 그의 이 행동은 메이저리그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재키 로빈슨은 메이저리그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후 수많은 흑인선수들과 유색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피 위 리즈와 재키 로빈슨의 동상

재키 로빈슨은 다음 해인 1948년부터 포지션을 1루에서 2루로 옮겼는데, 유격수 자리에는 피 위 리즈가 있었다. 로빈슨과 리즈는 <다저스> 역대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브루클린 다저스>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로빈슨과 리즈는 모두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어 전설로 남겨졌다.

<브루클린 다저스> 역대 최고의 키스톤 콤비 재키 로빈슨(좌)과 피 위 리즈(우)

메이저리그 전 구단 영구 결번이 되다!

재키 로빈슨은 단장 브렌치 리키가 새로운 구단주 오말리와의 불화로 팀을 떠난 후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되었는데 라이벌 팀으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은퇴를 선언하면서 <브루클린 다저스> 팬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받게 . 그리고 은퇴 후에도 팀의 LA 이전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팀을 잃는다는 슬픔에 빠진 <브루클린 다저스> 팬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그라운드를 떠난 후 적극적으로 흑인 인권운동에 투신했던 로빈슨은 선수생활 말년부터 지병으로 고생하던 당뇨병이 심해지면서 결국 1972년, 5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야구선수 재키 로빈슨의 사망소식을 다룬 신문기사

1947년에 있었던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의 데뷔는 미국이 민권법을 제정하기 16년 전의 일이고, 흑인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선거 법안을 제정하기 18년 전의 일로써 미국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미국사회에서 소신 있게 그를 메이저리그에 데뷔시킨 브렌치 리키, 그 모든 수모를 이겨내고 마침내 메이저리그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재키 로빈슨, 그리고 용기를 내어 다가가 로빈슨의 어깨에 팔을 두른 피 위 리즈 이 세 명이 함께 이룩한 위대한 사건이었다.       

대표적인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좌)과 재키 로빈슨(우). 재키 로빈슨은 은퇴 후 열렬한 흑인 인권운동가로 활동하였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은 사망 직전이었던 1972년 6월 4일, 홈경기를 앞두고 <다저스>의 영구 결번이 되었다. 이후 그의 역사적인 메이저리그 데뷔일로부터 정확히 50년이 지난 1997년 4월 15일, 사상 최초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메이저리그 전 구단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42번을 사용했던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가 은퇴하면서 이제 메이저리그에서 ‘42번’은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  

팀 내 최고 인기스타가 된 재키 로빈슨이 더그아웃 위로 몰려든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2007년부터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그가 데뷔한 날인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기념하고 있다. 이 날만은 모든 선수와 코칭스태프, 그리고 심판까지 모두 ‘42번’을 달고 경기를 한다. 1947년 4월 15일, 메이저리그의 유일한 선수였던 ‘42번’ 재키 로빈슨은 이제 전 구단의 모든 선수가 됐다. 이제 메이저리그에서 ‘42번’은 아무도 사용할 수 없지만, 또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었던 재키 로빈슨은 '42번'과 함께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재키 로빈슨 데이'.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4월 15일에는 그의 역사적인 데뷔를 기념하기 위해 메이저리그 모든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42번'을 달고 경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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