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을 분노하게 한 비상계엄 사태 이후 솔직히 글을 쓰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브런치 작가가 되면서 연재는 제시간에 꼭 올리자는 것이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고 혹시라도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을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힘들게 연재를 이어오고 있었는데, 지난 토요일 여당 국회의원들의 집단 퇴장으로 탄핵안이 폐기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글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삶의 의욕이 뚝 떨어졌다. 이번 주는 무조건 휴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유튜브를 보고 있는 중에,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의해 계엄군의 장갑차를 용감하게 맨몸으로 막아서고 있는 시민들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던 12월 3일 밤, 맨 몸으로 장갑차를 막고 있는 시민들(출처 : 중앙일보 온라인)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훅하고 올라왔다. ‘저항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말도 떠올랐다. 아주 작은 물결들이 하나둘씩 모여 결국 엄청난 파도를 만들듯이 그동안 우리는 이런 작은 몸짓들을 모아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이런 국민적인 역량이라면 우리는 이 모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을 힘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내전에 신음하고 있는 조국 코트디부아르의 전쟁을 멈추게 했던 한 슈퍼스타가 떠올랐다.
비상계엄의 반대하는 시민들
그의 이름은 디디에 드록바. 그는 압도적인 피지컬을 바탕으로 상대 센터백들을 녹아웃 시키며 프리미어리그 통산 381경기 164골, 두 번의 득점왕을 차지했고, <첼시>에게 프리미어리그 4회, FA컵 4회, 클럽 최초 챔피언스리그까지, 수많은 우승컵을 안겨준 세계 최고의 공격수였다. 그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이룩한 업적만으로도 아주 훌륭한 한 편의 글이 되겠지만 오늘은 그를 진짜 슈퍼스타로 만든, 내전으로 초토화된 조국의 전쟁을 멈추게 한, 바로 그 사건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첼시의 '축구왕'으로 불리는 드록바의 우승 기록
디디에 드록바는 1978년 3월 11일 코트디부아르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나이 5살 때 삼촌이자 축구 선수였던 미셸 고바가 있는 프랑스에 양자로 보내졌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피지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축구를 시작하여 르망, 갱강, 마르세유 등에서 뛰면서 맹활약을 했고, 마르세유를 2003-04 시즌 UEFA컵 결승전에 올려놓으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런 활약 덕분에 <첼시>의 무리뉴 감독은 드록바를 영입했고 그는 드디어 꿈의 무대인 프리미어리그로 향했다.
축구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던 어린 시절의 드록바
<첼시>는 2003년 러시아의 석유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구단을 전격 인수하여 소위 강력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막강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드록바를 비롯하여 존 테리, 램파드, 체흐 등 당대의 스타들이 총 집결하게 되는데, 이후 10여 년 간 <첼시>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그중 <첼시>의 거칠 것 없는 행진의 일등 공신은 단연 드록바였다.
<첼시>를 인수한 러시아의 석유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 강력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첼시의 전성기를 이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2006년 <독일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드록바가 과연 어느 나라의 국가대표로 뛸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서 더 오랜 기간 살았고 게다가 축구선수 생활을 프랑스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많은 언론들은 그가 당연히 프랑스를 선택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프리카 중서부에 위치한 코트디부아르
그러나 드록바의 선택은 놀랍게도 코트디부아르였다. 드록바는 삼촌 부부를 따라 프랑스 각지를 옮겨 다니며 무척이나 외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그런 그에게 가장 큰 위안이자 꿈은 축구였다. 그 기억 때문인지 드록바는 선수생활 내내 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데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내전상태에 있던 조국 코트디부아르의 참혹한 현실에 대해서도 그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코코아 이권을 놓고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던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의 삶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당시 코트디부아르는 정권을 잡은 남부 기독교 세력과 반군인 북부 이슬람 세력이 코코아 이권을 놓고 치열한 내전을 벌이면서 국민들은 그야말로 참혹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 소속으로 월드컵 참가를 선언하면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고 그는 이런 세계적인 관심을 활용하기로 결심한다.
당연히 프랑스 국가대표를 선택할 것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를 선택하며 코트디부아르의 영웅이 된다.
그러나 코트디부아르의 월드컵 예선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독일월드컵 아프리카 예선> 9차전, 홈에서 카메룬한테 일격을 당하면서 코트디부아르는 자력으로 월드컵 본선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10차전에서 코트디부아르가 수단을 이기더라도 카메룬이 이집트에게 승리하게 되면 카메룬이 본선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카메룬의 상대인 이집트는 이미 탈락이 확정된 상황이어서 아무래도 카메룬의 본선 진출이 유력한 것으로 점쳐졌다.
카메룬의 페널티킥 실축으로 극적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 짓고 기뻐하는 드록바
운명의 마지막 경기. 코트디부아르는 수단에게 3-1로 승리한 후 카메룬과 이집트의 경기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집트의 의외의 선전으로 경기는 후반 44분까지 1-1 동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마지막 1분이 지나면 코트디부아르는 본선에 올라갈 수 있는 희망적인 상황이었는데, 경기 종료 직전 카메룬이 페널티킥을 얻어낸다. 코트디부아르 선수들과 국민들은 좌절했다. 이 페널티 킥을 허용하면 코트디부아르의 본선 진출은 좌절되는 상황. 그런데 여기서 기적이 일어난다. 모든 축구팬들이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키커로 나선 카메룬의 피에르 워메가 찬 공이 골포스트를 맞고 벗어난 것이다. 결국 경기는 그대로 종료되었고, 코트디부아르는 사상 처음으로 꿈에 그리던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내전의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했다. 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 경기종료 직전 이라크의 극적인 동점골로 일본 열도를 비탄에 잠기게 하고 한반도 전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도하의 기적’의 아프리카 판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 후 드록바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하고 있는 코트디부아르 국민들.
그라운드에서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드록바와 코트디부아르 선수들은 인터뷰를 위해 카메라 앞에 섰다. 극적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선수들답지 않게 사뭇 비장한 표정이었다. 팀의 구심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드록바가 마이크를 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국민 여러분, 오늘 우리는 모든 코트디부아르인 들이 공존할 수 있고 다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월드컵이라는 축제가 사람들을 다시 하나로 모을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께 무릎을 꿇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드록바와 코트디부아르 국가대표선수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간절히 호소했다.
‘코트디부아르는 전쟁 따위에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제발 모두 총을 내려놓으세요. 평화로운 방법으로도 모든 것은 잘 될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세요. 전쟁을 멈춰주세요’
이때만 해도 드록바의 이 인터뷰가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드록바와 코트디부아르 선수들의 이 간절한 호소는 코트디부아르를 비롯해 전 세계로 끊임없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드록바의 호소에 감명을 받은 코트디부아르 정부군과 반군은 일주일 동안 서로 무기를 내려놓고 대화를 시작하기로 했다. 비록 전쟁이 완전히 종식될 때까지 여전히 많은 이견과 장애물이 남아 있었지만 이 일주일 동안은 단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았다. 드록바의 작은 몸짓은 커다란 태풍으로 변해 코트디부아르 정부군과 반군 간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고 결국 이듬해인 2007년 3월, 정부군과 반군은 부르키나파소의 수도인 와가두구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한다. 참혹했던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이 마침내 종식된 것이다.
드록바의 간절한 호소 이후 국민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코트디부아르 내전이 마침내 종식되었다.
물론 이 내전의 종식이 드록바 혼자만의 힘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국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진 슈퍼스타의 간절한 호소는 코트디부아르 내전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유도했고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실제로 내전을 종식시키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코트디부아르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드록바
이후에도 오랫동안 드록바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서 전설적인 활약을 한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축구만 잘하는 선수였다면 아직까지 이렇게 존경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축구선수들은 계속 배출되고 있지만,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실제로 전쟁까지 종식시킨 드록바와 같은 선수는 쉽게 배출되지 않을 것이다. 드록바와 같은 진짜 슈퍼스타들이 있었기에 세상은 아직 희망이 있다. 지금 이 순간, 그 희망에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본다. 모란이 피기까지 찬란한 슬픔의 봄을 아직 기다리겠노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