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파리올림픽. 한국 탁구의 간판스타 신유빈이 이끄는 여자대표팀은 단체전에서 12년 만에 올림픽 동메달을 따냈고, 신유빈은 임종훈과 짝을 이뤄 혼합복식에서도 동메달을 따내며 오랜만에 한국 탁구가 세계무대에 복귀했음을 알렸다. 하지만,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탁구는 과거 중국의 아성에 도전했던 강력한 2인자의 자리를 잃었을 뿐 아니라 세계무대에서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파리올림픽에서 12년 만에 동메달을 따낸 여자탁구 대표팀
한국 탁구는 세계 최강 중국에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온 국민을 열광시켰던 여러 번의 감동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구기 종목에서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한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나, 양영자-현정화의 서울올림픽 여자 복식 금메달 경기나 까까머리를 하고 세계 강호들을 잇달아 연파하며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유승민의 남자 단식 경기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단식에서 세계 강호들을 모두 꺾고 금메달을 차지한 유승민
하지만 우리는 그 어떤 경기보다도 드라마틱했고, 온 국민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감동적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1991년, 사상 최초의 남북단일팀이 출전해 중국을 꺾고 우승했던, 하지원과 배두나 주연의 ‘코리아’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잘 알려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다.
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남북 단일팀의 여정을 영화화한 하지원(현정화役), 배두나(이분희役) 주연의 영화 <코리아>
1. 남과 북이 같은 팀이 된다고?
이 에리사 - 정현숙 콤비가 맹활약하며 중국을 꺾고 우승한 73년 <사라예보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구기 종목 사상 최초의 세계 제패로 국민들에게 자긍심과 기쁨을 줬다면 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남북단일팀의우승은 일제 강점기와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함께 살아온모든한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 정말 잊을 수 없는 대 사건이었다.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건국 이래 최초로 구기종목 세계 제패를 한 여자탁구대표팀. 오른쪽부터 정현숙, 이에리사, 박미라, 김순옥, 나인숙선수.
당시 세계 여자탁구는 ‘작은 마녀’로 불리는 부동의 세계랭킹 1위인 덩야핑과 세계랭킹 2-3위를 번갈아 하고 있었던 차호홍, 가오준을 앞세운 중국이 압도적인 독주를 하고 있었는데, 88 서울올림픽에서 양영자-현정화 조가 여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후 에이스 양영자가 전격 은퇴하며 한국 여자탁구는 현정화를 중심으로 세대교체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아성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북한 역시 이분희를 앞세워 탁구 강국의 자리에 올라 있었지만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1990년대, 부동의 세계랭킹 1위 덩야핑. 149cm의 작은 키로 세계를 호령하며 '작은 마녀'라고 불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남과북 서로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누가 남북대결에서 승리하여 2위를 차지할 것 인가였다. 특히 한국과 북한의 에이스였던 현정화와 이분희의 자존심 대결도 치열했는데, 현정화를 비롯한 한국 선수들에게 강한 모습을 보인 이분희는 ‘한국 킬러’라는 별명을 얻으며 우리 대표팀의 발목을 잡곤 했다.
현역시절 한국킬러로 이름을 날린 남북단일팀의 맞언니 이분희 전 조선장애자체육협회 서기장
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현정화는 왼손잡이인 이분희를 공략하기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왼손파트너와 함께 훈련했고 반드시 북한을 넘어서겠다는 각오로 맹훈련하고 있었는데,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단일팀을 구성하여 출전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서로를 넘어서기 위해 총력을 다해온 남북 선수들은 이런 상황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탁구 단일팀 실무자 회의
1980년대 후반,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로 대표되는 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이어 단단하게만 보였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국제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역시 북방외교를 선언한 노태우 정권이 소련과 수교를 하고 당시 ‘중공’이라고 부르던 중국과의 수교를 추진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도 급격하게 탈냉전의 분위기로 흘러갔다.
1989년 11월 9일 동서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탈냉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과 수교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던 한국 정부는 마침 90년에 예정되어 있던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남북단일팀 논의를 진행했다. 비록 아시안게임까지 촉박한 기간 탓에 단일팀은 무산되었지만,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마침내 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단일팀이 출전한다는 역사적인 합의에 이른다. 남북한이 분단체제 이후 사상 최초로 같은 팀이 되어 출전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인 첫 남북단일팀 출범. 왼쪽부터 현정화 -유남규-김성회-이분희
2. 온 국민을 울린 ‘코리아’의 아리랑
이 사상 첫 남북 단일팀이 우리에게 준 감동과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후 단일팀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결성되었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갈라서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남북 단일팀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이 들려도 이제는 ‘또 무슨 꿍꿍이야’하며 심드렁하게 되었지만, 이때의 사상 첫 단일팀의 결성은 곧 통일이라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설렘과 감격 그 자체였다. 동서독이 통일을 이루고 철천지원수로만 여겼던 중국과의 수교, 반공체제 하에서 ‘악의 축’이었던 소련의 몰락, 이런 상황에서 북한과 같은 팀이 되어 뛰다니, 그것도 남북한 모두에게 식민지의 아픔을 안겨주었던 일본에서말이다.
사상 첫 남북 단일팀 공식 환영회(주최 : 거류민단 및 조총련 공동 환영위원회)
갑작스럽게 결성된 단일팀은 연습할 시간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결국 단일팀이 택한 장소는 대회가 치러지는 일본. 대회 전 일찍 일본으로 건너가훈련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에 살고 있던 재일 한국인 사회도 사상 첫 남북 단일팀 소식에 들썩였다. 일본인들로부터 혹독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고향에 따라 또는 이념에 따라 거류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반목하던 지난날을 뒤로한 채 두 단체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만나 공동 응원단을 꾸린 후 남북 단일팀의 공동 환영회를 준비하고 단일팀이 일본에서 조금의 부족함이 없도록 여러 가지 준비를 함께 했다. 조총련과 접촉만 해도 돌아와 간첩으로 몰려 구속되던 지난 시절이 무색하게 조총련과 거류민단이 함께 일본에 도착한 선수들을 맞이했고 공동 환영식에서함께 ‘고향의 봄’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열창했다.
'고향의 봄'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부르는 남북 탁구단일팀과 임원들
이제 관심은 남북한의 선수들이 한 팀이 되어 과연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둘 수 있느냐는 것.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에게 일격을 당한 후 2년마다 펼쳐지는 세계대회에서 중국은 지난 89년 대회까지 8연패를 기록 중이었고 9연패에 도전 중이었다.
단일팀은한국에서 현정화와 홍차옥, 북한에서는 이분희와 유순복을 내세웠다. 상대해야 할 중국의 멤버는 세계랭킹 1위부터 4위를 모두 차지하고 있던 덩야핑, 차호홍, 가오준, 천즈허였다.
남북 단일팀. 왼쪽부터 유순복(북)-홍차옥(남)-이분희(북)-현정화(남)
오랫동안 경쟁자로 지내오던 남과 북의 선수들, 게다가 냉전시대에 살면서 서로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을 선수들이 처음부터 친해지기를 기대했다면 그것은 욕심이었다. 연습시간은 그야말로 적막강산. 게다가 숙소부터 훈련장 안까지 따라다니던 안기부와 보위부 요원들의 존재는 더욱 단일팀의 케미스트리를 저해했다. 상징적으로 남북의 에이스 현정화와 이분희를 복식조로 정하고 훈련을 했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연히 손발이 맞지 않았다. 대화하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성적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던 단일팀의 코칭스태프는 제발 훈련장 안까지 요원들을 배치하지는 말라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이제 훈련장만큼은 선수들에게 자유가 허락됐다.
연습에 앞서 효율적인 훈련을 위해 달라진 탁구용어부터 이해해야 했다. 위 화면은 처넣기와 써브가 같은 뜻임을 익히는 모습
버스 안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유순복(북)과 김택수(남)
또 하나 선수들이 친해지게 된 결정적인 공간이 있었다. 숙소에서 훈련장까지 오가는 버스 안이었다. 당시 남북한의 남녀 선수들을 태운 버스에는 여분의 좌석이 없었다. 이 때문에 버스에는 남북의 요원들도, 코칭스태프도 없이 오로지 선수들만 타게 된 것이다. 서로 갈라져 살았지만 같은 언어를 쓰는 스무 살 남짓 비슷한 또래의 젊은 선수들에게 생기는 서로를 향한 관심과 열정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남북의 선수들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그 교류는 숙소에서도 이어졌다. 처음에는 요원들의 감시를 피해 서로의 방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시작되었는데 나중엔 요원들까지 복도에 없어 자유로이 서로의 방을 드나들며 오랫동안 사귀어온 친구들처럼 가까워졌다. 알고 보니 남북의 요원들도 서로 친해져 그들끼리 한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그래서 감시가 소홀해졌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니,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던 남북한의 거리는 한 뼘도 되지 않았다.
남북단일팀 선수들
왼쪽부터 이유성 코치(남) - 김혜영(북) - 이분희(북) - 유남규(남)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시작되었다. 개인전에서 단일팀은 다수의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면서 선전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독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가장 기대를 모으고 있던 여자 단체전. 예선부터 가벼운 몸놀림을 보인 단일팀은 모두의 예상대로 결승에 올라 중국을 만나게 됐다. 그런데 결승전을 앞두고 큰 문제가 생겼다. 현정화와 함께 단일팀의 주축이었던 이분희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단일팀은 현정화와 이분희가 각각 단식 2경기와 복식까지 출전하면서 에이스 두 명만으로 중국을 상대할 계획이었는데, 간염을 앓고 있던 이분희는 개인전과 단체전을 모두 치르면서 체력적으로 한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남과 북의 에이스 현정화(우)와 이분희(좌). 만성 간염을 앓고 있던 이분희는 결국 체력적인 부담을 못 이기고 결승전 단식을 포기한다.
단일팀에 비상이 걸렸다. 코칭스태프는 결국중국을 꺾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여겨지던, 현정화와 짝을 이룬 복식경기에만 이분희를 출전시키기로결정했다. 따라서 이분희가 맡았던 단식 두 경기에 누구를 출전시킬지가 문제였다. 코칭스태프의 선택은 세계무대에 잘 알려진 홍차옥 대신, 당시 18세로 단일팀 막내였던 무명의 유순복이었다. 그나마 세계무대에 알려지지 않은 유순복이 가능성이 더 있다는 판단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복식을 반드시 잡고 현정화가 단식 두 경기를 모두 이겨야 우승할 수 있는 절박한상황이었다.
당시 남북단일팀 막내 유순복(18세). 이분희의 빈자리는 무명의 유순복이 대신했다.
드디어 결승전. 중국은 세계랭킹 1위 ‘작은 마녀’ 덩야핑의 파트너로 2위 차호홍이 아닌 3위 가오준을 내세웠다. 가오준이 이분희에게 매우 강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 판단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었다.
유순복 카드를 성공시킨 남북단일팀의 이유성 코치(좌)와 조남풍 감독(우)
첫 번째 게임부터 대 파란이 일어났다. 막내 유순복이 그동안 세계대회에서 무패 행진을 달려오던 세계랭킹 1위 덩야핑을 꺾은 것이다. 두 번째 게임에서도현정화가 가오준을 꺾으면서 게임 스코어는 2-0. 체육관이 술렁거렸다. 남북이 하나가 되니 진짜 중국을 넘는 걸까? 세 번째 게임은 중국을 이길 확률이 가장 높다고 자신하던 현정화-이분희 복식 조였다. 하지만 중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간염으로 인해 이분희의 컨디션은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국은 가장 기대했던 복식을 지고 네 번째 게임에서도 현정화가 세계랭킹 1위 덩야핑에게 패하며 게임 스코어가 2-2가 됐다.
현정화(우) - 이분희(좌) 복식조.
운명의 다섯 번째 게임, 막내 유순복의 어깨에 모든 것이 걸려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이야 당연히 가오준이 우위였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이날 유순복은 온 겨레의 열망 속에 펄펄 날았다. 공격을 성공시킬 때마다 거의 1미터 이상을 점프하면서 기뻐했다. 마침내 유순복은 가오준을 꺾었다. 수 십 년 동안 2위 싸움을 하던 남과 북이 한 팀이 되어 중국을 넘어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이다. 단일팀의 선수들과 체육관을 가득 메운 응원단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남북단일팀의 막내 유순복이 마지막 경기를 이기고 환호하는 모습. 유순복의 맹활약에 남북단일팀은 중국을 꺾고 여자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시상대 맨 위로 단일팀이 올라섰다. 한반도기가 올라가면서 단가인 ‘아리랑’이 체육관에 울려퍼졌을 때, 체육관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목이 터져라 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당시 나도 아리랑을 따라 부르며 펑펑 울었다. 지금도 가끔 나는 이 장면을 찾아보면서 감동에 젖곤 한다. 수많은 국가대항전을 보았지만, 아직까지 이때만큼 감격적인 순간은 없었다. 그때는 마치 통일이 바로 올 것 같았다. 스포츠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통일이 될 줄 알다니 우리 모두 너무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여자단체전 시상식에서 남북단일팀 선수단가인'아리랑'이 연주되는 모습. 체육관을 가득 메운 응원단의 아리랑 제창이 감동적이다.
우승의 기쁨도 잠시, 이제 헤어짐의 시간이 다가왔다. 마음의 벽을 허물게 된 장소가 바로 버스였는데 이제 남과 북의 선수들은 각각 다른 버스에 올라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단일팀 선수들은 헤어지기 싫어 서로의 손을 잡고 또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울었다. 선수들은 모두 같은 말을 했다. 잘 있으라고. 꼭 다시 만나자고. 북한 선수들을 태운 버스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우리 선수들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단일팀 결성부터 훈련과정 그리고 마지막의 극적인 우승과 이별까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던 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2012년 ‘코리아’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 국민들의 기억 속에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남아 있었다.
우승의 기쁨도 잠시, 단일팀 선수들은 안타까운 이별을 해야 했다. 이분희(좌)와 현정화(우)가 헤어지며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
하지만 꼭 다시 만나자는 단일팀 선수들의 바람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어진 지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단일팀의 재회는 기약이 없다. 단일팀에 참가했던 선수들은똑같은 말을 되뇌었다.
‘우리가서로이렇게 빨리 친해질 줄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할 줄도 몰랐다’고.
이 마지막 약속은 언제 이루어질 수 있을까. 현정화와 이분희가, 홍차옥과 유순복이 다시 만나 서로를 안아주는 그날은 과연올 수 있을지, 그날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