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꿈의 구장>을 아시는지? 1982년에 나온 <Shoeless Joe(맨발의 조)>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케빈 코스트너와 레이 리오타가 주연을 맡아 1989년에 개봉한 영화이다. 한국에서의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 중에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사랑을 많이 받은 영화다.
1989년 한국극장에 개봉 당시 포스터
한국과 미국에서의 흥행 성적의 차이는 공감의 문제 때문이다. <꿈의 구장>의 스토리는 191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저지른 승부조작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미국인들에게는 아련한 아픔과 감동을 선사한 반면, 사건의 내막을 알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는 다소 생뚱맞은 내용으로 다가온 것이다.
베이브 루스(좌)와 ‘맨발의 조(Shoeless Joe)’ 조 잭슨. 당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들로 '밤비노의 저주'와 '블랙삭스의 저주'의 당사자들이었다.
개봉을 했던 1989년의 한국은 소수의 마니아들을 제외하고는 메이저리그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중계방송을 볼 곳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재도 아니고 1919년에 있었던 승부 조작 사건인 이른바 ‘블랙삭스 스캔들’은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0년 후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로 메이저리그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4대 저주(염소의 저주, 밤비노의 저주, 블랙삭스의 저주, 와후 추장의 저주)와 같이 메이저리그를 둘러싼 재미있는 역사도 널리 알려지면서 영화 <꿈의 구장>도 덩달아 재평가되고 있다.
1. 블랙삭스 스캔들
‘블랙삭스 스캔들’이란 191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신시내티 레즈> 간의 월드시리즈에 있었던 승부조작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로 꼽히는데 이 사건에 연루된 <화이트삭스>의 선수 8명은 모두 영구제명을 당했고, 이 사건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2005년에 우승을 할 때까지 무려 88년간 우승을 하지 못했는데, 이를 가리켜 '블랙삭스의 저주'라고 부른다. 얼마 전 연재한 대로 108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염소의 저주’의 당사자가 같은 연고지인 <시카고 컵스>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참 시카고 주민들은 복장 터질 일이다.
'블랙삭스 스캔들'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 '8인의 추방(Eight men out)'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화이트삭스>의 구단주 코미스키는 투수인 에디 시콧에게 30승 달성시 10,000달러란 거액의 인센티브를 걸어 놓은 상태였는데, 시콧은 이 인센티브 때문이었는지 시즌 끝까지 매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정작 시콧이 29승을 기록하자 해당 인센티브를 지불하기 아까워진 구단주가 감독에게 잔여 경기에 시콧을 기용하지 말도록 사주하는 일이 벌어졌고, 결국 29승에서 승리를 추가하지 못한 시콧은 구단주에 대해 깊은 앙심을 품게 된다.
1919년 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에이스이자 '블랙삭스 스캔들'의 발단이 된 에디 시콧
월드시리즈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신시내티 레즈>와 맞붙었는데, 에디 시콧과 클로드 윌리엄스라는 강력한 원투 펀치에 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인 ‘맨발의 조(Shoeless Joe)’ 조 잭슨까지 보유하고 있던 터라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은 <화이트삭스>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신시내티 레즈>의 배당이 높아지자 도박사들은 <화이트삭스>의 1루수 아놀드 갠딜에게 접근하여 승부조작을 의뢰하였고, 구단주의 행각에 매우 큰 불만을 품고 있던 갠딜은 선수 각각 1만 달러씩을 받기로 하고 이를 수락한다. 그는 3루수 조지 위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선수들을 포섭하는데 성공, 결국 최강 전력의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 무기력한 경기 속에 월드시리즈에서 패배했는데, 경기력에 의문을 품은 팬들을 비롯하여 기자들 사이에서 져주기 게임을 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만든 '블랙삭스 스캔들'
선수들의 승부조작 계획은 너무 허술했다. 일단 3루수 위버가 승부 조작을 거부한 것부터 승부 조작계획이 밖으로 유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가담자 외의 다른 선수들도 해당 계획을 눈치챈 탓에 당시 내야수 프레드 맥멀린 같은 선수는 아예 입막음 비용을 요구하기도 했다. 구단 외부로도 승부조작이 일어날 거란 루머 아닌 루머까지 흘러나갔다.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승부조작에 가담한 8명의 '화이트삭스' 선수들
이런 상황에서 기자들에 의해 승부조작 의혹제기가 계속되면서 결국 1920년 9월,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단은 전년도 월드시리즈에 있었던 승부조작에 대한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된다. 경찰의 조사 결과 위의 승부조작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전국을 들썩이게 하는 초대형 스캔들로 번지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 사건을 ‘블랙삭스 스캔들’이라고 불렀다. 에디 시콧의 인센티브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화이트삭스> 구단주는 매우 구두쇠였는데, 심지어 선수들에게 세탁비도 지급하지 않아 이에 불만을 가진 선수들이 유니폼을 세탁하지 않고 더러운 상태에서 게임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팬들은 <화이트삭스>를 ‘블랙삭스’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승부조작이라는 어두운 이미지가 딱 맞아떨어져 ‘블랙삭스 스캔들’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메이저리그 구단주 협의체의 리더인 케네소 랜디스는 이들 8명에 대해 영구 제명 조치를 취했고, 이들은 두 번 다시 야구계로 돌아올 수 없었다.
구단의 세탁비 미지급에 대한 항의 표시로 유니폼을 세탁하지 않고 경기를 하는 '화이트'삭스 선수들. 상태는 '블랙'삭스에 가깝다.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이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8명의 주전 선수가 영구 퇴출되면서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실망한 팬들은 대부분 <시카고 컵스>로 응원팀을 갈아탔는데, 결국 이것이 지금까지도 <화이트삭스>가 <컵스>에 비해 팬 층이 얇은 이유가 되었다.
영구제명되어 다시는 야구장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8인의 추방자'들.
재판 과정에서 ‘맨발의 조(Shoeless Joe)’ 조 잭슨은 끝까지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잭슨은 메이저리그 역대 타율 3위를 기록하며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만한 실력과 성적을 거뒀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명예의 전당에 끝내 오르지 못했다. 조 잭슨은 끝끝내 복권되지 못한 채 1951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1990년대에 커미셔너 버드 셀릭이 해당 사건을 재조사했으나 역시 복권되지 못하여 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바로 이 조 잭슨이 영화 ‘꿈의 구장’의 주인공 ‘맨발의 조’이다.
초기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였지만 끝내 야구장으로 돌아오지 못한 ‘맨발의 조(Shoeless Joe)’ 조 잭슨.
영화 '꿈의 구장'에서 ‘맨발의 조(Shoeless Joe)’ 조 잭슨 역할을 맡은 레이 리오타
2. 영화 <꿈의 구장>
영화의 주인공인 레이 킨셀라(케빈 코스트너)는 아이오와에서 옥수수 밭을 가꾸는 평범한 농부. ‘맨발의 조’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열혈 팬이었던 아버지는 1919년 ‘블랙삭스 스캔들’로 <화이트삭스>의 주요 선수들이 영구제명을 당하자 매우 침통한 나날을 보냈다. 야구 선수가 꿈이었던 아버지는 레이를 키우기 위해 자신의 꿈은 뒤로 한 채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늙어가는 아버지가 레이는 못마땅했고 세상의 모든 자식이 그렇듯 많은 상처를 주며 사사건건 아버지와 대립했다.
옥수수 밭에 있던 레이는 '그것을 만들면 그가 온다'는 신비한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여느 때와 같이 옥수수 밭에서 일을 하던 레이는 ‘그것을 만들면 그가 온다’는 신비한 소리를 듣는다. 이 이상한 끌림에 레이는 아내는 물론 동네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옥수수 밭을 허물고 야구장을 짓게 되는데, 야구장이 완공되자 옥수수 밭 사이로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했던 이미 죽은 맨발의 조가 나타나고 제명되었던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야구를 하기 시작한다.
옥수수 밭에 지은 '꿈의 구장'에 하나둘씩 나타나 야구를 하기 시작하는 유령 선수들
실제 죽는 그 순간까지 승부조작 혐의를 부인했던 조 잭슨은 레이에게 묻는다. ‘여기는 천국인가요?’ 타의에 의해 그라운드에 설 수 없었던 조 잭슨과 다른 선수들에게 야구를 다시 할 수 있는 이곳은 천국임에 틀림없었다.
아버지가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맨발의 조(Shoeless Joe)’를 만난 레이.
유령 선수들의 야구 경기는 매일 계속되었고, 어느 날 레이는 그 ‘꿈의 구장’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와의 사이가 원만하지는 않았지만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보낸 레이는 아버지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것을 지으면 그가 올 것’이라는 이상한 소리의 ‘그’가 바로 아버지임을 레이는 깨닫는다. 그리고 아버지와 캐치볼을 한다. 그리고 레이는 말한다. ‘여기가 천국인가 봐요’라고.
레이는 이 '꿈의 구장'에서 야구선수가 꿈이었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는 것, 그것이 자신의 '꿈'이었음을 레이는 깨닫는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영화 속 레이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따라 현실을 내던지고 ‘꿈의 구장’을 지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현실에 가로막혔던 꿈을 실현해 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 자신도 꿈을 이룬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와의 재회와 화해는 그의 꿈의 완성이자 아버지 꿈의 완성이기도 하다. 현실을 위해 잠시 접어두었지만 꿈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꿈을 잊지 말라는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가 바로 <꿈의 구장>이다.
실제 아이오와의 옥수수 밭을 개조해서 만든 영화 '꿈의 구장'의 세트 모습. 옥수수밭에 야구장과 레이의 집이 영화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졌다.
3. 꿈은 이루어지다, ‘꿈의 구장’ 경기
영화 ‘꿈의 구장’은 실제 아이오와 옥수수 밭에 야구장을 지어 세트로 사용했는데, 영화 개봉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트장을 찾아왔다. 영화 촬영이 끝난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영화 ‘꿈의 구장’ 속 레이의 집과 옥수수 밭, 그리고 그 밭 한가운데 지어진 야구장은 아직까지도 매년 6~7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아이오와의 명소가 되었다.
영화 '꿈의 구장' 세트장을 찾은 사람들
2019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스포츠마케팅의 귀재들답게 깜짝 놀랄만한 계획을 하나 발표한다. 그것은 영화 ‘꿈의 구장’ 개봉 30주년을 기념하여, 2020년 8월 13일, 바로 이 아이오와의 옥수수 밭 야구장에서 영화 속의 경기인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뉴욕 양키스>의 메이저리그 경기를 실제로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에 메이저리그 팬뿐만 아니라 영화 '꿈의 구장'을 사랑하는 모든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 경기는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19로 인해 결국 취소되고 만다.
아이오와 옥수수 밭에서 실제로 '꿈의 구장' 경기를 개최할 특설 야구장(좌)과 영화 세트장(우)의 조감도
하지만, 모두가 기다리던 이 계획을 그냥 묵혀둘 수는 없었다. 코로나 19가 잠잠해진 2021년 8월 12일, 마침내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뉴욕 양키스> 간의 역사적인 <꿈의 구장> 경기가 성사되었다. 경기가 벌어진 실제 아이오와 옥수수 밭 야구장은 영화 속 야구장 세트 바로 옆에 8000석 규모로 새로 지어졌다. 관중석이 불과 8000석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일 싼 좌석이 150만 원을 훌쩍 넘었음에도 티켓을 구하기 위해 예매 경쟁이 치열했고, 예매 경쟁에서 승리한 8000명의 사람들은 ‘한여름의 꿈’을 마음껏 즐겼다.
'꿈의 구장' 경기에 앞서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옥수수 밭에서 나타난 케빈 코스트너
30여 년 전, 영화에서처럼 선수들이 옥수수 밭에서 나오는 장면을 보고 있는 케빈 코스트너
영화 ‘꿈의 구장’의 주연배우였던, 이제는 백발이 된 케빈 코스트너가 경기장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영화에서처럼 양 팀 선수들이 그 시절 올드 유니폼을 입고 옥수수 밭을 헤치며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많은 팬들은 환호했고 눈물을 흘리는 팬들도 있었다. 선수들이 경기장에 도열한 가운데 케빈 코스트너는 영화 속 대사인 ‘여기가 천국인가요?’ ‘네, 여기가 천국인가 봐요’를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영화 '꿈의 구장'에서 옥수수 밭을 헤치고 등장하고 있는 유령 선수들
2021년 8월 12일, <뉴욕 양키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꿈의 구장' 경기를 위해 영화 속 장면과 똑같이 옥수수 밭을 헤치고 입장하는 양 팀 선수들.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뉴욕 양키스>의 '꿈의 구장' 경기. 케빈 코스트너의 리드로 양팀 선수들이 옥수수 밭을 헤치고 나오면서 많은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당연하게도 이 ‘꿈의 구장’ 매치는 흥행 면에서도 초대박을 쳤다. 미국 전역에서 이 경기를 본 최고 시청자 수는 609만 4천 명이었는데, 이는 2005년 이후 최근 16년간 정규시즌 경기 중 최고 기록이었다. 이 성공에 고무된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그다음 해에는 ‘블랙삭스 스캔들’ 당시 상대 팀이었던 <신시내티 레즈>와 <시카고 컵스>의 경기를 이 ‘꿈의 구장’에서 다시 개최했다. 이 경기가 끝난 후 이 ‘꿈의 구장’은 유소년들의 진짜 ‘꿈’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유소년 스포츠 복합단지’로의 변신을 시작했다. 아마도 이 ‘유소년 스포츠 복합단지’가 완성될 때면, 30여 년 전 소중히 간직하던 꿈을 다시 찾기 위해 모여들었던 이 '꿈의 구장'은 꿈을 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으로 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