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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친 PD Nov 26. 2024

우리들의 배구단, 고려증권

언더독의 반란

우리나라 겨울철 최고 인기 스포츠인 프로배구. 그 프로배구의 전신이 바로 1984년 1월부터 시작된 <대통령배 전국배구선수권대회>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의 이른바 ‘3S(Sex, Screen, Sports)'정책의 일환으로 각 종목별로 스포츠에 대한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던 시기였다. 1982년엔 올 시즌 천만관중 시대를 연 프로야구가, 그 다음 해인 1983년엔 프로축구가 연이어 출범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으로 프로스포츠가 시작되었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는 출범부터 많은 인기를 모으면서 흥행 대성공을 거두었고, 지역연고를 표방하면서 각 팀들은 지역을 중심으로 손쉽게 안착했다. 야구와 축구의 성공적인 프로리그 출범을 목격한 농구협회와 배구협회는 앞 다투어 현재 무주공산인 동계시즌에 수개월 간의 장기레이스를 펼치는 겨울철 리그를 기획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점보시리즈>와 <백구의 대제전>이라 불리는 <대통령배>대회였다.      

1984년 1월. 마침내 겨울철 장기레이스인 <대통령배 남녀배구대회>가 시작되었다.

<현대>와 <삼성>의 라이벌 승부에 새롭게 떠오른 <중앙대>의 가세로 치열한 승부를 벌이며 큰 인기를 모은 농구와 달리 호화군단 <현대자동차서비스>의 독주로 싱거운 승부가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언더독으로 평가받던 한 팀의 선전으로 배구 역시 만만치 않은 인기를 끈다.  

    

바로 돌풍의 핵심이었던 그 팀은 <고려증권>. 리그 시작과 동시에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한 <현대>를 2년 연속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한 <고려증권>의 끈끈한 플레이는 강자들에게 치어 먹고살기 힘들었던 서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다. <현대>가 ‘오빠부대’로 대표되는 소녀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면 <고려증권>은 고단한 세상살이를 하던 이 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1. 고려증권 1(1984~1990)

라이벌 <현대>가 막대한 자금력으로 주요 선수들을 싹쓸이해가던 80년대 후반부터의 이미지 때문에 <현대>에 비하면 <고려증권> 선수들이 마치 외인구단처럼 느껴지지만, 이건 착각이다. ‘백구의 대제전’ 초기의 멤버들을 보면 <고려증권>과 <현대>의 전력은 의외로 팽팽했다. 물론 <현대>에는 우리나라 선수로는 드물게 해외에서 뛰고 있던 남자배구의 에이스 강만수와 이인, 이탈리아 리그에서 최고 외국인선수상과 리그 MVP를 3회 수상하며 세계 최고의 세터로 불리고 있던 김호철이 가세하여 이름값으로는 다소 <현대>가 앞서 있었지만, <고려증권>에도 강만수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평가받던 장윤창과 정의탁, 유중탁과 같은 뛰어난 중앙 공격수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장윤창-정의탁-유중탁. 초기 고려증권의 국가대표 3인방

사실 <고려증권>의 회장은 다른 실업팀과 같은 자금력이 없었기 때문에 배구단 창단을 할 경우 성적에 대한 걱정이 있었고, 당시 주요 대학 졸업 선수 8명을 확보할 경우에만 창단을 하겠다고 공언을 한 상태였는데 이에 따라 대학 최대어 장윤창은 동기들과 함께 <고려증권>행이 결정되어 있었다. 이를 지켜본 <현대>가 뒤늦게 장윤창 영입을 전제로 창단을 시도했는데, 장윤창은 <고려증권>행이 결정된 다른 선수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현대>가 제시한 백지수표도 마다하고 <고려증권>을 선택했다. 장윤창을 놓치며 선수수급에 차질이 생긴 <현대>가 부랴부랴 해외에서 뛰던 강만수와 이인을 데려오게 된 것이다.  

장윤창과 강만수. 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의 에이스로 명승부를 펼친다.

만약 장윤창이 <현대>를 선택해 강만수와 좌우 쌍포로 뛰었다면 2000년대, 김세진-신진식 듀오를 앞세워 리그를 평정한 <삼성화재>처럼 초기 ‘백구의 대제전’의 판도는 <현대>의 독주로 싱겁게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장윤창이 <고려증권>을 선택함으로써 한국 배구의 에이스 강만수는 <현대>, 당시 강만수와 쌍벽을 이루던 거포 강두태는 <금성>, 한국배구의 떠오르는 차세대 에이스 장윤창은 <고려증권>에 포진하게 되어 이 세 팀 간의 대결은 개막부터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강만수-장윤창과 함께 한국 남자배구 3대 거포로 활약한 강두태(금성).  안타깝게도 1991년 3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호화군단 <현대자동차서비스>가 그래도 우세할 것이라는 전망은 첫 해부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장윤창과 유중탁, 정의탁 등 젊은 국가대표 3인방을 앞세운 <고려증권>은 특유의 끈끈한 수비력과 조직력까지 받쳐주며 84년, 85년 2년 연속 <현대>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1회와 2회 대회를 모두 내주며 자존심이 크게 상한 <현대>는 이탈리아 리그에서 뛰던 세계 최고의 세터 김호철을 불러들이고 당시 대학 최고의 스타였던 이종경을 영입하며 반격에 나선다.

당시 세계 최고리그인 이탈리아리그에서 MVP를 3회 수상한 세계최정상의 세터 김호철. 감독 시절 열정적인 모습과 달리 매우 냉철한 토스워크로 팀을 이끌었다.

김호철의 현란한 토스워크에 이종경과 양진웅의 높이가 빛을 발하며 <현대자동차서비스>는 내리 3번의 대회를 우승, 3연패를 달성한다. 하지만, <고려증권>은 1988년, 당시 대학 최대어였던 이재필을 잡는 뜻밖의 성과를 거둔다. 당시 대학 최대어들은 모두 <현대>가 싹쓸이하다시피 하며 큰 기대가 없던 상황에서 <금성>까지 이재필 스카우트 경쟁에 뛰어들어 사실 상대적으로 자금이 부족하던 <고려증권>에는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였는데 ‘장윤창, 정의탁 등 존경하는 선배들과 같이 뛰고 싶다’며 이재필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이재필이 가세한 <고려증권>은 6회, 7회 대회에서 연속으로 <현대>를 물리치고 우승, 설욕에 성공한다. 치열한 승부를 펼친 두 팀은 <현대>가 세 번의 우승을, <고려증권>이 네 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고려증권> 1기를 마감한다.   

환호하는 고려증권 선수들. 아래부터 장윤창 - 이재필 - 정의탁

2. 고려증권 2기(1991년~1998년)

<고려증권>이 진짜 언더독의 대명사가 된 것은 90년대, 소위 <고려증권> 2기라고 불리는 시기였다. <백구의 대제전>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한양대, 성균관대, 인하대, 경기대 등에서 뛰어난 선수들이 다수 배출되며 한국 남자배구의 전성기가 오게 되는데, <현대>는 하종화, 윤종일, 마낙길, 임도헌, 노진수, 강성형 등 몇 년에 걸쳐 당대 대학 최대어들을 싹쓸이한다. 배구도사로 불리던 박희상은 한장석, 최천식이 버티고 있던 <대한항공>으로, 명가 재건을 위해 안간힘을 쓰던 <금성>은 에이스 이상열에 서남원 등이 가세하며 만만치 않은 전력을 구축하는데, 이렇게 경쟁 팀들의 막강한 자금력에 밀리고 장윤창, 정의탁, 유중탁 등 <고려증권> 전성기의 핵심 멤버들이 노쇠해 가면서 <고려증권>은 최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대한민국 남자배구를 이끌던 <현대자동차>의 에이스 하종화와 노진수

이 위기 속에서 <고려증권> 특유의 저력이 발휘된다. 대학 최대어들을 다른 실업팀에게 모두 뺏겼지만, 제 발로 찾아온 이재필이 건재했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는 준척급 선수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서울시청 돌풍의 핵심이었던 3인방 이성희-어창선-박삼용을 한꺼번에 데려오는 데 성공했고, 레프트와 라이트에 이수동과 문병택을 영입하는데, 대학 시절에는 평범한 선수였던 이 두 선수는 <고려증권> 입단 후 펄펄 날면서 배구 인생의 꽃을 피우게 된다. <고려증권> 2기 후반에는 박선출과 손재홍을 보강하면서 나름대로 한 번 해볼 만한 전력을 갖춘다.

이경석에 이어 <고려증권> 2기를 이끌던 세터 이성희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고려증권> 2기의 핵심전력은 홍해천이었다. 당시 진준택 감독은 공격력 위주의 팀 컬러를 탄탄한 수비력과 끈끈한 조직력을 갖춘 ‘쉽게 지지 않는 팀’으로 바꾸려고 했다.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한 경쟁 팀들을 상대로 <고려증권>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던 것이다. 이런 팀 전략의 핵심은 뛰어난 수비실력을 가지고 있던 홍해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리베로가 없던 시절, 이미 리베로급 활약을 했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격수들의 강 스파이크를 수도 없이 건져낸 홍해천의 전설은 이렇게 탄생한다.

은퇴 후 송림고 감독으로 부임해 많은 우승을 차지한 수비의 귀재 홍해천 감독

물 샐 틈 없는 수비력을 바탕으로 한 <고려증권>의 끈끈한 조직력은 스타군단들의 발목을 잡았다. 많은 배구 팬들은 <고려증권>을 보면서 자신들을 투영했다. 기득권층의 삶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족들을 위해 그렇게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위대한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고려증권>이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한 <현대>를 꺾고 승리하는 것은 큰 위안과 기쁨을 주었다.


8회 대회는 <구의 대제전> 출범이래 최대 이변을 일으킨 하종화의 한양대가, 9회 대회는 스타 선수들의 입대로 사실상 스타군단이었던 상무가 차지한 후, 1993년 10회 대회에서 <고려증권>은 다시 <현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11회 대회에선 스타플레이어들이 대거 입단한 <현대>와 결승에서 만나 피 말리는 접전 끝에 석패했지만, 1세대 선수들이 거의 은퇴한 가운데 거둔 성과라서 큰 의미가 있었다.

스타플레이어는 한 명도 없지만 끈끈한 조직력으로 정상에 오른 <고려증권>

1995년, ‘대통령배 전국배구선수권대회’에서 ‘슈퍼리그’로 겨울철 배구리그의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 첫 해 ‘슈퍼리그’에서 <현대>는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우승을 차지하는데 제희경, 박종찬, 윤종일 등의 중앙공격수들이 <고려증권>을 완벽하게 제압한 결과였다. <고려증권>은 구본왕 - 후인정 - 박선출의 경기대 3인방 중 센터였던 박선출을 영입하면서 다음 시즌을 대비했다.

고려증권의 마지막 센터 박선출. 팀 해체 후 <대한항공>으로 드래프트 되었다.

1996년 ‘슈퍼리그’는 <고려증권>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팬들의 가슴속에 새긴 시즌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주포 박삼용과 이수동의 활약과 더불어 라이트 문병택이 본인의 배구인생의 최고의 활약을 한다. 사실상 국가대표라고 평가받던 <현대>와 <금성>에서 이름을 바꾼 <LG화재>를 물리치고 감격의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데, <현대> 공격수들의 줄기찬 공격을 놀라울 정도로 걷어 올린 챔피언 결정 4차전의 <고려증권> 선수들의 투혼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무명에서 깜짝 스타로. <고려증권>에서 배구인생의 최고 정점을 찍은 문병택.  팀 해체 후 <LG화재>로 드래프트 된다.

이 96 슈퍼리그 <고려증권>의 우승은 종목을 불문한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언더독’의 반란으로 손꼽힌다. 선수 면면을 비교할 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골리앗을 꺾은 다윗에 비교할 수 있는 시즌이었다.   

한국을 휘청이게 만든 IMF 외환위기

1997년, 대한민국은 ‘IMF사태’로 휘청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을 했고 많은 기업들이 쓰러져 갔는데, 그 기업 중에 <고려증권>이 있었다. <고려증권> 배구단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97년 슈퍼리그는 김세진, 신진식, 김상우 등을 모두 싹쓸이하며 창단한 <삼성화재>가 최강자로 등극한 해였다. 제대로 된 지원조차 받지 못한 상태로 여관방을 전전하면서도 <고려증권>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삼성화재>와 <현대>에 이어 3위. 이것도 기적 같은 결과였다.

IMF 후 연이어 들려오던 기업들의 부도 소식. 좌하단에 고려증권의 부도 소식도 보인다.

<고려증권> 배구단의 매각이 결정되고 인수할 기업을 찾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1984년부터 시작한 '대통령배 배구리그'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팀이자 98년까지 최다 우승팀이었던 <고려증권>을 인수하겠다는 기업은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시기였지만, <삼성화재>와 <현대>의 벽을 넘을 수 없으리라는 기업들의 현실적인 판단도 있었다.   

환율 상승으로 괴로워하는 외환딜러들

결국 팀 해체가 결정된 97-98 시즌, 마지막까지 <고려증권> 선수들의 눈물겨운 사투는 많은 배구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회 참가할 비용도 없어 협회의 지원으로 참가한 <고려증권>은 97 슈퍼리그 1차 대회에서 <현대>와 <LG화재>를 꺾는 등 마지막 파란을 일으켰다. 외환위기의 살벌한 한파 속에서 한순간에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된 수많은 넥타이 부대가 <고려증권> 경기가 있는 날이면 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그들은 단 한 푼의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도 꿋꿋이 이미 망해 버린 <고려증권>의 로고를 달고 사력을 다해 싸우는 선수들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그들은 ‘고려증권 힘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열광적인 응원을 했고, <고려증권>이 승리할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고려증권> 배구단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진한 감동을 안겨주고 해체됐다. 우리들의 배구단 <고려증권>은 우리들의 삶의 한 조각으로 남은 채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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