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세계 축구계에서 한국 축구가 이렇게 주목받던 시대가 있었을까? 그것도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처럼 깜짝 성적을 올려 국가대표 팀 자체가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기량으로 한국선수들 개개인이 세계무대를 누비며 주목 받는것을 상상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2002년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4강 진출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시작으로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하고 있는 지금의 한국 축구만을 경험한 젊은 세대들에겐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한국 축구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첫 출전한 이후 무려 32년 동안이나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하던, 세계 축구의 변방 중에 변방이었던 시절,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 하나가 있었다.
세계 축구의 변방이었던 한국은 <83'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세계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사진은 멕시코와의 조별 예선 2차전
그 사건은 <83’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의 4강 진출이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세계 4강 신화를 일궈낸 청소년대표팀은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미친 듯이 그라운드를 누비며 해외 언론으로부터 ‘붉은 악령들’이라고 불렸다. 이제는 대한민국 축구하면 함께 떠오르는 국가대표 서포터스 ‘붉은 악마’를 탄생시킨 1983년 6월, 멕시코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 드라마와 같았던 본선 진출
<83’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우리 청소년대표팀의 4강 진출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없었다. 아직 우리의 전력이 세계수준과 거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 사실 본선 진출 자체도 행운이었기 때문이다.
<83’ 세계청소년축구대회>를 위한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은 북한과 4강에서 만나 난타전 끝에 5-3으로 패배, 본선 진출에 실패한다. 당시 아시아에 주던 본선 티켓이 2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본선 진출에 실패한 데다가 그것도 당시에는 반드시 이겨야 할 상대였던 북한에 패배한 탓에 청소년대표팀에 대한 비난은 몹시 거셌다.
그런데 그 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82’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북한 축구 대표팀이 쿠웨이트와의 준결승전에서 2-3으로 패한 후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태국 심판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추태를 일으킨 것이다. 관중석에 있던 북한 응원단까지 가세하여 그라운드는 순식간에 통제 불능의 난장판이 되었고 터번을 두른 채 곤봉을 휘두르며 몰려든 인도 경찰에 의해 가까스로 진압되었다. 북한 축구는 이 사건으로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2년간 모든 국제대회 출전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이로 인해 <83’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아시아예선에서 북한에 패배하며 3위에 그쳤던 한국이 북한 대신 출전하게 되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82' 뉴델리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준결승전에서 쿠웨이트에 2-3으로 패한 북한은 심판을 폭행하는 추태를 부린다. 이 사건으로 북한은 2년간 국제대회 출전정지를 당한다.
2. 박종환 사단
83년 청소년대표팀의 상징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2023년 작고한 故 박종환 감독이다. 박감독은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그라운드 전체를 ‘벌떼’처럼 뛰어다니는 한국식 토털풋볼, ‘벌떼 축구’를 만들어내면서 한국 축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다.
한국 청소년 대표팀의 사상 첫 4강 신화를 이끈 박종환 감독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박종환 감독은 다시 찾아 온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호흡하기가 어려운 고산지대, 멕시코에서 열리는 대회인 만큼 희박한 산소에 대한 적응이 가장 중요할 것으로 판단, 선수들에게 마스크를 착용하고 풀타임 연습경기를 시켰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전해진다. 강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외인구단을 방불케 한 지옥훈련을 통해 선수들이 90분 내내 경기장을 쉴 새 없이 뛰어다닐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갖추게 되면서 박종환 감독의 ‘벌떼 축구’는 빛을 발하게 된다.
산소가 희박한 고지대인 멕시코대회를 대비하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고 훈련하고 있는 청소년축구대표팀
사실 한국 축구계의 주류가 아니었던 박종환 감독의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박종환 만의 전술을 통해 성적을 내는 것, 그것이 유일하게 인정받는 길이었고 그는 결국 ‘벌떼 축구’를 통해 한국 축구계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한국 축구계에서의 그의 역할은 이회택, 김호, 김정남 등 한국 축구의 엘리트들에게 대표팀 감독의 기회가 먼저 주어졌다가, 성적부진으로 위기에 빠지면 항상 구원투수로 투입되어 팀을 수습하는 것이었다. 현재까지도 위기의 팀을 수습하는 역할로 그보다 더 능력을 보여준 감독은 없었다.
86년 실업리그에서 우승한 서울시청의 박종환 감독이 헹가레를 받고 있다.
그래서 그가 팀을 맡으면 항상 그 팀은 ‘박종환 사단’이라고 불린다. 그의 색깔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팀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옥훈련을 통한 체력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전술을 만들다 보니, 그 과정이 선수들에게는 항상 고통스러웠고, 결코 있어서는 안 될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선수단을 장악하는 등, 강압적이고 가혹한 지도 방식은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성인 팀을 맡으면서는 상당수의 선수들로부터 반발을 사고 일부 선수의 고의 태업 루머까지, 명암이 뚜렷한 감독이기도 하다. 전반전의 경기력에 문제가 있으면 시합도중에도 락커에서 폭력을 행사했다는 증언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다.
강한 카리스마로 한국축구의 역사를 썼지만, 강압적이고 가혹한 지도방식으로 늘 비판이 따라다녔던 박종환 감독
3. 붉은 악마의 탄생, 세계 4강 신화
본선에서의 조 편성은 험난했다. 홈팀 멕시코와 호주, 스코틀랜드와 같은 조에 속해 2위까지 주어지는 8강 티켓을 한국이 가져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상대로(?) 스코틀랜드와의 첫 경기에서 2-0으로 완패하면서 1점이라도 승점을 따내고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예선 2차전부터 반전이 생겼다.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홈팀 멕시코와의 대결에서 여러 명이 협력하여 특정 공간에서 수적 우위를 점해 볼 소유시간을 늘려 나가기 시작했고, 4~5명의 빠른 공격수들을 투입하여 수비진을 교란시키는 이른바 ‘벌떼 축구’를 통해 멕시코에 2-1 역전승을 하는 뜻밖의 성과를 거둔다. 특히 노인우의 기가 막힌 동점 터닝슛과 후반 44분에 터진 에이스 신연호의 극장골은 온 국민을 열광시켰다.
83 청소년축구대표팀의 에이스 신연호 현 고려대학교 감독. 고비마다 결정적인 골을 터트리며 한국의 4강진출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2차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3차전 호주와의 경기도 반드시 이겨야 8강 진출이 가능한 상황. 이 경기에서도 김종건과 비운의 스타 김종부의 골로 2-1 승리하면서 마침내 한국 청소년대표팀은 조 2위로 8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한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세계대회에서 조별 예선을 통과한 것이다.
청소년대표팀의 8강 진출로 대한민국 전체가 들썩거렸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한국시간으로 오전에 있었던 8강전 당일,교장 선생님의 특별 지시로 수업을 중단하고 대강당에 모여 중계방송을 시청할 정도였다.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학교에서도 다 같이 모여 응원을 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축구 거리응원의 원조가 되었다.
조별 예선 마지막경기에서 호주를 꺾고 8강 진출을 확정한 한국 청소년대표팀
8강전 상대는 축구 강국 우루과이. 모두 프로선수로 구성된 우루과이가 당연히 객관적인 전력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한국 대표팀의 투혼은 놀라웠다.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한국 선수들은 정말 쉴 새 없이 뛰어다녔고, 신연호의 선제골이 터졌다. 하지만 결국 마르티네스에게 동점골을 허용하고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 ‘벌떼 축구’는 연장전에 더 빛을 발했다. 우루과이 선수들은 지쳐 보였다. 하지만 우리 청소년대표 팀은 연장에도 끊임없이 뛰고 있었다. 연장 전반 14분, 김종부의 크로스를 신연호가 밀어 넣었다. 한반도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였다. 결국 2-1로 우루과이마저 꺾으면서 사상 최초의 4강 신화를 쓰게 된 것이다.
연장전반 14분에 터진 신연호의 결승골로 한국 청소년축구대표팀은 마침내 4강고지에 오르게 된다.
외신들도 우리나라만큼이나 난리였다. 이 우루과이와의 8강전에서 보여 준 한국 청소년대표 팀의 활동량은 정말 역대급이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한 언론에서 마치 지치지 않는 ‘붉은 악령(Red Furies)’같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 날부터 한국 대표팀은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고 불렸다. 외신들은 이 ‘붉은 악령(Red Furies)’들의 4강 진출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한국 청소년축구대표팀의 8강과 4강 진출을 보도한 당시 스포츠서울 기사
준결승 상대는 브라질. 대회 최강팀이었다. 멤버도 엄청나게 화려했다. 둥가, 베베투, 포포카 등 훗날 브라질 성인 대표 팀의 주축이자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게 되는 뛰어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붉은 악령(Red Furies)’의 기세는 4강전에도 이어졌다.
차세대 한국 축구의 에이스로 각광 받았던 비운의 천재 김종부. 이 대회에서 맹활약한 그는 훗날 이중계약 문제로 선수생활의 큰 시련을 맞게 된다.
전반전에 김종부가 페널티 박스에서 기가 막힌 터닝슛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너무나 멋진 골이었다. 전국이 정말 난리가 났다. 이거 정말 일을 내는구나 싶었지만 결국 브라질의 화려한 개인기량을 이겨내지 못하고 2-1로 역전패, 한국 청소년대표 팀의 위대한 여정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
브라질과의 4강전, 김종부가 선제골을 터트리는 장면
하지만, 이 4강 신화의 여파는 대단했다. 비록 청소년대회이기는 했지만 세계축구 변방인, 그것도 30년 동안 월드컵 본선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던 한국축구가 세계 4강에 올랐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한국 축구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이 대회의 주역이었던 신연호 김종부 이기근 이문영 김판근 유병옥 김종건 등이 성인대표 팀까지 이어지면서 마침내 32년 만에 <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 <86년 멕시코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10회 연속 본선에 진출하는 월드컵의 단골손님이 되었고, 이 대회 한국 팀의 별명이었던 ‘붉은 악령(Red Furies)’은 ‘붉은 악마(Red Devils)’로 바뀌어 한국 축구하면 떠올리게 되는 상징이자 공식 서포터스의 시발점이 되었다.
<83'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 신화를 쓴 선수단의 환영 카퍼레이드. 왼쪽에 박종환 감독의 절친인 인기 코미디언 이주일의 모습이 보인다.
<83'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 신화를 쓴 선수단의 환영 카퍼레이드. 왼쪽부터 신연호-이문영-문원근
<83’ 세계청소년축구대회>의 4강 신화는 한국 축구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변곡점이었다. 이 대회의 성공을 기점으로 많은 어린이들이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결실은 약 20년 후 2002 월드컵 4강 신화로 이어진다. 2002년 월드컵의 4강 신화는 다시 또 다른 저변을 만들었고 그로부터 약 20년 후 우리는 세계 최초 한국인 프리미어리그 득점왕과 유럽 빅 클럽 곳곳에서 뛰고 있는 한국 선수들을 보게 되었다. 이제부터 20년 후 한국 축구는 또 어떻게 될지, 그것이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