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의 인생이야기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열린 1992년 8월 9일. 경기 종반, ‘몬주익 언덕’에서 한 선수가 질주를 시작했다. 관광객들에게는 바르셀로나의 탁 트인 도심과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관광 명소였지만, 참가 선수들에게는 지옥과 같았던 이 ‘몬주익 언덕’에서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질주를 시작한 선수는 대한민국의 황영조.
바르셀로나 올림픽 측은 마라톤 경기에서 1위가 결승선에 들어오는 시간을 석양이 지는 시점과 잘 맞도록 치밀하게 계산했다. 이 때문에 황영조가 석양 속에서 마지막 언덕을 넘어 몬주익 주 경기장을 향해 사력을 다해 질주 하는 모습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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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황영조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대한민국은 열광했다.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환희의 눈물을 흘리던 황영조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관중석으로 향했고 관중석에 있던 老신사에게 와락 안겼다. 그리고 그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었고, 老신사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 老신사는 바로 56년 전 오늘인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땄던 손기정이었다.
한국 마라톤의 전설 손기정은 1912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손기정은 스무살이 되던 1932년, 경성부에서 열린 제2회 동아 마라톤에서 2위를 하며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대회에서의 활약 덕분에 당대의 걸출한 마라토너들을 배출한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 남승룡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양정고보 육상부는 조선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이름이 알려져 있는 명문학교였다. 그중에서도 손기정은 남승룡과 함께 주요 대회를 번갈아 우승하며 양정고보의 에이스로 떠올랐고 1935년에는 최고 권위의 도쿄 메이지 신궁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에 처음 출전하여, 2시간 26분 42초이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당시 비서구권에서 열린 대회는 코스 길이를 신뢰할 수 없었던 까닭에 공인받지는 못했지만 마라톤 풀코스 최초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깬 기록이기도 했다.
1936년에는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의 마라톤 대표 선발전이 치러졌다. 일본은 4년 전인 1932년 LA 올림픽 당시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던 김은배, 권태하가 일본 선수의 페이스메이커를 해주라는 전략을 무시하고 각각 6위, 9위를 기록했던 악몽이 있어서, 이번 선발전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로만 대표팀을 구성하려 했다.
그러나 손기정과 남승룡의 실력은 당대 최고였다.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었는데 일본은 이 둘 중 한 명을 어떻게든 탈락시키려는 속셈으로 원래 3명으로 구성된 대표팀을 4명으로 확대, 일본인 선수 2명을 대표팀에 합류시켰고, 올림픽을 얼마 앞두고는 현지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전대미문의 2차 선발전을 현지에서 다시 치르는 비상식적인 운영을 보였다.
그러나 현지 테스트에서도 이 둘을 따라잡지 못하자 일본 선수들은 몰래 코스를 이탈하면서 지름길로 가는 반칙까지 저질렀고, 지름길로 왔으면서도 늦게 들어온 일본 선수에게 남승룡은 뺨을 때리며 격분했다. 일본 육상연맹은 이 일로 남승룡을 징계하려 했으나 다행히 올림픽 본선 경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표 선발전 1위였던 남승룡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결국 2차 선발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사이좋게 1, 2위를 나눠 가졌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 마라톤 대표는 손기정, 남승룡, 시와쿠 타마오 3인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이 대일본제국의 대표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반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워낙 압도적인 실력의 두 선수인 데다 당시 대외적으로도 일본이 내세우던 슬로건이 내선일체(內鮮一體)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변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1936년 8월 9일, 마침내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는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공인 세계 신기록 보유자 아르헨티나의 후안 사발라였다. 손기정은 선두로 나가지 않고 처음부터 사발라 뒤를 바짝 붙어 따라가는 작전을 펼쳤다. 사발라는 바짝 따라오는 손기정을 의식해 평소보다 속도를 높였는데, 결국 이것이 패착이 되어 오버페이스를 하게 된다. 코스 후반 만나게 된 ‘비스마르크 언덕’. 언덕길에서 오버페이스로 체력이 고갈된 사발라가 쳐지고 손기정은 마지막 스퍼트를 통해 1위로 치고 나갔다. 56년 후,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언덕’을 승부처로 보고 중반까지 체력을 비축했다가 ‘몬주익 언덕’에서 마지막 스퍼트를 통해 금메달을 따낸 황영조의 작전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침내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1위로 골인한다. 손기정과 같이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승부를 걸었던 남승룡은 언덕길에서만 무려 30여 명을 따돌리고 3위를 기록, 올림픽 금메달과 동메달을 동시에 획득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함께 출전한 유일한 일본인 시와쿠는 완주에 실패했다.
관중석에 있던 일본인들은 일장기를 휘날리며 열광했다. 하지만, 정작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낸 손기정과 남승룡의 얼굴엔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고,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승리의 세리모니도 없었다.
이어진 시상식에서도 두 선수의 모습은 침울하기만 했다. 메달 수여가 끝나고 기미가요가 울려 퍼졌을 때, 두 선수는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정면에서 올라가는 일장기를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손기정은 1위에게만 주어지는 부상인 참나무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완벽하게 가렸다. 남승룡은 바지를 명치까지 끌어올려 조금이라도 일장기를 가리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세계를 제패한 두 조선인 청년의 서글픈 모습은 흑백 필름과 몇 장에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동메달을 차지했던 남승룡은 훗날, ‘기정이가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보다, 묘목을 받아 그것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마라토너로서 올림픽 무대를 정복한,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기뻐해야 할 날에 오히려 슬픔에 사무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승리였다.
손기정과 남승룡의 올림픽 제패는 국내에서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우승 소식을 다루면서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하여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길용, 현진건 등 관련자 수십 명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동아일보는 무기한 정간 조치를 받았다.
이런 파동 속에서도 나라 잃은 두 청년의 이 슬픈 승리는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엄청난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당연히 손기정은 국민적인 영웅으로 존경받게 되는데 조선 총독부는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엄중한 통제와 감시 속에 그를 귀국시켰고, 올림픽 영웅에 걸맞은 환영 인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통해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 강화를 바짝 경계하던 조선총독부는 아무 죄 없는 손기정에게 사복경찰을 붙여서 감시했고, 손기정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이 모여드는 것도 허락치 않았다.
자신 때문에 신문이 정간되고 많은 기자가 복역을 하는 등 고초를 당했다는 트라우마와 마치 사상범을 다루듯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일본 경찰의 감시는 손기정의 은퇴를 이끌어 냈다. 24살의 젊은 마라톤 황제는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다시 마라톤을 하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손기정은 다시 돌아왔다. 그해 10월, 조선체육회가 개최한 '자유해방 경축종합경기대회'에서 손기정은 기수를 맡았다. 일장기를 달고 가장 슬픈 승리를 해야 했던 손기정은 개막식에서 태극기를 들고 감격에 겨워 마냥 눈물을 흘렸다.
해방 이후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감독으로서 태극기를 달고 마라톤 세계대회에 나갈 선수를 양성하려는 것이었다. 일장기를 달고 뛰었던 자신의 한을 풀어 줄 선수로 서윤복이 선택되었고, 자신과 함께 할 코치로 둘도 없는 친구이자 평생의 라이벌 남승룡을 선택했다.
손기정과 남승룡, 그리고 서윤복. 이 세 사람은 1947년 세계 최고 권위의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참가를 선언한다. 미군정의 도움으로 여비를 마련하고 미군 군용기를 얻어 타는 등 대회 출전 자체가 힘든 여정이었지만 해방 후 처음으로 태극기와 'KOREA'라는 글자를 가슴에 선명하게 새긴 채 출전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마침내 서윤복은 감격의 우승을 차지한다. 11년 전, 침울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승리를 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의 얼굴에 비로소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우리의 이름으로 기록된 최초의 우승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기쁜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