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많이 해도 표현력이 부족한 아이들
어느 날 동네에서 만난 어머님께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씀하셨어요.
“우리 아이가 책은 정말 많이 읽는데 친구들이랑은 잘 안 어울리려는 것 같아요.
쉬는 시간에도 앉아서 책만 읽어요.”
공부도 잘하고 임원도 도맡아 하는 아이인데
묘하게 친구들과는 거리를 두는 자녀를 보며 걱정하시는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 저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드려요.
“괜찮아요. 그냥 교양이 풍부해서 친구들과 대화 수준이 안 맞는 걸 수도 있어요.”
그러면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안도와 웃음을 함께 지으시지요.
예전에는 학급 아이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 운동 잘하는 아이, 책만 읽는 아이, 놀기 좋아하는 아이처럼요.
그런데 요즘은 다릅니다.
한 반에 23명이 있다면, 정말 23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집집마다 문화가 다르고 아이들이 접하는 콘텐츠와 매체도 제각각입니다.
그래서 "책만 읽는 아이 = 친구가 없는 아이" 라는 공식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책 읽는 시간을 좋아하고 쉬는 시간엔 혼자 조용히 머무는 걸 선호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성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협동 활동이나 모둠 수업에서는 잘 어울리는 경우도 많아요.
문제는 부모님이 ‘저러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 아닐까’ 하며 불안을 키운다는 겁니다.
그 불안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달되면
아이들은 오히려 부모의 기대에 맞추려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억지로 친구들과 텐션을 맞춰 지내려고 노력을 하거나
좋아하지도 않는 아이돌 이야기를 나누며 대화에 끼기 위해 애를 쓰기도하지요.
이런 아이들은 기다려 주면 학년이 올라가면서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 또 일상을 잘 살아갑니다.
아이들의 유형이 워낙 다양하니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는 데에 시간이 걸릴 뿐이지요.
자연스레 마음 맏는 친구가 생길 수도 있고
또 굳이 안맞는 친구랑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중에는 교우관계가 어려운 친구들도 분명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기 때문에 어휘력도 풍부하고 표현력도 풍부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친구들과의 의사소통 앞에서는 어려움을 느끼지요.
이런 친구들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말하기 능력이 함께 늘지는 않습니다.
마치 매일 미국 드라마를 본다고 영어 회화가 저절로 느는 게 아닌 것처럼요.
아이들이 책에서 수많은 어휘와 표현을 접하더라도
그것을 내면화 하여 실제 대화 속에서 ‘내 말’로 꺼내보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표현력은 읽는 양도 중요하지만 자기화된 경험의 양에 특히 비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 속 문장을 나의 말로 바꾸고
그 말을 실제 상황에서 사용해보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책을 많이 읽는 아이들 중에는
대화할 때 문어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가 장난스럽게 “야~ 너 뭐야~”라고 하면
“그것은 내 의도가 아니었어.” 처럼
문어체스러운 문장으로 또박또박 대답하지요.
이럴 땐 또래 아이들은 그 친구에게 어색함과 거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와의 충분한 대화 연습이 중요합니다.
아이와 일상적인 대화를 자주 하며
책 속 문장이 아닌 생활 언어로 표현하는 연습을 시켜주세요.
학습만화는 상식이나 흥미를 넓히는 데엔 좋은 도구입니다.
하지만 ‘말 표현’을 배우기 위한 교재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만화 속 인물들이 쓰는 말투는
대체로 과장되고 감정이 과하게 드러나며 예의가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투를 그대로 따라 쓰면
아이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기보다
‘재미는 있지만 어색한’ 표현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친구들 역시 오버스러운 느낌을 불편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이의 말이 친구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함께 이야기해보세요.
그런 연습이 아이의 말에 자연스러움을 더해줍니다
책 속의 주인공은 완벽하게 대사를 주고받지만
현실의 대화는 늘 즉흥적이고 예측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먼저 필요한 건 완벽한 문장이 아니라
말을 먼저 꺼낼 수 있는 용기와 상황에 맞게 시작하는 센스입니다.
생각이 많은 아이, 책을 좋아하는 아이일수록
머릿속에서 문장을 완성하느라 타이밍을 놓치곤 합니다.
하지만 친구 관계에서 중요한 건 '정확한 문법’이 아니라
‘상황을 읽고 말을 걸어보는 용기’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가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면,
“오, 너 진짜 잘한다! 나도 한 번 해봐도 될까?”
이렇게 짧고 자연스러운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대화의 시작은 기술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그리고 그 용기에는 상황을 살피는 감각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지금 말 걸어볼까?’ 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아이의 표현력은 조금씩 자라고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아이들은 문장력과 어휘력이 뛰어나지만
간혹 지나치게 교과서스러운 문장들을 그대로 말로 옮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의도가 아니었어.”
“그 아이의 행동은 정말 옳지 않았어.”
이런 말은 책에서 자연스럽게 쓰이지만
현실의 대화에서는 조금 어색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아이 스스로는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또래 친구들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지거나
‘잘난 척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가볍게 이렇게 되짚어주는 게 좋아요.
“그 말 멋있다. 그런데 친구한테는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라고 하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
책 속 언어를 그대로 흉내 내는 건 글쓰기 연습에는 도움이 되지만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는 반드시 생활 언어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표현력은 특별한 상황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매일의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들에게 들었던 재미있는 이야기,
취미생활 등 작은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함께 대화를 나누어 주세요.
이때 부모님께서 꼭 지켜주셔야 할 일은
아이의 말을 듣고 가르치거나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말에 친구처럼 반응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오, 진짜?”
“어머, 걔 완전 웃기다!”
이런 리액션은 아이에게
‘나의 이야기를 듣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대화의 목적이 교훈이 아니라 공유의 즐거움이 되면
아이는 훨씬 더 풍부하게 표현하고 자연스럽게 감정을 말로 풀어냅니다.
또한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표현력을 키우는 연습을 통해
매일의 대화 속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길러주시기 바랍니다.
책은 마음을 키워주고 말은 세상을 넓혀줍니다.
읽기와 말하기가 함께 자랄 때 아이의 진짜 표현력이 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