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피터 팬>
<피터 팬>은 그 시절의 추억에 절대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영화다. 그것은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절실함이 어디까지 미쳤을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다. 만화영화라고 하면 어린이용 영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른 없이 가기는 힘들었다. 특히나 막 개봉한 새로운 영화라면 더욱더 그랬다. 보고 싶어 죽겠는데도 그 시점에 날 데려갈 가족이 아무도 없다면? 바로 그런 어려움을 내게 처음으로 경험하게 해 준 영화가 <피터 팬>이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선택했던 어른은? 바로 담임 선생님이었다. 일직으로 근무하고 계신 선생님을 찾아가서 떼를 쓰다시피 졸라서 이뤄낸 결과였다. 어떤 미사여구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감사드릴 뿐이다.
지금은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만화영화’가 정식 용어였다. 그래서 아직도 만화영화라는 말이 정겹게 느껴진다. 만화영화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만화와 영화를 합한 것이다. 만화? 영화? 살짝 비슷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분명히 다른 매체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만화’와 ‘영화’의 차이가 크다고 생각했다. 만화는 어린이용이고 영화는 어른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화는 혼자서 볼 수 있지만 영화는 어른 없이 볼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만화영화만큼은 어린이용이라는 생각에 그걸 보지 못한다는 건 받아 둔 용돈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아서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만화영화라는 장르에 그만큼의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피터 팬>은 주인공이 외국어로 말하는 걸 지켜본 첫 번째 만화영화이기도 했다.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피터 팬>을 보고 그렇게 좋아했던 사실부터가 대견스럽다. 그림 보기도 바쁜데 자막까지 읽어냈으니 말이다. 그런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피터 팬>을 보려는 의지를 무섭게 발휘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월트 디즈니의 ‘피터 팬’을 스치듯 본 적이 있어서다. ‘디즈니랜드(The Wonderful World of Disney)’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아주 짤막하게 디즈니 만화영화 장면을 보여줄 때가 있었는데, 거기서 피터 팬의 모습을 봤던 것이다. 흑백 TV의 조그만 화면에서 감질날 정도로만 봤던 피터 팬을 극장의 커다란 화면 그것도 예쁜 색상의 컬러화면으로 오래도록 만날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이 얘기는 있었던 일이며 또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
피터 팬이 나타난 것은 아이들이 피터 팬을 믿기 때문이죠.
<피터 팬>의 도입부에서 내레이터가 하는 말이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이어져 나올 얘기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대사였다. 있었던 일이고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은, 어느 날 갑자기 피터 팬이 눈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얘기 아닌가. 어린이의 귀에는 너무도 매력적인 말이다. 믿어야만 나타난다는 얘기는 금상첨화였다. 속된 말로 아이들 꼬시기 딱 좋은 말이다. 하지만 생각조차 해 보지 않거나 무조건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피터 팬>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상은? 즐겁고도 재미있는 모험을 하고 돌아온 느낌이었다. 피터 팬이 있는 네버랜드라면 한번 가보고 싶다는 그런 느낌. 우리 집에도 피터 팬이 왔으면 좋겠고, 같이 날아다닐 수 있게 해 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네버랜드에 가서 해적도 인디언도 인어도 보고 싶었고. 일상적으로 얘기할 때는 그런 게 있겠나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구체적인 그림까지 그렸던 것이다, 그런 것을 꿈이라고 하지 않던가. <피터 팬>은 그런 꿈같은 상상을 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 실체였다.
그놈의 피터 팬과 네버랜드가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동네 싸구려 극장에 어른 없이 가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동시상영이지만 <피터 팬>을 뒤에 상영했기에 귀가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갔으니 정말로 모험이었다. 야단맞는 것도 감수할 각오를 하고 갔다는 면에서. 피터 팬이 얼마나 또 보고 싶었으면 그런 만용을 부렸냐고? 피터 팬, 후크 선장, 인어 같이 동화나 전설 속에 나올 것 같은 인물들이 인어 호수, 해골 바위, 큰 나무로 통하는 토굴 같이 신비스러운 공간에서 펼치는 이야기 속에서 용기, 우정, 사랑, 유머까지 전해주니 문자 그대로 판타지(fantasy)를 보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그 시절 나름의 꿈과 상상의 군불을 때는 데에 쏘시개 역할을 해 준 영화가 <피터 팬>이었다.
제임스 M. 배리(James Matthew Barrie)의 원작을 애써 찾아 읽어 보기도 했다. 더 촘촘하고 더 풍성한 피터 팬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기대가 너무 컸던지 조금 실망한 사실을 고백한다. 표준을 월트 디즈니의 피터 팬에 맞춘 탓이 컸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피터 팬’은 <피터 팬> 속의 피터 팬이기에 별로 상관없다며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피터 팬이란 존재를 탄생시킨 원작자께는 죄송하지만 먼저 만나 친해진 디즈니랜드 출생 피터 팬과의 의리가 우선이었나 보다. 심지어 콤플렉스나 증후군에 ‘피터 팬’이란 이름을 집어넣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역할은 하지도 못하면서 핑계나 들이대는 어른들의 잘못을 피터 팬에게 떠맡기다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냐고. 웬디가 어른이 되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인 피터 팬이 도대체 뭘 어쨌다고?
마음속에 잡아 둔 피터 팬의 자리는 제법 넓었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아직도 피터 팬은 그 모습 그대로 네버랜드에 살고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피터 팬>의 도입부에 나오는 말이 그 답이다.
피터 팬이 나타난 것은 아이들이 피터 팬을 믿기 때문이죠.
내가 처음 만난 피터 팬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 모습을 꺼내볼 수 있다. 그는 언제나 내가 아는 그대로 행동하지 결코 다른 짓 하지 않는다. 그림자를 쫓아다니는 천진난만함도 그대로. 멋진 생각(wonderful thought)을 하면 날 수 있다는 믿음도 그대로. 후크 선장과 싸울 때의 자신감과 여유도 그대로. 런던 집에 웬디를 데려다주는 배려심도 그대로. 모두 다 처음 본 그대로의 모습이다.
피터 팬이 웬디를 데려다주고 돌아갈 때, 달빛 속에서 구름 사이로 피터 팬이 탄 배가 떠가는 모습이 보인다. 피터 팬 같은 게 말이 되냐고 했던 웬디의 아빠는 놀라서 그것을 지켜본다. 막상 보게 되니 아주 어릴 적 어디선가 본 듯하다고 얘기한다. 웬디 그리고 웬디의 엄마를 두 팔에 안고 그답지 않은 편안한 모습으로. 그렇게 피터 팬에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의 역할은 끝이 나지만 밤하늘은 계속 볼 수 있다. 그런데 피터 팬이 탔다고 생각했던 구름 속의 배가 시간이 흐르고 보니 배 모양의 구름이었다. 배는 멀리 가버리고 구름만 남은 것인지 배라고 생각했던 구름인 것인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후일에도 그럴 것이다. 배가 떠난 자리에 배 모양 구름이 남았다는 사람이나 배 모양 뜬구름을 배라고 우겼다는 사람이나 어차피 같은 세상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어디까지가 배이고 어디부터가 구름인지 정확히 구분하기 힘들어도 모두가 자신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다. 꿈도 현실도 사람들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니, 어떤 마음을 먹느냐도 자신에게 달린 것이겠지.
꿈과 믿음을 마음에 두고 싶은가? 피터 팬의 말이 곧 꿈과 믿음이다.
멋진 생각을 해! 날 수 있어!
악당 후크 선장의 캐릭터가 상당히 재미있다. 특히 자신의 부하 스미 그리고 자신의 손을 먹어버린 악어와의 케미는 환상적이다. 후크 선장의 캐릭터 덕분에 <피터 팬>은 긴장감 없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피터 팬과의 결투에선 통쾌하게 당해주고, 부하 스미의 실수에는 기막히게 포착되고, 식인 악어와의 조우에선 포복절도(抱腹絕倒)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