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벤허>
애초부터 평가는커녕 볼 수만 있어도 영광이라고 생각한 영화가 <벤허>였다. 이미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적이 있는 데다 엄청 유명하다는 얘기를 어른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다. 드디어 애타게 그리던 <벤허>를 볼 기회를 잡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사촌 누나와 같이 갔었는데 관람을 방해하려는 복병을 만난 기억도 같이 하는 영화다. 극장 앞에서 사촌 누나의 절친을 우연히 만났는데, <벤허>는 다음에 보고 <더티 해리>를 보자고 누나와 나를 번갈아 가며 계속 꼬시는 것이다. <벤허>를 상영하는 극장 앞에서는 <더티 해리>를 상영하는 극장의 간판이 빤히 보였으니 더 위험했다. 사촌 누나는 그 위험한 유혹에 살짝 넘어가는 분위기였지만 난 절대로 안 된다며 단호하게 끝까지 거절했다. 사촌 누나 친구의 삐짐을 표정에서 읽어냈지만 애써 외면했다. <벤허>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단단했던지 아무리 꼬셔도 결코 흔들림 없었던 그날이었다.
<벤허>라는 영화에 대해서 처음 들은 게 언제였는지 누구에게 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신문인가 잡지에서 기사를 읽은 기억은 있다. 하여간 엄청 유명한 영화이고, 엄청 많은 돈이 들었고, 엄청 오랫동안 찍었고, 엄청 많은 엑스트라가 동원되었고, 엄청 상도 많이 받았다는. 한 마디로 ‘엄청’이란 단어로 칠갑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정도의 영화라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주워 들었으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소위 ‘카더라’ 통신이 주를 이루었는데, 어딘가에서 주워듣고 온 동네 친구들이 한 마디씩 뱉어내며 떠들었던 내용을 모았으면 책 한 권 썼을 것 같다. 지금으로선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얘기들이 한 가지 역할을 해 낸 것은 분명하다. 그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방점을 콱 찍는 역할 말이다.
<벤허>를 보면서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중간 휴식 시간(intermission)’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화장실도 다녀오고 과자 – 새우깡이었나? - 도 먹었다. 세상에 그렇게 긴 영화도 처음이었지만 영화 보는 도중에 쉬라는 얘기를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길고 긴 영화를 보고 나서도 “시간이 언제 다 지나갔지?”하는 기분이 들었다. 몰입도가 대단했기에 그렇게 길게 앉아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벤허>가 개봉했을 당시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평론가들은 “네 시간짜리 주일 학교 수업”이라거나 “아주 긴 화물 열차가 철길을 천천히 지나가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벤허>를 여러 번 봤지만 거기에 동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고백하지만 <벤허>에 출연한 배우의 광팬인 적도 없었고, 주인공 유다 벤허의 매력에 빠진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보고 또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영화 <벤허(1959)>의 매력 덕분이었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글을 끄적이고 있듯 추억이 힘을 보탰을 수도 있겠지만, 추억으로만 견디기에는 네 시간은 너무 긴 시간이다.
<벤허>를 두 번째 본 것은 첫 만남 후 몇 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때 보고 놀라서 지금도 기억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메살라와의 전차 싸움 뒤에 남은 상영 시간이 그 정도 길 줄은 몰랐다는 점이었다. 전차 경기 장면은 유명한 만큼 볼거리도 많고, 따지자면 배신한 친구와의 결투이자 복수인 셈이라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장면임은 틀림없다. 어린 마음에 그 장면을 보고 나서 긴장이 좀 풀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벤허의 위험은 다 지나갔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보다 보니 영화의 마무리가 짧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제일 힘세고 못된 적과의 싸움이 끝났으니까 어린 마음으로는 거기서 긴장을 풀어 버렸나 보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랬던 사실이 기억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세월이 흐를수록 전차 장면 이후에 벌어지는 장면에서의 감동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처음 보고 끝이었으면 <벤허>를 전차 장면이 볼만한 영화 정도로 기억하지 않았을까. 그건 좀 끔찍한 일이다.
<벤허>는 흔히 서사영화(敍事映畵, epic film)로 분류하는 만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주인공 유다 벤허의 삶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다. 부유하고 힘 있는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태어나지만 우연한 사고와 그것에 따른 친구의 배신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노예로 참가한 전투에서 공을 세움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생기지만, 배신한 친구와의 대결이자 민족적 자존심을 건 전차 시합에 기꺼이 응하여 기어이 이겨낸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와 여동생도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서 기적적인 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에 아리따운 여인과의 사랑도 있고, 메시아(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도 극적으로 이루어지며 구원과 용서라는 개념도 끼어든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신비롭고 경건한 분위기로 끌고 가며 결정적 순간에 기적이 일어난다.
원작의 영향 - 원제목은 '벤허 : 그리스도 이야기(Ben-Hur: A Tale of the Christ)' - 으로 종교적 색채가 짙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의 “네 시간짜리 주일 학교 수업”이라면 제법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종교와 아무 상관없이 그 수업을 지금까지 몇십 년째 한 번씩 듣고 있다. 그냥 재미있고 감동적이어서다. 서사적으로 촘촘하게 짜인 이야기를 보기 좋게 찍은 것이라서 화면 속에서 잘도 흘러가기 때문이다.
<벤허>가 왜 좋으냐고 묻는다면,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부, 가난, 고난, 시련, 사랑, 용서, 구원, 의리, 배신, 용기, 극복, 기적 등등 살다 보면 직간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많은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다. 다시 한번 '엄청'이란 단어로 치장하자면 <벤허> 안에는 그런 것들이 ‘엄청’ 많다. 어제의 일이 오늘 다르게 느껴질 수 있듯 <벤허> 속의 그 많은 상황들도 볼 때마다 똑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보고 또 봐도 지겹지 않았나 보다.
<벤허>를 감상한다는 것은 유다 벤허의 인생 역정을 지켜보는 일이다. 어릴 때는 누군가에게 이기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고, 커가면서는 꺾이지 않는 굳센 모습이 훌륭해 보였고, 세월이 흐를수록 포용하고 보듬는 모습이 현명해 보였다. 그렇게 보면 무언가를 잡을 때와 놓을 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벤허>의 요점 같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유다 벤허의 대사 한 마디를 골라보았다. 마지막 대사이기도 하다.
그분의 목소리는 내 손에서 칼을 거두어 갔어.
I felt His voice take the sword out of my hand.
원제목에 '그리스도 이야기'라는 문구가 들어 있듯 벤허와 예수와의 만남도 여러 번 등장한다. 그것도 <벤허>를 보는 재미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