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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밥 Jul 09. 2024

브로드웨이 쇼를 스크린에 담고 싶었던 제작자의 작품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80일간 세계일주>


<80일간 세계 일주>는 초등학교 때 단체관람으로 보게 된 영화다. 아마 단체로 영화를 본 경험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큰 극장에서 본 것은 아니었고 우리 학교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말하자면 동네 극장에서 본 영화다. 내가 사는 고장에서 개봉한 시기를 보니 1970년 4월 1일이었으니 초등학교 3학년 때이고, 작은 동네 극장까지 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해도 그해에 봤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시절 단체로 본 영화도 몇 편은 된다. <80일간 세계 일주>처럼 <성웅 이순신(1971)>, <젊은 아들의 마지막 노래(1970)>, <공룡시대(1970)>도 단체로 관람한 영화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고전 SF 소설, 역사적 위인, 반공 영화, 원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선정된 걸 보면 어린 학생들에게 간접 경험을 가능한 많이 시켜주려 애썼던 것 같다. 학교에서 극장까지 줄을 맞춰서 옆 친구와 떠들면서 걸어갔던 시절이 생각난다.




프롤로그에 등장하여 해설을 맡은 TV 기자 에드워드 머로우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조르쥬 멜리에스의 무성영화 <달세계 여행> 장면


80일간 세계일주 (Around thd World in 80 Days, 1956)


<80일간 세계 일주>는 정말 재미있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영화였다. 시작부터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니 싶은 기막힌 반전을 최초로 봤다고 믿고 있는 영화다.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가서 본 영화지만, 이것저것 눈요기만 하더라도 ‘세계 일주’가 제목에 들어있는 영화로서의 역할은 했다고 본다. 한 마디로 전혀 쉴 틈을 주지 않는 촘촘한 에피소드의 연속이었다. 풍선 기구로 시작해서, 열차와 배를 번갈아 타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가면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참으로 힘든 '다이 하드'스러운 세계 일주였다. 80일 만에 세계를 일주한다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난관까지 군데군데 배치한, 지금으로 따지자면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을 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예전에 잘 쓰던 말로 “재미없으면 돈 안 받습니다.”라고 큰소리쳐도 될 만큼 흥미진진한 영화였다.



처음 봤을 때 남녀 주인공에게서 받은 인상에 대한 기억도 재미있다.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데이빗 니븐)를 보면서는 잘생기지 않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고, 아우다 공주(셜리 맥클레인)를 보면서는 어정쩡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인도의 공주라는데 그렇게 생긴 것 같지도 않았고 앙증맞거나 깜찍하게 생긴 전형적인 공주의 인상도 아닌 것 같아서였다. 셜리 맥클레인도 자신을 기용한 것은 미스캐스팅이었다는 주장을 계속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 먼 나라 초등학생 생각처럼 화장을 짙게 했어도 인도 사람 같이 보이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자신은 공주에 어울리는 외모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어쨌든 그 역할을 맡은 배우의 첫인상이 어린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80일간 세계 일주>는 배우의 첫인상이 그 역할의 승패를 좌우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경험한 영화이기도 하다.



<80일간 세계 일주>를 처음으로 봤을 때의 인상은 아주 재미있고 화려하다는 느낌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이것저것 다 보여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 한 마디로 버라이어티 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어떤 평가를 받았을지 궁금해서 이것저것 찾아보니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에서 처음 발견한 것은 신문광고에 “제명에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 실려있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상을 아주 많이 받을 정도로 대단한 이 영화를 6년 전에 개봉된 ‘8주간의 세계 일주’라는 영화와 혼동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8주간의 세계 일주 (Peter Voss, der Millinonendieb)>는 1958년에 제작된 독일 영화였다. 제목 헷갈려서 보지 않을까 봐 우려하는 광고가 재미있다. 하여튼 광고문은 “온갖 오락 요소가 담뿍 실린 공전의 대여행을 즐기시길 바랍니다.”라고 관람을 추천하는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 밑에 웃음이 지어지는 문구를 하나 발견했다. 제작자의 이름을 내세운 ‘마이클 토드 작품’ 위에 붙은 수식 문구가 그것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전남편’이라는.  


신문광고의 마무리 문장에서 볼 수 있는 ‘오락 요소’라는 용어는 ‘오락 영화(Entertainment Film)’를 떠올리게 하는 어쩌면 킬링타임 영화 정도로 평가될 수 있다는 생각에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선전으로는 좀 그렇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신문에 실렸던 영화 칼럼을 찾아서 이 영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신문 칼럼에서 이 영화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 단어와 문구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대략의 분위기는 짐작이 간다.


1970년 3월 29일 조선일보
1970년 4월 4일 경향신문


호화판 오락 영화, 흥행 상혼, 눈요깃거리, 관광조(觀光調)의 화면, 서비스 정신 발로, 멋진 희극적 세계 여행, 높은 센스의 고급 영화, 보아둘 만한 양화(良畵),
전통 코미디, 최소(催笑) 작용...




<80일간 세계 일주>의 광고에는 ‘마이클 토드(Michael Todd)’라는 제작자 이름이 항상 앞세워져 있다. 영화 포스터든 어디든 영화를 홍보하는 어디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 심지어 빅터 영이 음악을 담당한 OST 음반 커버에도 마이클 토드라는 이름이 제일 위에 걸려 있다. 감독이 만든 영화라기보다 제작자가 만든 영화라고 홍보하는 셈이다. 예전에는 제작이 중심인 시스템으로 영화사가 운영되었다고 하지만, 1956년이라면 그렇게 초기가 아닌데도 대놓고 제작자 이름을 제일 크게 걸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만드는데 가장 공을 들인 사람이라는 건 알겠는데, '마이클 토드'라는 이름의 영향이 그렇게 컸단 말인가.



실제로 <80일간 세계 일주>에 대한 기록을 찾아봐도 마이클 토드에 대한 언급이 가장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명인이 단역을 맡는 ‘카메오’라는 단어도 이 영화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없이 등장하는 짤막한 역할을 맡길 사람을 선택하고 끌어들이는 일을 모두 마이클 토드가 맡았다고 하니 그 뒷얘기만 해도 얼마나 많겠는가. 거기에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 동물, 선박 등을 준비하는데 대한 뒷이야기도 많이 남아 있었다. 이 영화 제작이 남겼다는 신기록만 살펴봐도 제작자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 작품인지 짐작할 수 있다. 촬영에 동원된 사람 수, 영화 제작을 위해 이동한 거리, 영화에 사용된 카메라 수, 세트 수, 의상 수, 보조 감독 수 등에서 당시까지로는 최고의 기록이었다고 한다. 원작에 없던 풍선 기구를 끌어들인 일도 마이클 토드와 각본가의 작품이었다고 하니 가히 이름을 내세울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도 마이클 토드가 했다는 말 한마디는 그의 속내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영화(movie)라고 하지 마라. 영화는 동네 극장에서 팝콘을 먹으며 보는 것이다. 이것은 브로드웨이 쇼를 극장에서 보는 것과 똑같다."


한마디로 웅장하고 화려함이 가득한 볼거리지 적당한 활동사진 정도로 보지 말라는 얘기다. 이름이 가장 크게 걸린 제작자의 말이 그랬으니 우리나라 신문광고에서 사용된 ‘오락 요소가 담뿍 실린’이라는 표현도 그런 의도를 나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이 영화를 소개하는 칼럼에서 사용된 호화판 오락, 눈요깃거리, 관광조, 서비스 정신, 멋진 세계 여행이라는 말도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는 얘기다. 그러면서도 높은 센스, 고급 영화, 좋은 영화(양화)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영화의 짜임새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볼거리만으로 승부한 영화는 아니라는.





영화예술이라는 용어가 빈번히 사용되는 현재로서는 큰 점수를 받기 힘든 영화일 수 있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은 과분하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유명한 쥘 베른 원작의 고전을 스크린에 옮기면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는 점만 하더라도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대단하지 않은가. 이미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된 장면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관객들의 마음을 묶어두려는 그 집요함을 봐도 영화적 재미를 제공하려는 성실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볼거리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으로 노력을 기울인 영화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시종 파스파르투(칸틴플라스)의 활약이 원작보다 강조된 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자국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국제적으로는 인지도가 높지 않은 배우를 잘 활용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의 표정과 퍼포먼스는 관객에게 웃음을 제공하는 근원지였고, 전체적으로 분위기를 끌고 가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데이빗 니븐은 영국 신사 같았고, 셜리 맥클레인은 인도 공주 같았고, 로버트 뉴턴은 멍청한 경찰 같았고, 존 길거드는 불만 많은 시종 같았고, 샤를르 보와이에는 상품 팔기 바쁜 여행사 종업원 같았고, 마를린 디트리히는 정신이 반쯤 나간 술집 여주인 같았고, 존 밀즈는 술 취한 마부 같았다. 주연배우와 더불어 모든 카메오가 적재적소에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더란 얘기다.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캐릭터가 조화롭게 제 역할을 해냈기에 작품성을 갖춘 수준급 코미디가 가능했을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뭐니 뭐니 해도 날짜변경선으로 벌어지는 마지막 반전이었다. 그런 데서 반전을 엮어내는 발상이 정말 대단하게 여겨졌다. 기가 막힐 정도로 극적인 반전이란 어떤 것인지를 처음으로 가르쳐줬던 영화로도 기억하고 있다.



보태는 글

<80일간 세계 일주>의 엔딩 크레딧은 애니메이션으로 내용을 축약하여 보여주는 방식으로 활용되었기에 한 장면씩 뜯어봐도 재미있다. 영화의 제목이 엔딩 크레딧의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점도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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