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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밥 Jul 02. 2024

노예라는 진흙과 불공평의 악취를 씻기 위하여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십계>

<십계>라는 영화를 보게 된 핑계는 <벤허>였다. 주연 배우(찰턴 헤스턴)도 같고 시대극이라는 점에서도 비슷하다며 <벤허>에 같이 갔던 사촌 누나를 은근히 졸랐다. 누나도 어렵지 않게 동의해 줘서 너무나 고마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거기에는 속셈이 있었다. 데이트를 그 시간에 잡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귀가가 늦어지는 핑계가 되니까 말이다. 서로에게 윈-윈인 셈이긴 했지만, 시내의 큰 극장에서 혼자 영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서웠다. 영화표를 내밀며 자신의 상황을 열심히 설명하는 사촌 누나 얼굴을 보니 혼자 보기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극장에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자 모든 감각은 기원전 이집트로 날아가버렸다. 좀 전까지 붙어있던 불안감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혼자서 영화 보기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름의 두려움을 감수한 결과지만 그것이 낳은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영화를 보러 가는 일에 대해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자신감을 얻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십계>는 영화 인생의 유아기를 벗어나 소년기로 접어들게 한 영화였다.





십계 (The Ten Commandments, 1956)


크리스마스만 되면 어김없이 방영한다고 생각했던 영화가 있었다. 얼마나 자주 했는지 정확히는 기억 못 하지만 참 많이 본 것 같아서다. 친구 집에서도 보고, 우리 집에서도 보고, 낮에도 보고, 밤에도 보고... 하여튼 많이 본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참 오래된 영화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 영화가 <십계>보다 뒤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걸. <왕중왕(King of Kings, 1963)>이란 영화다. <십계>가 1956년이니까 7년 뒤에 나온 영화다. 특별할 게 없는 얘길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텔레비전에서 흑백으로 본 영화는 극장에서 컬러로 본 영화보다 무조건 오래된 영화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거도 없는 그런 생각은 극장에서 본 영화를 TV에서 본 영화보다 무조건 우위에 두겠다는 억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극장에서 영화 보고 온 것을 최신 자격증이라도 딴 것처럼 자랑질이 하고 싶어서.


<왕중왕>이란 영화를 보기 전에는 예수 이야기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기독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정도의 단어를 들은 적이 있었던 정도랄까. <왕중왕>을 본 다음에야 그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친구 집에 있던 50권짜리 아동 문학 전집에서 ‘성경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빌려서 읽었다. <왕중왕>이 더 궁금해서 ‘성경 이야기’를 읽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읽다 보니 신약보다는 구약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계>가 개봉하자마자 보러 가려고 애썼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TV에서 여러 번 봤던 <왕중왕>의 프리퀄인 셈이기도 했고.



<십계>를 처음 보았을 때는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이 제일 궁금했다. 지금이야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온갖 스펙터클한 장면들을 보고 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바다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장면을 어떻게 찍었을지 그게 화면에 어떤 그림으로 등장할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십계>는 이미 바다 갈라지는 장면만으로도 유명한 영화였기에 더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건물이나 조각물 등 규모의 웅장함에 놀랐고, 사진이나 그림에서나 보던 이집트의 다양한 유물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하늘을 가득 덮은 먹구름에 휩싸이며 넓고 짙푸른 바다가 쩍 갈라지는 위용에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 눈요기만 하더라도 본전 다 뺀 기분이었다.





<십계>는 구약 이야기의 일부지만 <십계>의 주인공 모세는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될 정도로 구약의 대표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구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들려줄 거리도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 러닝 타임이 무려 220분에 달하는 영화가 되었다. 감독 세실 B. 드밀(Cecil B. DeMille)이 직접 나서서 내레이터를 맡고 있는 도입부 장면도 특이하다. 같은 제목으로 두 번이나 만든 영화인만큼 자신의 어떤 생각을 담았는지를 확실히 말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세실 B. 드밀 감독은 분명히 말했다. <십계>는 이런 것을 테마로 해서 찍은 영화라고.


신의 법에 따를 것인가?
독재자의 변덕에 따를 것인가?



<십계>의 전반부는 모세가 이집트 왕자였던 시절과 이집트에서 쫓겨난 후 십보라와 결혼하여 살던 시절을 보여주고, 후반부는 신의 계시를 받은 다음에 이스라엘 민족의 선지자이자 지도자로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으로 <십계>를 접했을 때는 시나이산에서 신(야훼)과의 만남, 이집트에 재앙이 내리는 장면들, 너무나 기대했던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이 쏠려있는 후반부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신 즉 하느님이 불덩이 나무의 모습이라든가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다든가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으로부터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등 신기한 볼거리로 충만한 후반부가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반부는 왕자나 목자의 역할이고, 후반부는 신의 대리인 역할이니 체급이 달라 보일 수밖에. 쉽게 얘기하자면 초딩의 눈에는 후반부의 모세는 다름 아닌 ‘히어로’였던 것이다.





초등학교 때 처음 본 이후 <십계>를 다시 본 것은 제법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 세월이 얼마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영화 <십계> 10년 만에 재상륙”이란 제목의 기사가 있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장면이 압권이었던 영화"라는 간단 해설로 개봉 당시에 관심 끌었던 장면까지 언급해 주는 기사였다.


1982년 7월 20일 경향신문 기사


그 이후에는 TV에서 본 기억도 있고, 비디오를 빌려서 본 기억도 있다. 하여튼 초등학교 때 보고 나서 다시 본 것은 성인이 된 이후였다는 것이다. 굳이 세월 얘기를 들먹인 것은 <십계>라는 영화도 세월 지나니 보는 초점도 위치를 옮기더란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예전에 볼 때는 모세가 왕이라는 자리와 어여쁜 공주의 사랑까지 차지할 수 있는 위치를 차버리고 고난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다. 홍해를 가를 수도 있는 힘을 주신 하늘의 부름이다 보니 모세의 숙명이려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냥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를 타고난 사람이기에 그에게 벌어진 모든 일은 그냥 당연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랬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과는 다른 쪽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초인(超人) 혹은 영웅(英雄)적인 모세의 모습이 보이던 방향에서 조금 각도를 튼 방향에서는 인간(人間) 모세의 고민이 눈에 들어왔다.


<십계>에서 모세의 기적은 모두 후반부에 일어난다. 신의 대리인으로 나선 모세의 비범함은 후반부에 몰려있으니까. 하지만 시간으로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활약한 시절보다 왕자 그리고 목자로 지냈던 시절에 더 긴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왕자로서의 활약, 공주와의 사랑, 친모와의 만남, 노예들과의 관계, 출생에 숨겨진 비밀 등이 모두 전반부의 이야기다. 모세가 혈육과 민족을 인정하며 기꺼이 노예 신분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이 전반부에 담겨있다. 성경에는 노예를 학대하는 이집트 관리를 죽이고 도망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영화에서는 모세 스스로 노예의 지위를 선택하여 추방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모세의 비범함이 성경에서보다 더 일찍 드러난 것으로 영화에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가장 비범한 부분은 왕이 될지도 모르는 왕자의 자리를 던져 버린 일이다. 애절하게 붙잡는 공주의 사랑조차 놓아 버린 일 역시 그렇다. 네프레티리 공주가 자신과의 사랑을 선택해 달라고 애원하는데도 불구하고 모세가 단호하게 거절하는 장면이 그의 비범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문제의 장면은 노예로 일하는 모세를 공주가 불러온 데서 벌어진다. 그때 모세는 다른 노예들과 함께 진흙밭에 들어가 진흙을 밟아서 다지는 일을 하던 중이었다. 공주가 묻는다. 진흙 속에 뭐가 있길래 날 떠나서 냄새나는 그들과 같이 지내냐고. 모세는 답한다. 묻은 게 있다면 노예라는 진흙이고, 악취라면 바로 불공평의 악취라고. <십계>를 다시 보며 가슴에 꽂힌 건 성경 말씀에도 없는 모세의 그 한 마디였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게 된다. 그 속에서 어떤 사람은 실리를 취하고 어떤 사람은 명분을 취한다. <십계>의 모세는 왕자의 실리보다 인간의 명분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감독 세실 B. 드밀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인간에게는 비범한 주제가 있는데 모세의 이야기이자 ‘자유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십계>에는 성경에서보다 모세의 비범함을 앞당겨 그린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종교적 지도자 차원의 비범함이 아니라 인간의 용기와 의지 차원에서의 비범함이었다. '출애굽(出埃及)' 즉 모세가 이끌었던 이집트 탈출도 궁극적으로는 노예들이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향수 뿌린 비단옷 입은 왕자나 악취 나는 진흙이 묻은 노예나 다 같은 인간이라는 주장을 펴기 위해서였다.


노예의 입장에서 내뱉은 모세의 말은 인간의 고민을 담은 것이었다. 모세의 비범함이 이룬 결과보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가 느껴지기에 인상적이었다.


묻은 게 있다면 노예라는 진흙이고,
붙은 게 있다면 불공평이라는 악취요!




보태는 글

모세의 생애는 120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모세의 활약은 마지막 40년 즉 80세에서 120세까지의 40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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