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의 추억, <자이언트>
멋모르는 중학생이지만 “제임스 딘”이란 이름은 어디선가 들었었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가 <자이언트> - "쟈이안트"란 제목으로 개봉하였지만 맞춤법에 따라 "자이언트"로 사용 - 였다. 영화 세 편만 남기고 갔다면서 반항아라는 둥 천재라는 둥 청춘의 우상이라는 둥 말도 많이 남긴 문제의 배우는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했다. 그때까지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록 허드슨 같은 배우들도 극장의 큰 화면에서 본 적이 없지만 제임스 딘의 유명세가 가장 세게 등을 떠밀었다는 기억이 제일 짙게 남아있다. <자이언트>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봉되었던 1957년의 신문 광고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 사라진 세기의 반역아 “제임스 딘”이 남기고 간 최고의 유작!!
요즘은 많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제임스 딘’의 사진을 참 많이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주로 청바지나 담배 광고로 보이는 사진이나 그림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어쨌건 제임스 딘의 사진이 걸려있는 모습은 어딜 가나 볼 수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흔했다. 아깝게 요절한 배우, 연기의 천재, 청춘의 아이콘, 반항아의 전형, 담배, 자동차, 청바지... 그를 지칭하는 말이나 수식어가 그렇게 많으니 어떤 모습의 사진을 걸어도 어울려 보였다. 그래서인지 제임스 딘의 영화를 본 적이 없던 입장에서는 그 이름만 들어도 ‘전설’이라고 할까 뭔가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자이언트>에서 봤던 제임스 딘의 모습은 당시 중학생의 눈으로는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록 허드슨과 비교하면 체격도 왜소한 편이고 요즘 많이 쓰는 말로 징징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이제 겨우 남성의 모습을 갖추고자 애쓰던 중학생의 눈에는 선의로 가득한 정의의 사나이 같은 인상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가 맡은 제트 링크라는 역할이 일관성 있는 매력을 주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제임스 딘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말인데, 당시 제트 링크에게 호감을 가져 보겠다고 버텼던 마지막 장면은 제트의 집에 레슬리(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찾아가서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떠나는 장면까지였다. 그때 레슬리가 발자국을 남기는 장면이 경계선이 되었다. 그 발자국에서 감을 잡아서 석유 재벌로 성장하지만 그 이후의 장면에서는 비호감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 걸 보면 제임스 딘이 제트 링크 역할을 잘 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봐도 아쉬운 점은 성공 이후의 제트를 좀 더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거들먹거리더라도 애처로운 마음이 좀 더 들었더라면 징징거린다는 느낌을 덜 받았을 것 같아서.
제트 링크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자이언트>에서 제임스 딘을 떠올리게 되는 인상적인 장면은 있었다. 제트가 석유 채굴에 성공하자 바로 빅(록 허드슨)의 집에 들러서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면서 레슬리에게 지분거리다가 빅에게 얻어맞고는 바로 되갚는 장면이다. 체격이 작은 제임스 딘이 덩치 커다란 록 허드슨을 얼마나 다부지게 패는지 사람들은 저런 모습 때문에 제임스 딘에게 반했나 싶기도 했다. <자이언트>를 보고 제임스 딘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 모습만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서 <자이언트> 얘기가 나왔다 하면 그 장면이 떠올랐었다. 그 장면만큼은 ‘반항아 제임스 딘’에 어울린다는 생각 때문이지 않았을까. 사족이지만 결국은 제임스 딘이란 배우를 좋아하게 되었다. <자이언트>에서는 아니고 <에덴의 동쪽>에서. 거기서 칼(제임스 딘)도 제 형인 아론을 참 야무지게도 때렸었다. 물론 그런 폭력적 자극 때문에 제임스 딘이 좋아진 건 결코 아니다. 칼 트래스크가 제트 링크보다 호감이 가는 캐릭터였고 그 인물을 연기하는 제임스 딘 모습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이언트>의 오프닝 크레딧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이름이 제일 앞에 나온다는 사실은 보고 또 보면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빅이나 제트는 꽉 막힌 데가 있는 캐릭터라서 그랬는지 처음 봤을 때도 <자이언트>에서 제일 정이 가는 배역은 레슬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 상냥한 엄마이자 성실한 아내의 모습에 끌려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원작 소설을 쓴 사람은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에드나 퍼버, 여성이었다. 당연히 에드나 퍼버의 시선은 레슬리의 시선이었고, 레슬리는 바로 엘리자베스 테일러였다. 레슬리가 <자이언트>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는 서사 영화였던 것이다.
레슬리가 중심을 잘 잡고 진행되는 서사이지만 그녀에게도 위기가 닥치는 시기가 있다. 아이를 셋 낳은 이후 빅과의 논쟁이 잦아진 것이다. 소위 결혼생활에 권태기를 맞은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서 지내는데, 그 시기에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진다. 개인적으로 <자이언트>에서 그 시기의 이야기에 정이 많이 가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너무나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주인공으로 이름도 제일 먼저 올리고 열연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라가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막내딸 러즈를 연기한 꼬마에게는 상을 하나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장면이다. 그 상황이 벌어지게 만든 과정부터 재미있다.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칠면조 구이를 먹는 습관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레슬리의 친정에서는 칠면조를 키우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아이들 눈에는 신기한 동물일 뿐 먹을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칠면조의 이름은 페드로였다. 칠면조 구이가 테이블에 올라오자 그것이 먹이를 주며 같이 놀던 페드로라는 걸 막내 러즈가 먼저 눈치를 챈 것이다. 이 칠면조 구이가 페드로인가 하는 장면에서 아이들 모두 우는 상황도 웃기지만 막내의 우는 모습은 기가 막힌다. 세상에 아이에게 연기를 시킨다고 저렇게 잘할 수가 있을까. 볼 때마다 그 기가 막힌 열연에 웃고 또 웃었다. 페드로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걸 보고 웃음을 참을 수는 없었다. <자이언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이자 명연기였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지만 록 허드슨과 제임스 딘은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두 사람 다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나름 연기를 잘했다는 평가 아니겠는가. 재미있는 것은 록 허드슨의 인터뷰로도 남은 사실이자 <자이언트>를 감상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했을 의미 있는 한 장면이다. 록 허드슨이 처음으로 관객과 함께 영화를 봤을 때는 자신이 나오는 장면에서 야유가 많이 나오는 걸 보고 연기롤 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문제의 그 장면에서 관객들이 환호하는 걸 보고서야 관객들의 야유는 록 허드슨의 연기가 아니라 빅 베네딕트의 성격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문제의 장면은 멕시코인을 차별하는 식당 주인과 한판 붙는 장면이다. 좁게는 손자와 며느리를 위하여 넓게는 인종차별 반대를 위하여 보수적인 텍사스의 대지주 빅 베네딕트가 나선 것이다. 고전적 성향의 영화라면, 빅이 대놓고 인종 차별하는 험악한 인상의 식당 주인에게 정의의 펀치를 날려서 완벽하게 제압한 후 개선장군처럼 자리로 돌아왔어야 할 상황이다. <자이언트>에서의 결과는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엄청나게 얻어맞고 음식 찌꺼기 접시 위에 큰 대자로 나자빠져서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로, 한마디로 무참하게 깨지는 빅 베네딕트의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처절한 장면이었다.
록 허드슨과 함께 <자이언트>를 지켜본 당시 미국의 관객도 1974년에 같은 영화를 지켜본 한국의 관객도 무참하게 깨진 주인공의 모습에 감동받았던 것이다. 인종주의는 옳지 않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꽉 붙잡고 있던 권위주의를 확 던져버리자마자 장렬하게 패배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말이다. 누가 뭐래도 <자이언트>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록 허드슨의 유일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노미네이트는 이 장면 덕분이라고 근거 없이 확신하고 있다.
<자이언트>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수십 년에 걸친 미국의 변천사를 보여주며 당시 사회의 문제점까지도 짚은 영화다. <자이언트>의 매력은 그런 세월 속에 미국의 가족을 담은 가족드라마이자 미국의 역사를 담은 역사드라마이자 미국의 사회를 담은 사회드라마로 볼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젊은이의 양지>, <셰인>과 함께 조지 스티븐스의 미국 3부작으로 불리게 된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자이언트>에는 외전(外傳)이나 스핀 오프(spin-off)로 영화 한 편을 만들어도 좋을 만한 등장인물이 한 사람 있다. 베네딕트 가족에 속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 주변의 친한 이웃도 아니고 제트 링크와 관련 있는 인물도 아니다. 하지만 탄생부터 사망까지 틈만 나면 한 번씩 얼굴을 내밀며 존재감을 드러냈던 인물이다. 베네딕트의 리아타(Reata) 농장 근처에 있는 멕시코인 마을에서 죽어 가는 걸 레슬리의 정성으로 살아난 아기가 있었다. 바로 그 아기 앙헬 오브레곤(살 미네오)이 그 인물이다.
레슬리가 빅 혹은 제트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텍사스는 멕시코로부터 뺏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대사도 나오는데, 앙헬은 바로 그런 면에서 텍사스 거주 멕시코계 미국인의 입장을 보여 주는 인물이다. 미국의 역사에서는 멕시코 군대와의 처절한 전투 끝에 얻은 땅이라고 하겠지만 멕시코의 입장은 다를 것이고 그곳에 살고 있던 멕시코인들이야말로 참으로 난감했을 것 같다. 텍사스의 리아타 농장에 고용되어 있는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바로 그런 입장 아니었을까. 앙헬은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베네딕트의 리아타 농장에 고용되어 일하던 중 2차 대전에 징집되어 미합중국 군인으로 참전했고 전사했다. 그는 출생부터 사망까지 미국인이자 텍사스인으로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멕시코계였을 뿐.
<자이언트>에서는 앙헬이 나서부터 커가는 모습도 한 번씩 보여주고 있고, 입대하는 모습과 전사하여 관에 실려 귀향한 후 장례식 치르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구체적인 성장 과정은 소개하지 않지만, <자이언트>에서 탄생부터 사망까지 전 생애를 보여준 인물은 앙헬밖에 없다. 노을이 물든 저녁에 쓸쓸하게 진행되는 앙헬의 귀향은 <자이언트>에서 제일 슬픈 장면이었다. 빅은 앙헬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자신의 진심을 담은 텍사스주 깃발을 넌지시 건네주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일지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빅은 텍사스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지만 리아타 농장 최초로 참전한 앙헬은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을까. 미국인으로도 멕시코인으로도 그렇다고 텍사스인으로도 내세울 게 없는 피지배계급 위치의 사람이었을 뿐이다. 앙헬의 장례식을 무심히 쳐다보며 혼자서 놀고 있는 멕시코계 소년의 모습을 화면에 담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앙헬처럼 살다 간 멕시코계 미국인은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성조기가 덮인 관, 그 곁에서 펄럭이고 있는 성조기와 텍사스주 깃발,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에 실려 울려 퍼지는 미국 국가... 영웅의 귀향이었으니 장엄할 수도 있었는데 애잔하고 슬픈 여운만 남았던 앙헬의 장례식 장면이었다. <한 솔로 : 스타워즈 스토리>처럼 언젠가 <앙헬 오브레곤 : 자이언트 스토리>도 기대해 보고 싶다.
<자이언트>에서 레슬리 베네딕트는 의식이 깨어있는 지식인 내레이터 역할인 셈이었다. 대지주이자 거부인 남편 빅 베네딕트 주니어, 그의 누이 러즈 베네딕트, 베네딕트 가문의 고용인에서 석유 재벌로 군림하게 된 제트 링크, 베네딕트 가문 주변에 있는 백인 지주들과 권력자들, 백인의 하인이나 고용인으로 살아가는 멕시코계 미국인들은 그 넓은 땅덩어리 안에서 얽히고 얽힌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 속에는 지역적 우월주의, 인종주의, 계급 차별, 남녀 차별, 정경 유착, 권력층 비리, 세대의 갈등 등 지금도 여전한 인간들의 천태만상(千態萬象)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시대의 인간군상은 무엇인가를 지키고, 버리고, 자랑하고, 욕하고, 쌓고, 부수는 일을 하며 나름의 위치를 고수하려 애쓰고 있었다. 레슬리는 그 속에서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거기에 실려서 살기도 하고 거기에 저항하며 살기도 한 거주자이자 관찰자이자 개척자였던 셈이다. 그런 레슬리를 중심으로 3대에 걸쳐 벌어지는 수많은 일을 보면서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되기에 <자이언트>는 보고 또 봐도 물리지 않는 영화다.
<자이언트>에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마지막 장면이라고 대답해 왔다. 백인 손자와 멕시코계의 혼혈 손자가 아기 침대에 같이 들어가 있고 그 뒤로 검은 송아지 한 마리와 하얀 염소 한 마리가 보이는 장면이다. 인종 문제만 부각되어 보인달까 대단원의 막이 자이언트하지 않은 이미지로 끝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다. 미국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석유 재벌조차 안중에도 없는 텍사스의 대지주 빅 조단 베네딕트가 조그마한 식당 주인한테 처참하게 얻어맞으면서 얻게 된 "찐 자이언트"의 감동이 좀 더 이어지도록 은근하면서 의미 있고 열려있는 마무리를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욕심. 지금까지 열 번 스무 번도 더 본 만큼 앞으로도 계속 볼 마음이 있는 영화가 <자이언트>다. 보고 또 보다 보면 마지막 장면까지 좋아지는 날도 오겠지.
<자이언트>는 아이들 모습을 담는데 신경 쓴 영화란 생각을 하게 된다. 베네딕트 부부의 세 아이 그리고 앙헬, 앙헬 장례식장에서의 이름 모를 소년까지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으려고 애쓴 것 같다. 현재야 어떻든 미래는 아이들에게 달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까? 아이를 쳐다보는 어른 표정이 재미있는 장면도 있다. 딸과 사위가 낳은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가 낳은 손자를 쳐다보는 빅의 표정이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레슬리의 표정도 재미있다. 차별이라는 측면에서 지적받을 장면이기도 하지만 그런 문화에 젖어 살고 있었던 인간의 모습을 지적한 장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