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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사람 May 02. 2024

삼원숭가족: 33살 부부와 9살 아이의 이야기-2

놀이터의 수호자

초등학교 2학년 숭이에게는 놀이터 레이더가 있다. 어떤 낯선 동네를 놀러가든 차창 밖에서 저멀리 스쳐가는 놀이터도 발견하고 마는 것이다.


여행지의 낯선 놀이터도 좋아하지만 숭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내의 작은 놀이터다. 그네, 미끄럼틀, 목마 몇개로 이루어진 작고 평범한 놀이터에는 지나칠 때마다 “언니!”를 외치는 1학년 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도, 태권도 학원 차를 타러 갈 때도, 태권도 학원 차에서 내릴 때도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동생들은 어김없이 “언니! 놀자!”를 외치고 숭이는 신이 나 그 기대에 부응한다. 그 친구들을 매일같이 보다보니 이제 놀이터의 유일한 어른인 나를 놀이에 끌어들인다. 그네를 밀어달라, 마피아 게임 심판을 해달라, 심지어 집에 가서 물이나 간식을 가져와달라고 한다.

하루이틀이 아니라 매일 보호자 없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너무 과보호하고 있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도 해봤다. 그러나 고민을 하는 순간에도 킥보드를 타고 주차장을 활보하고 지하주차장 담벼락에 걸터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고서 마음편히 집에 들어가 있을 수는 없었다. 마침 그당시 읽고 있던 책에 '신호등이 아닌 가로등 같은 엄마'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그래, 뭘 해라, 하지 마라 지나치게 간섭하지는 말되 그자리에 어른이 있다는 것만 인지하게 해주자. 그때부터 나는 우리 아파트 놀이터의 조용한 수호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준비물은 책 한 권. 아이들이 노는 곳과 조금 떨어진 정자의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다. 쿵 부딪히는 소리가 나거나 갑자기 조용해질 때만 눈을 들어 확인한다. 한 번은 그네를 요상한 자세로 타던 아이가 머리로 떨어진 걸 보고 상태를 확인하고 집에 가서 어른에게 오늘 머리 부딪힌 얘기를 꼭 하라고 알려줬고, 한 번은 조용해서 봤더니 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모아서 놀고 있길래 손이 베일 수 있으니 돌이나 다른 걸 가지고 놀라고 말해줬다. 사실 그네도 좀 안전하게 앉아서 탔으면 좋겠고 이것저것 만진 손을 입에 대지도 않았으면 참 좋겠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를 지적하다가는 수호자는커녕 기피대상이 될 수 있기에 꾹 참는다. 그리고 어쩌다 그네를 밀어달라거나 마피아 게임 심판을 해달라고 하면 기꺼이 가서 서비스한다. 최대한 짧은 시간에 임팩트 있게 서비스를 마치고 돌아와야 아이들과 나 양쪽 모두가 만족스럽다.

어떤 날은, 특히 날씨가 춥거나 더운 날은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조차 하기 싫은 때도 있다. 그래도 일단 나가면 반강제로 독서를 하게 된다는 장점뿐만 아니라, 알맹이 없는 아이들의 농담과 웃음소리를 듣는 것에서 얻는 에너지가 있다. 노인들이 공원 벤치에 앉아 아이들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유를 알 것 같달까.


아이들이 등장하는 끔찍한 사건들이나 요즘 사람들이 아이를 낳기 힘든 이유를 매체에서 분석해놓은 것을 보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게 너무나 힘든 세상인 것만 같다. 하지만 아이들은 대단한 환경이 아니더라도 같이 뛰어놀 친구 한 명만 있어도 매일을 즐거운 웃음으로 채울 수 있는 찬란한 존재들이다. 내가 어떤 대단한 대책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놀이터에 나와 노는 내 아이 곁을 지켜줄 수 없는 바쁜 부모님들을 대신해 가로등이 되어줌으로써,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 놀이터로 모여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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