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를 보내며
친정 집에는 올해로 만 열일곱 살이 된 말티즈가 있었다. 내가 대학생 때 엄마가 데려온 아이였다. 원래 엄마의 지인이 키우던 강아지인데 사정이 생겨 더 이상 키울 수 없게 되었다며 보여준 사진에 반해 데려왔다고 한다. 그동안 아무리 우리가 강아지를 키우자고 졸라도 절대 안 된다던 엄마인데 말이다. 중성화를 했을지언정 명색이 수컷인데 ‘체리’라는 이름은 좀 아니다 싶어 우리 가족 성인 김 씨에 ‘가루’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때부터 우리와 13년을 함께한 가루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자고 산책을 시켜주다가, 결혼을 해서 분가한 후에는 1년에 몇 번 보는 게 다였다. 몇 년 후 친정에 들어와 살면서 다시 함께하게 된 가루는 완전한 노견이 되어 있었다. 문 밖에 사람이 오는 작은 기척에도 현관으로 달려와 짖으며 난리를 치던 녀석은 내가 들어와 바로 앞까지 와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순진한 표정으로 붕가붕가를 해서 큰 웃음을 주던 녀석은 정말 먹고 싶은 게 있을 때가 아니면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산책 갈까?” 소리에 신이 나서 짖으며 달려오던 녀석은 조금만 덥거나 추워도 집 밖을 나서지 않으려 했다.
작년에 친정에 들어오기로 결정했을 때 어쩌면 가루의 마지막을 함께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3남매가 차례로 독립하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집에 혼자 있었던 가루에게 복닥복닥한 말년을 선물하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마지막 순간에도 함께해주고 싶었다. 결국 두 번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말이다.
1주일째 설사를 했지만 좋아하는 걸 주면 곧잘 받아먹고 잘 걸어 다니던 가루는 하룻밤만에 컨디션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며칠 안 남은 것 같으니 주말에 집에 오라고 동생들에게 연락을 돌렸고 첫째 동생이 반차를 쓰고 집으로 달려왔을 때 가루는 이미 무지개다리를 건넌 후였다. 세상이 무너진 듯 우는 첫째 동생을 시작으로 엄마, 나, 아빠, 막내가 도착했다. 저녁 7시가 되어서야 한자리에 모인 우리 가족은 경기도 외곽의 애견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한 시간 반 동안 우리는 가루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훈제 삼겹살 1인분부터 브라우니까지 안 먹어본 게 없다고 다른 강아지들한테 자랑하고 있을 거라며 웃다가 바다에 한 번도 못 가봤으니 바다에 뿌려주자고 말하다 울며 함께 가루를 추억했다.
사실 처음 가루가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숭이에게 어떻게 알릴까’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면 놀랄까 봐 눈물을 참았고 사체를 보고 충격받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먼저 들어가 가루의 상태를 확인하고 숭이에게 인사를 시킨 후에도 방에 들어가 숭이와 평소처럼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세 시간쯤 지나 숭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아빠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고 나서야 나는 온전히 슬퍼할 수 있었다.
내 자식을 지켜야 하는 부모의 자리에서 벗어나 보호를 받는 딸의 자리에서 마음껏 가루를 애도했다. 아마 내 부모님이 슬픈 상황에서도 해야 할 것들을 처리하고 조정해 주었기 때문이겠지. 현실적이고 힘든 것들을 보호자가 대신하기 때문에 피보호자는 현재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고맙고도 미안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