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동학농민운동의 그림자
일러두기
이 글은 작가가 드리미학교 선택활동 <한국 근현대사 이야기>라는 수업에서 작성한 글임을 밝힙니다.
언제든지 토론 및 비판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서론
우리에게 어쩌면 너무나 익숙한 그 이름 동학농민혁명, 당신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흔히들 교주 최제우에 의해 세워진 동학과 그 정신에 기반한 농민들의 정부를 향한 봉기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을 만류하였으며 심지어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봉준을 일러 “국가의 역적이요 사문의 난적”이라고 표현하며 속칭 ‘사이비’ 취급을 하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뜻의 인내천 사상을 중심으로 절대적 평등을 추구하였던 동학과 그 이름을 내건 ‘무력항쟁’ 동학농민혁명은 어쩌면 모순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글에서는 동학의 정신과 사상에 대해 살펴보며, 동학의 정신이 동학농민혁명과 어떠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또 동학농민혁명이 가지는 이념적 모순은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근대성을 띄는지, 반근대성을 띄는지에 대한 문제를 배제하고 생각하더라도,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이루기까지 3.1 운동,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항쟁 등 여러 민중혁명의 정신적 기반이 된 긍정적 영향을 준 역사로 평가된다. 동학농민혁명이 ‘혁명’이라고 칭할 만큼의 의미가 있었다는 것은 사학계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의 그림자에는 오늘날 역사교육에서 다루지 않는 부끄러운 역사들이 남아있다. 실제로 구한말의 재야 문인이었던 황현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록인 ‘오하기문’에서 그는 동학 농민군들을 ‘도적'이라고 표현하였고 그 책에는 그들이 저질렀던 온갖 범죄행위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범죄행위들이 과연 동학이라는 종교적 이념에 걸맞은 행위들이었는가는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또한 이번 글은 대체적으로 1차 농민봉기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며, 2차 농민봉기는 청일전쟁 이후 일제와 외세에 저항했던 또 다른 이해관계들이 얽혀있는 탓에 다루지 않도록 할 것이다.
동학
동학이란 1860년 몰락한 양반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고 창시한 구한말 신흥종교로써 당시 서학이라고 불리던 천주교에 대항하여 창시된 종교이다. 동학의 핵심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뜻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이는 모든 사람을 하늘이라고 칭하며 신분제를 타파한 절대적 평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 조선의 유교사회에 대한 큰 도전이었다. 이러한 평등을 추구하는 사상은 당시 양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조선 사회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동학이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민심을 현혹시킨다고 하여 최제우와 그의 추종자들을 압송하여 1864년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 죄 즉,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그를 처형시켰다. 하지만 교주의 죽음으로 인해 동학은 더욱더 부흥하게 된다. 1대 교주 최제우는 동학도들에게 고귀한 순교자로 여겨지며 성화되었고, 그의 수제자였던 최시형이 그를 이어 2대 교주가 된다. 그는 강원도 남부와 충청도 지역에서 포교와 신도관리에 힘썼다. 그로 인해 동학은 한반도 남부와 중부 전체로 퍼지게 된다. 예컨대 2대 교주 최시형이 활동을 전개할 당시 임오군란, 청과 일본의 내정간섭, 갑신정변 등 조선사회는 이미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그로 인해 동학은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조선에는 동학이 크게 유행하며 전국 각지에서 동학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너무나 많아진 신도들을 교주인 최시형 혼자서 관리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최시형은 포접제를 도입하였다. 포접제란 교주인 최시형은 충북 보은을 주요 본진으로 삼고, 각 지역별로 집회소를 설치하여 접주를 두어 담당 지역의 신도를 관리하는 형태이다. 교주의 밑엔 대접주가 있고, 대접주 밑엔 접주들이 있는 일종의 관료제 형식의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구조가 형성되다 보니, 각 지역의 접주들은 하나의 동학을 두고 재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누군가는 동학을 그저 백성들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하나의 종교로서 작용하기를 원하는 반면에 누군가는 무능한 정부 탓에 외국이 조선을 업신여기고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니 민중들이 들고일어나 이 사회를 뒤엎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동학이라는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기를 원하였다. 전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던 온건파 동학도들은 주로 충청북도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고 후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던 강경파들은 주로 전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충청북도의 온건파를 북접, 전라도의 강경파를 남접이라고도 부른다. 훗날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은 당시 동학의 강경파 남접의 접주였다.
녹두장군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전봉준은 1대 교주 최제우와 비슷하게 몰락한 양반 출신이었다. 그는 키가 152cm밖에 되지 않았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짐작해 보더라도 164cm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당시에도 굉장히 작은 키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한 작은 키로 인해 그는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는 몰락한 양반이었기에 가진 것이 많이 없었고, 그나마 양반시절 배워두었던 글솜씨로 겨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93년 희대의 탐관오리 조병갑이 하필 남접의 접주인 전봉준이 살던 곳인 전라북도 고부의 신임군수로 취임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관직도 뇌물로 인해 얻은 만큼, 백성들의 고혈을 있는 대로 짜내어 자신의 배를 불릴 작정이었다. 일례로 조병갑은 망성보라는 저수지를 짓기 위해 백성들을 노동에 투입시켰고 백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그렇다면 저수지의 물은 백성들이 마음껏 사용하도록 개방하여야 할 터인데, 조병갑은 백성들에게 저수지의 물을 사용하는 물값을 받아내었다. 이토록 파렴치한 짓들을 저지른 조병갑에게 항의하기 위해 조병갑을 찾아간 백성들에게 그는 곤장형을 가하였고, 그중 곤장을 맞고 사망하는 백성도 생겨났다. 그런데 하필 조병갑의 곤장에 사망한 백성중 한 명이 녹두장군 전봉준의 아버지였다. 이에 격분한 전봉준은 자신을 따르던 동학도 1000여 명을 이끌고 탐관오리 조병갑을 죽이러 고부 관아로 쳐들어간다. 그 소식을 접한 조병갑은 재빠르게 도망가고 전봉준은 관아를 점령한다. 이때 전봉준은 무기를 챙기고 또한 곳간을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사건을 ‘고부민란’이라고 한다.
조선 정부에서는 고부민란으로 인해 돌아선 민심을 회복하고 그 민란의 주동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안핵사 이용태를 고부로 파견한다. 하지만 이용태는 더욱 악질이었다. 그는 그냥 고부 백성 자체가 문제라며 별다른 수사 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고문하고 사람들을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다. 전봉준은 이전 고부민란보다 더 큰 규모의 거사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를 위해 남접의 접주들을 불러 모은다. 이 과정에서 남접의 대접주인 김개남과 손화중이 전봉준에게 합류하였고, 규모가 커진 동학군을 창의군이라 부르며 고부민란 때보다 4배 많은 숫자인 4000명의 병사들을 조직하였다. 1894년 3월 이 4000명의 병사들이 백산이라는 산에 모이니 산이 하얗게 보였다고 하여 이 사건을 ‘백산봉기’라고 부른다. 그들은 백산에서 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평안하게 한다는 뜻의 보국안민을 외쳤고 그 내용의 창의문을 발표했다.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말지어다. (不殺人不殺物)
둘째,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忠孝雙全 濟世安民)
셋째, 왜적과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거룩한 길을 밝힐 것이다. (逐滅倭夷 澄淸聖道)
넷째,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여 권귀들을 모두 멸할 것이다. (驅兵入京 盡滅權貴)
동학농민군 4대 강령
이 창의문은 동학농민군의 4대 강령으로 그들의 무력항쟁의 근본적인 이유와 목적의식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동학의 중심사상인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뜻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기반으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외쳤다. 그렇게 그들은 동학농민군이 되었다.
황토현 전투와 동학농민군의 비동학적 행적들
한편 오늘날 전라도지사급의 직급인 전라감사 김문현은 직접 군대를 조직하여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다. 하지만 관군들은 전투 경험이 없는 농민들을 만만하게 보며 거만에 차 있었고, 도망치는 척 유인작전을 펼쳤던 동학군들을 얕잡아 보아 전투를 앞두고 있는 와중에도 술판을 벌이며 술에 취해 잠드는 등 동학군을 경시하였다. 그렇게 관군들이 방심한 틈을 타 그들을 기습공격한 동학군은 그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전북 정읍 황토현 일대에서 벌어져 ‘황토현 전투’라고 한다. 실제로 전투에서 살아남아 도망친 관군의 기록에 따르면 2000명의 관군 중 동학군의 기습에 맞서 싸운 병사는 극히 소수이고 대부분은 잠이 든 채로 시체가 되었거나 앉은 상태로 칼을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학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바로 북진하지 않고 전라도 일대를 돌며 점점 몸집을 키워 나갔다. 그들은 고부를 넘어 부안, 고창, 태인, 금주 등을 장악하였고 동학군의 규모는 도단위로 번지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순천의 접주 양하일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군청은 물론 민가들을 상대로 약탈하고 심지어 집을 불에 태우며 전라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이러한 기록은 황현의 오하기문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순천의 도적 양하일이 금구, 남원 지방의 도적들과 합세하여 낙안군에 들어와서 집 1,000여 채를 불태우고 약탈을 자행했다.”라고 저술되어 있다. 이러한 민가를 상대로 한 파렴치한 행위들이 과연 앞서 그들이 선포한 동학농민군 4대 강령인 창의문의 정신과 정말 맞물린다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이 백산에서 외친 창의문의 내용 중에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말지어다.”라는 내용이 보란 듯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동은 동학의 정신과 동학농민군의 정신 그 어디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이들의 행동은 곧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의로운 동기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악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몸집을 키워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백성들을 겁탈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동학에 강제로 백성들을 합세시키거나 무력을 이용해 억지로 몸집을 불려 나갔다. 오하기문에는 전라도의 백성들 가운데 죽을 것을 각오하고 동학 가입을 거부한 사람들은 돈 서른다섯 냥을 바치고 강제 가입을 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동학농민군의 행보는 너무나 심각한 모순율에 빠져있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들은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의 정신에 정확히 반대되는 행위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동학이라는 종교가 오로지 사람들에게 의지가 되고 삶의 동기가 되는 종교로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념이자 혁명의 구심점으로 작용했기에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동학의 교주 최시형은 초기의 동학농민혁명을 극구 반대하였다. 그는 전봉준의 거병소식에 “도로써 난을 지음은 불가한 일이다.” 라며 꾸짖었고, 또한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국가의 역적이요, 사문의 난적이다.”라고 하며 크게 비판하였다. 교주 최시형은 비폭력주의자였고, 무력항쟁은 동학의 이치에 어긋난다고 주장한 것이다. 동학농민군들은 자신들이 선포했던 창의문의 내용을 진정성 있는 사명으로 여기지 못하고, 그저 동학을 혁명의 구심점으로만 삼으려 했기에 동학의 정신이 스며들지 못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동학농민군들은 이어진 황룡촌전투에서 관군들을 상대로 크게 승리를 거두며 전라도의 중심부인 전주성까지 점령하는 쾌거를 이룬다. 이러한 파죽지세의 농민군을 조선관군만으로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고종과 민비는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톈진조약으로 인해 일제의 군대 또한 조선에 들어오고, 결국 두 나라의 군대가 조선땅에 주둔하였다. 이에 외세의 개입보다 자국에서 해결하고자 하였던 농민군들은 전주성을 공격하던 홍계훈 장군과 동학농민군들은 그 당시 갈등상황이 붉어진 두 나라의 전쟁이 조선땅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합의점을 찾아 전주 화약을 맺고 그것을 끝으로 동학농민군들이 해산하며 1차 봉기가 막을 내린다. 그 전주화약에는 12가지의 조항이 있는데, 신분제도를 없애 평등을 도모하자는 내용과, 탐관오리들을 처벌하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동학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서둘렀으나 나주, 남원 등에서는 관군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으며 1894년 7월 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및 2대 대장 야마구치 케이조를 필두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범궐 하여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고 친일내각을 세우자 개혁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이것 또한 2차 동학농민운동의 발발에 주요 원인이 된다.
결론
이렇게 동학농민혁명의 1차 봉기 전개과정과 그 이면에 숨은 그림자를 파헤쳐 보았다. 황현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그들이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서는 공감하였지만, 그들의 혁명 방식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오늘날 긍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 저항하고 외세에 저항하며 좋은 평가가 될 요소들을 다분히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농민혁명이 역사적으로 갖는 의의는 참으로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사건 오늘날 민주주의를 이룸에 많은 역할을 한 여러 민주항쟁들의 정신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토록 긍정적으로 조명되는 역사에도 그림자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정말 동학의 정신에 부합한 항쟁이었는지, 이 일로 인해 조선의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은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마땅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참고자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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