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짝사랑(6)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답을 알고 있다. 온갖 희망이 넘치는 말들, 온정 가득한 조언, 따끔한 충고 등 살면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침체되어 있는 사람들은 버릇과도 같은 반발 심리를 가지고 있다. 자신과 반대되는 분위기에 쉽게 적대감을 가지며, 기꺼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려 는 노력까지 하기도 한다. 이처럼 안타깝게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소한 습관이나 기호 따위도 그러한데, 가치관이나 신념과 같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것들은 더욱 심하다. 그 방향성을 바꾸려면 인생을 뒤흔들만한 사건이나 그것을 도와줄 특별한 존재가 필요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내게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그녀는 항상 밝은 빛을 내며 나의 부정적인 인식들에 경종을 울려주었고, 나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의기소침한 성격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인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그녀와의 거리도, 함께했던 시간도 부족했다. 실제로 나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다시 깊고 암울한 구렁에 빠지고 말았다. 그 영향은 고등학교 입학 초기보다 더욱 치명적이었다. 밝고 따뜻한 세상을 경험한 뒤 다시 마주한 어둠은 나를 한층 더 비참하게 했다.
그런 상대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었다. 일단 고등학교 졸업 직전까지 만났던 여자친구에게 꽤나 잔인하게 차였는데, 스스로를 비참하게 갉아대는 연애였던 만큼 그 끝도 좋지 않았다. 나쁜 관계를 끝내면 금방 행복해질 거란 생각은 큰 착각이다. 나쁜 기억은 더욱 오래가고 극복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마음 곳곳에 망령처럼 남아 온갖 것을 방해하며 정신을 좀먹는다. 대학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수능을 망치고 목표했던 것보다 훨씬 수준을 낮춘 대학에 진학해야 했는데, 재수를 할 의지도 용기도 없었기에 거의 자포자기인 심정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낯선 대학 문화, 선배들, 동기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연스레 스스로 그 모든 것들로부터 소외되어 갔다. 고등학교 입학 때와 똑같은 일이 반복됐던 것이다.
대학 생활이 특히나 더 문제가 되었던 건 대학생의 인간관계가 고등학생 시절에 비해 더욱 능동적인 자세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기숙사에 함께 살며 다른 아이들과 강제로 친해질 수밖에 없었던 고등학교 시절과 달리 대학 생활은 나의 주체적인 행동에 의해 좌우되었고, 나는 한 발짝도 나설 생각이 없었으니 출구도 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대학교에는 그녀가 없었다. 그녀와 비슷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그녀는 지나치게 독보적인 존재였고 그 누구에게서도 그녀로부터 느꼈던 감정들을 찾아낼 수 없었다. 결국 난 좁아터진 자취방에서 술과 게임에 빠져 대학 시절을 허비했다. 꿈에 그리던 설레고 활기찬 대학생활 따위는 결코 없었다.
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그녀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수능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는데, 나와는 달리 재수를 선택했다. 그녀는 졸업식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졸업 여행에도 오지 않았다. 항상 그녀가 궁금했지만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내 보잘것없는 소망을 외면했다. 평소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었기에 졸업 이후 개인적으로 연락할 명분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생존 본능은 강력했다. 우울함이 극에 달했던 어느 날, 그녀가 날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도 되는 듯 그 어떤 계산이나 걱정을 모두 뒤로 하고 그녀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