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짝사랑(7)
살다 보면 큰 노력 없이도 좋아하는 사람과 특별히 가까워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가 되는 일은 양측 모두에게 자아 정체성과 자존감을 제공하므로 누구나 알게 모르게 그것을 갈망한다. 그러니 서로에게 조금의 관심이라도 있다면 한 통의 전화와 같은 사소한 계기로도 특별한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 특히나 그 대상이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의외로 더 수월하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취향이 어떠한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그러하다 보니 짝사랑과 가까운 관계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그다지도 많은 것이다.
나 역시 졸업 후 그녀에게 처음 걸었던 전화 한 통을 계기로 그녀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전화를 바로 받지 않아 발신음이 유난히도 길게 반복되는 동안 그냥 끊어버릴까 수십 번을 고민했다.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내 마음을 눈치채고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공부하는 재수생에게 전화를 했다고 귀찮아하거나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일부러 받지 않으려나? 내 번호가 저장이 되어 있기는 할까? 온갖 생각을 하는 도중 그녀가 전화를 받으며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재수를 시작한 시점에 낙심하거나 위축되어 있을 법도 한데, 나를 그녀에게 빠져들게 했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해맑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면 한번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흔쾌히 응했고, 약속 날짜를 정한 뒤 전화를 끊었다. 졸업 후 서울에서 그녀와 단 둘이 만난다는 생각에 얼마나 감격했던지 갑자기 내 삶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설렘에 잠 못 드는 나날이 지나고 그녀가 다니는 학원 근처에서 그녀를 만났다. 오랜만이라 어색했던 것도 잠시, 3년의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던 우리는 쉽게 대화를 이어갔다. 최근 그녀의 생활에 대해 묻자, 재수 학원과 기숙사 생활, 공부 이야기, 그 밖에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들이 작은 산호색 입술 사이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그렇게 수다스러울 때 특히나 더 귀여웠다.
우리는 식사 후 근처 공원을 걸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진 산책로를 노란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비추고 있었다. 어둡고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문득 그녀가 재수 생활의 힘든 점을 이야기하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애틋한 감정이 들끓으며 친구보다 더 가까이서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고등학교 입학 초기 힘들어했던 내게 그녀가 빛이 되어 주었던 것처럼, 이번엔 반대로 내가 그녀의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 먼저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았다. 그날의 아련한 분위기가 더욱 나를 부추겼다. 몇 번이고 망설였으나 내 마음에 대해서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섣부른 고백은 전적으로 내 감정만을 위한 행동에 불과했다. 공부 중인 그녀에게 부담이 될 것이었고, 설사 일이 아주 잘 풀린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녀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 방해가 될 터였다. 무엇보다 당시 내게는 그녀를 품어줄 온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마음을 억누르고 감추느라 속이 상하기는 했지만, 그녀와 단둘이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고 만족스러웠다. 더구나 재수 생활 중 그녀를 찾아온 사람이 내가 처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실로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를 기숙사까지 배웅해 준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고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언제든 그녀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와 가까워졌다는 사실도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날 이후 내 우울증은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