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짝사랑(9)
꿈을 꾸는 도중 그것이 꿈에 불과함을 알아차렸을 때, 보통은 잠에서 깨기 마련이다. 그것이 행복한 꿈이었다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자신을, 어쩌면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 자체를 저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의 그 허탈감과 상실감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 바라고 바라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데, 그것이 껍데기만 그럴싸하고 내용이 없는 경우, 결국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에 좌절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경우 가장 행복한 시간과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마주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이상한 관념에 지배당하고 있는 상태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행복할줄만 알았던 상황 속에서 마주한 잔혹한 진실은 그 어떤 불행보다 가혹하게 다가온다.
가을이 지나고 연말이 왔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송년회를 했고, 그녀도 거기 있었다. 술자리가 길어지고 가게들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자 근처에 있던 내 자취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린 늦게까지 술자리를 이어 가다가 창문으로 검푸른 새벽이 새어 들어올 때 쯤 대충 누워서 잠에 들었다. 그녀 혼자 여성인 걸 배려해 벽 쪽에 따로 자리를 잡았고, 내가 그 옆에 누웠다. 다들 곤히 잠든 와중에도 난 그간 마신 술잔들이 무색하게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명료했다. 내 옆에서 그녀가 누워 자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예고에 불과했다.
아침이 밝아 오자 친구들은 하나 둘 일어나 인사를 하고 방을 떠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유독 잠이 많았던 그녀는 마지막 한 친구가 떠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방에는 나와 그녀만 남게 되었다. 나는 당황했으나 그녀는 잠시 잠에서 깨어서는 허리가 아프다며 이불을 찾을 뿐이었다. 이불을 꺼내 주자 다시 잠들었고, 나는 어떨떨한 채로 그녀와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 망상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장면들이 파편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와 내가 함께 잠을 자고, 눈을 떠서 키스를 나누고 포옹을 하고 서로를 보듬고 있었다.
뒤척이다가 다른 사람의 몸에 손이 닿는 낯선 느낌에 잠을 깼을 때는 벌써 해가 뉘엿한 저녁 시간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그녀와 내 손이 포개어져 있었다. 작고 통통한 그녀의 손이 더없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정신을 차리고 손을 얼른 치워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마음먹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 소리에 그녀가 잠에서 깰까 두려웠다.
그녀가 뒤척이는 바람에 손은 자연스레 떨어졌고, 잠시 후 그녀는 잠에서 깨 배가 고프다고 했다. 단 둘이 한 이불을 덮고 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어떤 놀라움이나 당황스러움도 표현하지 않았다. 아무 감흥이 없는 듯했다. 밖에 나가 저녁을 먹는 도중 그녀는 컴퓨터로 작업할 일이 있는데 자기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며 우리집에 온 김에 컴퓨터를 좀 써도 되냐고 물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당연히 된다고 답했고, 얼마나 써야 하냐는 물음에 그녀는 ‘며칠’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남녀가 한 방에서 며칠 밤을 지낸다는 건 당시 내 윤리적·상식적 판단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녀를 수년째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그 점을 모른다고 해도 이게 정말 정상적인 상황인가에 대한 의구심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평소에도 다른 친구들과 이렇게 지내 왔는지 별별 상상을 다 하게 되었다. 끝내는 그녀가 내게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망상 수준의 의심이 시작됐다.
그녀는 정말로 내 방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그동안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놀기도 했으며 밤에는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 물론 그 며칠 간 나는 한 숨도 제대로 못 잤음은 당연하다. 그녀가 내 옷을 입고 있는 모습,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모습, 나도 쓰는 것이지만 이상하게 더 향긋한 샴푸 향기, 이불 속에서 한 뼘 떨어져 있음에도 전해져 오던 온기, 그 모든 것이 나를 황홀하게 함과 동시에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잠을 잘 때는 매 순간마다 끓어 오르는 욕망을 이성으로 짓눌러야만 했다. 손만 뻗으면 그녀에게 닿을 수 있었고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었다. 내 눈 앞에 있음에도 내 것이 될 수 없음이 확실할 때, 그것을 계속 지켜 보는 것은 잔인한 고문에 가깝다. 차라리 고문이었다면 고문기술자를 탓하고 저주할 자유라도 있을 텐데, 스스로의 감정에 의한 고통일 경우 나 자신을 저주할 수 밖에 없는 끔찍한 자기파괴의 굴레에 빠지고 만다. 그녀와의 일주일은 그러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애써 외면하고 있던 한 가지 의문이 무의식의 벽을 넘어 머릿속으로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그녀는 누구보다 정숙하고 올바른 사람이었고, 일탈이나 충동과는 정반대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함께 밤을 보내는 데에 누구보다 신중하게 생각할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무방비의 상태로 나와 며칠 밤을 함께 보냈다는 건 단 한가지 논리로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나는 결코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이후로 설렘과 욕망은 모두 절망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녀의 모든 모습들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지금껏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음을 필사적으로 숨겨 온 내 잘못이었다. 그렇게 난 원망할 사람도 없는 고통을 받으며 스스로를 깊은 구렁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다 그녀가 내 방에 머물기로 한 마지막 날이 왔다. 평생 이런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할 것 같았지만 섣부른 고백은 우리의 관계를 망치고, 연애감정 때문에 친구를 잃게 되는 그녀에게 아픔을 줄 것이었다. 나 역시 내 인생에 빛이 되어 준 그녀를 잃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난 마지막 날까지도 그녀에게 그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녀와 마지막 밤을 보내며 그녀에게 고백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안기를 시도하는 대신 그녀만 남겨두고 방을 나와 버렸다. 그리곤 당시 근처에 있던 외삼촌 댁으로 술을 사들고 들어갔다. 마침 외삼촌은 며칠 집을 비운 상황이었다. 난 빨리 취해서 잠들고 싶어 술을 연거푸 마셔댔다. 내가 들어가지 않자 그녀가 메시지를 보냈다. 삼촌 댁에서 잘 테니 편히 있으라고 답장을 보냈고, 더 이상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정오 쯤, 역겨운 숙취와 함께 일어나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없었다. 책상과 이불을 비롯한 집안 전체가 정갈하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불을 펼치고 누웠다. 베개와 이불에 그녀의 향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한참을 누워 있었다. 자취를 했던 3년 동안 그렇게 외롭고 쓸쓸했던 적은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와 친구로 지내면서 얻는 기쁨보다 내 마음을 외면한 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로 그녀를 계속 마주 하는 것이 몇배는 더 고통스러웠다. 인간은 변할 수 없다고 믿었고, 나는 평생 그녀에게 그 어떤 마음도 건네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잃을 수 없는 친구라는 현실 사이의 딜레마에 빠져 결국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